항목 ID | GC052008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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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辛在浩 |
이칭/별칭 | 신희필(辛希弼),돈암(遯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 성암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514년 - 신재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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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50년 - 신재호 참봉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56년 - 신재호 창녕 현감에 임명 |
출생지 | 신재호 출생지 -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
거주|이주지 | 신재호 이주지 -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 성암리 |
사당|배향지 | 감모정 -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 성암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영산(靈山) |
대표 관직 | 창녕 현감 |
[정의]
조선 전기 의성으로 이주한 문신.
[가계]
본관은 영산(靈山), 초명은 희필(希弼), 호는 돈암(遯巖). 신춘(辛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 참의(工曹 參議) 신세조(辛世祖)이며, 아버지는 원종공신(原從功臣) 신한수(辛漢壽)이고, 어머니는 연일 정씨(延日 鄭氏)로 정홍준(鄭洪峻)의 딸이며,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 金氏)로 김인태(金仁泰)의 딸이다.
[활동 사항]
신재호(辛在浩)[1514~?]는 1550년(명종 5) 참봉(參奉)을 거쳐, 1556년 창녕 현감(昌寧 縣監)을 지내고, 이후 영산현에서 경상북도 상주군 구암리(九岩里)로 이주하였다. 진사(進士) 손윤업(孫胤業)과 친우 관계를 맸었다. 임진왜란 때 적군에게 쫓기던 손윤업이 넘쳐 흐르는 위천(渭川)에 뛰어들어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이때 그가 칡덩굴을 던져 주어 구출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만년에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 성암리 서쪽 오룡곡(五龍谷)[단북면 성암리]에 은거하면서 임진왜란을 피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성암리 일대에 세거하게 되었다.
[묘소]
『영산 영월 신씨 대동보(靈山 寧越 辛氏 大同譜)』에는 단북면 성암리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신재호와 손윤업의 우애와 학문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감모정(感慕亭)이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 성암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 철거되고 현재는 신재호의 유허비(遺墟碑)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