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8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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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祐 |
이칭/별칭 | 퇴재(退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위은숙 |
추모 시기/일시 | 1509년 - 신우 속수 서원에 배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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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신우 유허비각 중수 |
거주|이주지 | 효자리 -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 |
묘소|단소 | 신우 -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용사 1리 산39 |
사당|배향지 | 속수 서원 -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속암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아주(鵝洲) |
대표 관직 | 호군(護軍) |
[정의]
고려 후기 의성 출신의 무신이며 효자.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호는 퇴재(退齋). 아버지는 신윤유(申允濡)로 아주 신씨(鵝洲 申氏) 의성 입향조이다. 부인은 약목 유씨(若木 柳氏)이다.
[활동 사항]
신우(申祐)는 생몰년 미상이며, 고려 충혜왕 때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봉상(奉常)·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거쳐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일설에는 전라도 안렴사(全羅道 安廉使)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친의 3년상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그 자리에 대나무 두 그루가 자랐다는 것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내리고 살던 마을을 효자리(孝子里)라고 불렀다.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에게 영향을 받아 고려 멸망 후 고려에 대한 충성심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조카사위인 길재(吉再)와 고향에 은거하였고 이성계가 등극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행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실려 있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퇴재선생실기(退齋先生實紀)』 2권이 있다.
[묘소]
묘는 의성군 구천면 용사리에 있다. 용포재(龍浦齋)는 신우의 묘각으로 1956년 건축되었다.
[상훈과 추모]
1509년(중종 4년) 의성군 단밀면 속암리에 있는 속수 서원(涑水 書院)에 손중돈(孫仲暾)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단밀면 주선리에 있는 유허비각에는 3개의 비가 있는데 정경세는 묘표(墓表)를, 김응조(金應祚)는 봉안문(奉安文)을, 번암 채제공은 유허비명을 찬(撰)하였다. 비각은 최근 1992년에 중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