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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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文獻 |
이칭/별칭 | 전적(典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과 관련한 1945년 이전 편찬 기록 자료와 서적.
[개설]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고문헌과 관련된 곳은 조선 시대 경상도의 의성현(義城縣)과 비안현(比安縣), 상주목(尙州牧)의 속현(屬縣)인 단밀현(丹密縣), 예천군(醴泉郡)의 속현인 다인현(多仁縣), 그리고 용궁현(龍宮縣)의 일부가 해당된다. 고려 시대 이래 이들 지역의 토성(土姓) 세력 중에서도 특히 의성 김씨(義城 金氏), 비안 박씨(比安 朴氏) 등의 활동이 두드러지며, 혼인과 복거 등을 매개로 타 지역 재지 사족의 이주를 견인하였다. 이로써 조선 시대에는 사족으로 성장한 토성 세력과 더불어 안동 김씨(安東 金氏), 영천 이씨(永川 李氏), 함양 박씨(咸陽 朴氏), 아주 신씨(鵝洲 申氏), 풍산 유씨(豊山 柳氏), 진성 이씨(眞城 李氏), 순천 장씨(順天 張氏), 장흥 마씨(長興 馬氏) 등 많은 재지 사족들이 지금의 의성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의성 지역의 재지 사족 대부분은 인근 안동권의 영향을 받아 학문적으로 퇴계 학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활발한 학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런 가운데 여러 종류의 문자와 기록들이 작성되었으며, 그것이 고문헌(古文獻)의 형태로 성립되었다. 또한 이들은 학문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전적(典籍)들을 주고받거나 매입하였기에, 지금까지 적지 않은 고문헌들이 가장(家藏)되어 전해져 오고 있다. 하지만 의성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이러한 고문헌들에 대한 일괄적인 조사는 아직 미흡한 상태이며, 분실 및 도난과 후손들의 이주에 따른 자료 분산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의성의 고문헌]
1. 이탁영(李擢英)의 『정만록(征蠻錄)』[보물 제880호]
『정만록』은 경상도 의성현 출신의 영리(營吏) 이탁영[1541~1610]이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전란을 경험하면서 작성한 일기로, 92장의 필사본(筆寫本)으로 이루어져 있다.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던 영리가 전란 도중 작성된 각종 고문서를 채록해 놓았으며, 그의 전란 경험을 생생히 기록하였기에 『난중일기(亂中日記)』, 『징비록(懲毖錄)』과 더불어 임진왜란을 살펴보는데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1986년 10월 15일 보물 제880호로 지정되었다.
2. 『유금강산권(遊金剛山卷)』[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17호]
1604년(선조 37)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산운 마을 출신의 문신 이광준(李光俊)[1531~1609]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재임 시절, 두 아들인 이민성(李民宬)[1570~1629]·이민환(李民寏)[1573~1649], 그리고 간성 군수(杆城郡守) 최립(崔岦)[1539~1612], 흡곡 현령(歙谷縣令) 한호(韓濩)[1543~1605] 등의 벗들과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한 뒤 이정(李霆)[1554~1626] 등의 글씨·감상문·그림 등을 엮어 작성한 기행문이다. 1책 24장의 필사본으로 당대를 대표하던 문사들이 간여하여 미술사적·서예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2000년 4월 10일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17호로 지정되었다.
3. 의성 오봉 종택 소장 전적(義城梧峰宗宅所藏典籍)[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345호]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에 세거하고 있는 아주 신씨(鵝洲申氏) 가문에서 작성된 전적이다. 이 중 고문헌으로는 『제영남 동도회 제명권(第嶺南 同道會 題名卷)』, 『장사일록 장지(長沙 日錄 壯紙)』, 『재사완의(齋舍完議)』, 『구미 구보 신장도목완의(龜尾 舊洑 新粧都目完議)』, 『갑진 걸물절위사소(甲辰 乞勿絶倭使疏)』 등의 필사 원본 5책이 포함되어 있다. 2003년 3월 3일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45호로 지정되었다.
[의성의 문집]
조선 시대 지역의 명망 있는 사족들은 학문 연구와 창작 활동, 그리고 문자 수수를 통해 시(詩), 서(書), 상소(上疏), 서(序), 발(跋), 기(記), 제문(祭文), 설(說), 논(論), 잠(箴), 행장(行狀) 등의 글들을 작성하였다. 이러한 글들은 해당 저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후손들과 문인들이 그를 추모하는 차원에서 문집(文集), 실기(實記), 유고(遺稿) 등의 형태로 엮여져 간행되었다. 이런 사업은 곧 해당 저자의 학식이나 인품에 대한 지역 사회의 인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일찍이 영남 지역의 명망 있는 재지 사족 가문이 형성된 의성 지역에서도 이러한 인물들의 기록을 엮은 문집, 실기, 유고 등이 간행되었었다. 이 역시 해당 인물의 후손과 문인들 주도로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 시대 의성 출신 인사들의 문집으로는 신우(申祐)[?~?]의 『퇴재 선생 실기(退齋 先生 實紀)』, 박성양(朴成陽)[?~?]의 『금은 선생 실기(琴隱 先生 實記)』, 오국화(吳國華)[?~?]의 『금산 실기(錦山 實記)』, 김영렬(金英烈)[?~1404]의 『맹암집(孟巖集)』, 권식(權軾)[1423~1485]의 『행정 선생 실기(杏亭 先生 實記)』, 김광수(金光粹)[1468~1563]의 『송은집(松隱集)』, 신원록(申元祿)[1516~1576]의 『회당집(悔堂集)』, 박승(朴承)[1520~1577]의 『학천 유집(鶴川 遺集)』, 박안부(朴安阜)[?~?]의 『모재 선생 실기(茅齋 先生 實記)』, 박장춘(朴長春)[1529~1595]의 『우천 실기(愚泉 實記)』, 이광준(李光俊)[1531~1609]의 『학동 일고(鶴洞 逸稿)』, 이탁영(李擢英)[1541~1610]의 『효사 재집(孝思 齋集)』, 신흘(申仡)[1550~1614]의 『성은 선생 일고(城隱 先 生逸稿)』, 김사정(金士貞)[1552~1620]의 『후송재집(後松齋集)』, 신홍도(申弘道)[1558~1611]의 『만오집(晩悟集)』, 신지효(申之孝)[1561~1592]의 『응암 실적(鷹巖實蹟)』, 신지제(申之悌)[1562~1624]의 『오봉집(梧峰集)』, 장팔국(蔣八國)[1562~1633]의 『귀래정 유집(歸來亭 遺集)』, 김치관(金致寬)[1569~1661]의 『역락재집(亦樂齋集)』, 김태(金兌)[1561~1609]와 김진원(金震遠)[1601~1653]의 『수월 학록 양선생 유고(水月 鶴麓 兩先生 遺稿)』, 이민성(李民宬)[1570~1629]의 『경정집(敬亭集)』, 이민환(李民寏)[1573~1649]의 『자암집(紫巖集)』, 신적도(申適道)[1574~1663]의 『호계집(虎溪集)』, 신달도(申達道)[1576~1631]의 『만오집(晩悟集)』, 김회(金淮)[1578~1641]의 『경암 선생 실기(敬庵 先生 實記)』, 유단(柳𥚻)[1580~1612]의 『도암집(道巖集)』, 권수경(權守經)[1584~1659]의 『자락당 유집(自樂堂 遺集)』, 신열도(申悅道)[1589~1659]의 『나재집(懶齋集)』, 김상원(金尙瑗)[1598~1687]의 『남애집(南厓集)』, 이이송(李爾松)[1598~1665]의 『개곡집(開谷集)』, 신홍망(申弘望)[1600~1673]의 『고송집(孤松集)』, 신채(申埰)[1610~1672]의 『인재집(忍齋集)』, 이정기(李廷機)[1613~1669]의 『만옹 선생 유고(漫翁 先生 遺稿)』, 남몽뢰(南夢賚)[1620~1681]의 『이계집(伊溪集)』, 유백지(柳百之)[1628~1684]의 『이송당집(二松堂集)』, 신봉석(申鳳錫)[1631~1704]의 『자족재 유집(自足齋遺集)』, 임세장(任世章)[1637~1695]의 『모성당 일고(暮醒堂 逸稿)』, 김이구(金履矩)[1662~1772]의 『정락재 시집(靜樂齋 詩集)』, 변태화(卞泰和)[1682~1761]의 『농눌재 유고(聾訥齋 遺槁)』, 신정모(申正模)[1691~1742]의 『이치재집(二恥齋集)』, 이의태(李宜泰)[1701~1779]의 『근인당집(近仁堂集)』, 임필대(任必大)[1709~1771]의 『강와집(剛窩集)』, 구성옥(具性玉)[1724~1784]의 『농아당집(聾啞堂集)』, 김종덕(金宗德)[1724~1797]의 『천사집(川沙集)』, 유태춘(柳泰春)[1729~1814]의 『병촌 선생 유고(屛村先生遺稿)』, 신체인(申體仁)[1731~1812]의 『회병집(晦屛集)』, 박충원(朴忠源)[1735~1787]의 『도오 일고(陶塢 逸稿)』, 김종발(金宗發)[1740~1812]의 『용연 선생 일고(容淵 先生 逸稿)』, 김종섭(金宗燮)[1743~1791]의 『제암집(濟庵集)』, 조우각(趙友慤)[1754~1812]의 『창헌 유고(倉軒 遺稿)』, 신정주(申鼎周)[1764~1827]의 『도와집(道窩集)』, 신면주(申冕周)[1768~1845]의 『시남 선생 유고(市南 先生 遺稿)』, 이희발(李羲發)[1768~1850]의 『운곡집(雲谷集)』, 김양휴(金養休)[1777~1854]의 『율원 선생 유고(栗園 先生 遺稿)』, 김양정(金養楨)[1785~1847]의 『정암집(定菴集)』, 박종량(朴宗良)[1804~1876]의 『금파 유고(錦坡 遺稿)』, 김기선(金驥善)[1806~1883]의 『기서 문집(沂墅 文集)』, 김노선(金魯善)[1811~1886]의 『기계집(奇溪集)』, 남만회(南萬會)[1816~1886]의 『소계 문집(小溪 文集)』, 유도수(柳道洙)[1820~1889]의 『민산집(閩山集)』, 신상하(申相夏)[1839~1906]의 『구암집(矩庵集)』, 김재경(金在敬)[1841~1926]의 『지암집(持菴集)』, 박규환(朴珪煥)[1856~1921]의 『죽오 실기(竹塢 實紀)』, 강준형(姜峻馨)[1861~1935]의 『국농집(菊農集)』, 박세환(朴世煥)[1874~1966]의 『이산 문집(梨山 文集)』 등이 있다. 그 외 족보와 행장 등을 살펴보면 미간행된 유고(遺稿)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지리지류]
의성 지역과 관련된 지리지류 고문헌으로는 전국의 고을을 망라하는 과정에서 수록된 것과 의성군만을 다룬 것이 있다. 전자의 경우 국가적인 차원에서 작성되거나, 개인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 수록 지리지, 『경상도지리지(慶尙道 地理志)』,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 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輿地 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비롯하여, 19세기에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 邑誌)』와 『영남읍지(嶺南邑誌)』,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 『증보문헌비고(增補 文獻 備考)』, 일제 강점기 때의 『교남지(嶠南誌)』와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등이 해당된다. 이 중 관찬 지리지는 국가의 원활한 지방 통치가 그 주된 편찬 목적이었다.
의성군만을 다루고 있는 지리지류 고문헌은 의성 출신의 사족들이 주도하여 작성한 것이다. 보통 사찬(私撰) 읍지(邑誌)라 불리는 이러한 지리지들은 지역 문화의 정체성 확립과 애향심에서 비롯된 것도 있지만, 지역 내 사족들의 문중 의식도 크게 반영되어 있다. 대표적인 예가 17세기 초반 간행된 것으로 여겨지는 『문소지(聞韶誌)』이다. 『문소지』 간행에는 신열도를 비롯한 지역을 대표하는 사림들이 참여하였다. 현재 그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되지 않으나, 이후에 간행되는 관찬 및 사찬 지리지의 기본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외 1932년 류천(柳川)이 편찬한 뒤, 의성 석인당(義城 石印堂)에서 간행한 『의성지(義城誌)』, 해방 이후지만 이전 읍지의 형식을 따라 1962년 박재구(朴在九)와 임태순(任台淳)의 주도로 편찬된 『의성승감(義城 勝鑑)』이 전해진다. 의성군으로의 통합 이전 비안현에서 만들어진 지리지로는 관찬(官撰)으로 여겨지는 3종의 『비안여지승람(比安輿地 勝覽)』이 전한다.
한편 1743~1776년 사이에 편찬된 『단밀현지(丹密縣誌)』는 상주목의 속현이었던 단밀현을 대상으로 하는 읍지라는 점, 『구장지(龜庄誌)』는 현재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일대에 세거하고 있는 아주 신씨 가문 출신의 신정주가 편찬한 일종의 동지(洞誌)라는 점, 『미광(微光)』은 1926년 일본인 적도교웅(荻島敎雄)이 저작 겸 발행한 조문국(召文國) 관련 사료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기타 고문헌]
문집을 남긴 사족들을 많이 배출시킨 만큼, 이들에 의해 작성된 개별 고문헌도 다수 확인된다. 주로 성리학 관련 논설, 또는 그 실천 윤리인 의례 관련 논설, 그 외 일기류와 기행문 등이 전한다. 주요 문헌으로는 신원복(申元福)[1509~1584]의 『효우록(孝友錄)』, 윤국형(尹國馨)[1543~1611]의 『문소만록(聞韶漫錄)』, 신흘의 『난적휘찬(亂蹟彙撰)』과 『숭경록(崇敬錄)』, 신적도의 『창의록(倡義錄)』, 남해준(南海準)[1598~1677]의 『사례질의(四禮質疑)』, 신정모의 『소행록(素行錄)』, 김종덕의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 김종섭의 『대산서절요(大山書節要)』, 김양정의 『추로논사록(鄒魯論士錄)』, 오인섭(吳麟燮)[1844~1918]의 『승사록(乘槎錄)』과 『연행록(燕行錄)』, 유도수(柳道洙)의 『북천근포록(北遷芹曝錄)』과 『유배일기(流配日記)』 등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 자료 대부분은 필사본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많으며, 아직 공개되지 않은 필사본 형태의 적지 않은 개별 저작들이 여러 문중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지금의 의성군에 소재한 의성 향교와 비안 향교에는 향교 운영과 관련하여 여러 고문헌이 작성되어, 근래까지 전해졌으나 현재는 대부분 일실(逸失)된 상태이다. 다만 1999년에 간행된 『의성 향교지』와 1992년 간행된 『경북 향교 자료 집성(Ⅲ)』에 관련 문헌이 수록되어 있는 정도이다.
[책판의 제작]
의성 지역의 유력한 재지 사족들은 자체적으로 책판을 제작하여 여러 고문헌들을 간행하기도 했다. 주로 현조(顯祖)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가문별로 제작된 것들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의성 지역의 책판으로는 반남 박씨(潘南 朴氏) 가문의 『금파유고』, 아주 신씨 가문의 『고송집』·『오봉 선생 문집』·『오봉 선생 별집』·『자족재 유집』·『성은 선생 일고』·『이치재 선생 문집』·『호계 선생 유집』·『회당 선생 문집』, 안동 권씨(安東 權氏) 가문의 『자락당 선생 실적 변증록(自樂堂 先生 實蹟 辨證錄)』·『자락당 선생 유집』, 안동 김씨 가문의 『송은 선생 문집』과 『경심잠(警心箴)』, 영양 남씨(英陽 南氏) 가문의 『이계집』, 영천 이씨 가문의 『경정 선생 문집』·『경정 선생 별집』·『경정 선생 속집』, 진성 이씨 가문의 『근인당 문집』, 풍천 이씨(豊川 任氏) 가문의 『강와집』과 『모성당 일고』, 그리고 사찰인 고운사(孤雲寺) 소장의 『호계첩(護戒牒)』 등이 전한다. 이러한 다양한 책판의 존재와 제작은 근대 이전 의성 지역의 활발했던 문헌 간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