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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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對蒙抗爭 |
영어공식명칭 | Mongol Invasions of Korea |
이칭/별칭 | 항몽 전쟁,여몽 전쟁,고려-몽골 전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방문식 |
[정의]
고려시대 시흥 지역에서 이루어진 몽골군과의 전쟁.
[개설]
대몽 항쟁(對蒙抗爭)은 1231년(고종 18)부터 1259년(고종 46)까지 9차례에 걸친 몽골의 고려 침입으로 촉발된 전쟁으로 항몽 전쟁, 여몽 전쟁 등으로도 불리며 한반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이다. 고려시대 대몽 항쟁 중 시흥 지역과 관련이 있는 시기는 몽골군의 6차 침입기인 1256년(고종 43)이고, 지역은 소래산이 위치한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일대이다.
당시 몽골군이 안산에 상륙하여 북상하던 중 고려의 군대인 별초군(別秒軍)이 소래산 부근에서 몽골군을 기습하여 격퇴하였다. 이 전투는 고려시대 인주[지금의 인천광역시] 인근과 안산[지금의 경기도 시흥시·안산시] 일대에서 이루어졌으며 섬에 주둔하고 있던 삼별초(三別秒)가 육지에 나가 몽골군과 적극적으로 전투를 치르고 승리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역사적 배경]
대몽 항쟁의 배경을 살피려면 당시 몽골제국의 연원과 동향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테무진[鐵木眞]은 몽골 초원을 제패하고, 1206년(고려 희종 2) 소집한 쿠릴타이[대족장 회의]에서 칭기즈 칸[成吉思汗]의 자리에 올라 몽골제국을 세웠다. 몽골제국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복 전쟁을 벌였으며 중국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남송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남북으로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금나라의 여진족 일부는 요나라 거란족 유민들이 세운 대요국(大遼國)과 화합하여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몽골군에 쫓겨 1216년(고종 4) 고려 국경을 넘게 된다. 몽골은 여진족 일파가 세운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고려의 지원을 받아 강동성(江東城)에서 나머지 반대 세력을 소탕하게 된다. 이것이 강동성 전투로 고려와 몽골의 첫 대면이었다.
이때 몽골 원수(元帥) 카진[哈眞]은 고려 서북면 원수 조충(趙沖) 등과 양국의 결호(結好)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몽골은 해마다 과중한 세공을 고려 측에 요구하고 몽골 사신이 오만하게 구는 등 차츰 관계가 악화되어 갔다. 마침 1225년(고종 12)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고여(箸告與)가 고려 측에 공물을 요구하러 왔다가 의주[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를 거쳐 국경 지대로 가던 중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몽골은 고려의 소행이라 주장하면서 1231년(고종 18) 8월 압록강을 넘어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후 몽골의 9차에 걸친 침입이 있었고, 1259년(고종 46)까지 약 28년에 걸친 여몽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9차에 걸친 여몽 전쟁 가운데 시흥 지역과 관련이 있는 사건은 몽골의 7차 침입기[1255년 9월~1259년 3월]이며, 몽골군의 장기 주둔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자 6차 침입 이후의 연속 전쟁에 가까웠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 6차 침입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5차 침입기[1253년 7월~1254년 1월]에는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淐)이 입조하여 항복하면서 마무리되었지만, 몽골의 몽케 칸[원나라 헌종]이 당시 권세를 장악했던 최항(崔沆)과 고려국왕의 입조를 요구하면서 6차 침입[1254년 7월~1254년 12월]이 시작되었다.
몽골은 자랄타이[車羅大][또는 札剋兒帶]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아 고려 전역을 휩쓸었다. 그러나 김윤후(金允侯)가 지휘관으로 있던 충주성 공략에 실패하고, 우회해 상주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계속 남하하여 지리산까지 내려가 진주성을 목전에 두었으나 중앙의 명령으로 군을 개경으로 돌이키게 된다.
6차 침입은 5개월가량의 비교적 짧은 기간인데 피해는 극심하였다. 『고려사』에는 포로가 20만 6800여 명, 사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하였다. 몽골은 7차 침입 때부터 조도(槽島) 해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수군을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경기도 일원에서 강화도 연안에 대한 몽골군의 집중적인 공격이 시작되어 통진, 교하, 수안 등 서해안 지역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경과]
몽골 7차 침입기인 1256년(고종 43) 지금의 시흥 지역으로 추정되는 인주 경내에서 별초군이 몽골군을 물리친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즉, 1256년 4월 19일 밤, 대부도의 별초(別抄)가 인주 인근의 소래산 아래 성에 가서 몽골군 100명을 쫓아냈다는 기록이다. 당시 몽골군은 6차 침입 이래 정동원수였던 자랄타이 군대의 일부로 3월 27일 강화도 연안에 도착한 부대로 보인다. 대부도 별초는 초지량(草芝梁)을 통해 안산에 상륙하여 북상하던 중 소래산 부근에서 몽골군을 기습 격퇴한 것이다.
당시 전장이었던 소래산성의 소재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지금도 남아 있는 소래산의 명칭으로 지역과 장소는 대략적으로 추정 가능하다. 소래산은 북쪽으로는 주안산, 철마산에 이어 고려시대 계양도호부의 진산(鎭山)인 계양산으로 연결되며 인천, 부천, 시흥의 산세의 맥을 이루는 주산(主山)이다. 때문에 소래산은 예로부터 부평과 소사, 과천, 안산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소래포구를 거쳐 해양으로 향하는 요충지였다. 이곳은 보물 제1324호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 입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 시기에 안산의 별망성(別望城)에서는 삼별초군이 몽골군과 대치하여 싸우기도 하였다.
경기도 일원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강화도에 있던 고려 정부에 대한 압박이 심해졌다. 따라서 강화도 연안인 통진, 교하, 수안 등 서해안 지역에 몽골군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인한 피해가 누적되어 갔다. 덧붙여 인천의 영흥도는 1268년(고려 원종 9) 삼별초가 강화를 떠나 진도로 가는 동안 삼별초의 주둔지로 이용되었던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결과]
무신 정권 말기 김준(金俊)이 정권을 잡은 1258년(고종 45) 몽골은 입조하기로 한 고려의 태자가 오지 않자 9차 침입[1258년 4월~1259년 3월]을 단행하였다. 1259년(고종 46) 음력 3월 고려는 몽골에 조건부 항복을 하고, 그 대가로 왕의 출륙(出陸)과 입조(入朝), 태자 전(倎) 등 40여 명을 몽골에 보내고 강화도의 성을 헐었다. 그해 음력 6월 고종이 죽고 태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원종이 되었다. 이후 원의 간섭기가 시작되어
왕호(王號) 앞에 몽골에 대한 섬김의 의미로 '충(忠)' 자를 붙이고, 내정간섭으로 자주성을 상실하였으며 공물을 바치는 등 고려 말기까지 외세의 전횡이 이루어졌다.
[의의와 평가]
13세기 고려와 몽골 간의 전쟁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이었다.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몽골제국의 침략을 막아내고 자주국방과 민족의 자긍심을 발휘한 국가는 많지 않았다. 고려는 비록 전쟁에서 항복하였으나 조건부였고, 약 30여 년간 굳세게 나라를 방어하였다. 중앙이 무너지자 한 번에 함락당한 조선의 병자호란 사례와는 달리 고려의 대몽 항쟁은 지역별·주체별 다양한 저항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사례로 손꼽힌다. 특히 강화도가 위치한 서해안 일대, 그리고 지금의 시흥 지역은 고려 별초군이 적극적으로 육지에 나가 몽골군을 요격할 수 있도록 지역 주민들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