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478 |
---|---|
한자 | 京山志草稿本 |
영어공식명칭 | Gyeongsanji Original Edit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미진 |
[정의]
성주 지역 최초의 사찬 읍지인 『경산지』 의 초고본.
[개설]
『경산지(京山志)』의 집필 과정과 관련한 이원정(李元禎)의 친필 『경산지』 초고본이다. 이 친필 초고본은 이후 간본(刊本)과 비교해 보았을 때 서문(序文)이 쓰여지지 않은 상태이고, 내용 서술 중간에 첨삭한 부분이 많은 등 초고 단계의 미완의 사본(寫本)이다.
[저자]
이원정[1622~1680]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사징(士徵), 호는 귀암(歸巖)이다. 아버지는 이도장(李道長)이며, 어머니는 김시양(金時讓)의 딸이다. 학가재(學稼齋) 이주(李𦁖)의 문인이며, 큰 학자였던 할아버지 이윤우(李潤雨)에게도 수학하였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를 거쳐 1652년(효종 3)에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갑과로 급제, 검열·교리를 지내고 1660년(현종 1)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 1673년 도승지, 1677년(숙종 3) 대사간,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조판서 재임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초산에 유배되었다가 불려와 장살(杖殺)되었다. 9년 뒤인 1689년 신원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문집으로 『귀암선생문집(歸巖先生文集)』이 있다.
[편찬/간행 경위]
1677년 간행된 『경산지』 내 이원정의 서문에 따르면, 한강(寒岡) 정구(鄭球)의 제자로서 성주 팔거현(八莒縣)에 거주하고 있던 장현광(張顯光)이 1635년에 동문수학하고 있던 김주(金輳)와 여찬(呂燦)에게 읍지의 편찬을 권유하자, 이 두 사람은 도세순(都世純)과 함께 이 일을 추진하여 일부 지역의 기록을 수습한 뒤, 이도장에게 이 일의 완성을 위촉하였다. 그러나 이도장 역시 이 일을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남은 미완의 원고는 이도장의 아들 이원정이 현종 연간에 정계에서 물러나 집에 있으면서 수정 보완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경산지』 초고본이다. 이원정의 친필 원고는 이후 1677년(숙종 3) 성주 최초의 사찬 읍지 『경산지』의 간행으로 이어졌다. 『경산지』 초고본은 2005년 5월 23일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형태/서지]
『경산지』 초고본은 6권 2책으로, 판식은 사주 쌍변(四周雙邊)으로 계선이 있으며,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四瓣花紋黑魚尾)이다. 크기는 31.7×20.4㎝, 반곽(半郭)의 크기는 21.5×15.4㎝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0자이다.
[구성/내용]
모두 32개 항목이 6권에 걸쳐 분류 서술되어 있다. 권1은 경계 도리(境界道里), 건치 연혁(建置沿革), 관원(官員), 군명(郡名), 성씨(姓氏), 풍속(風俗), 형승(形勝), 산천(山川), 토산(土産), 수택(藪澤), 각방(各坊), 호구(戶口), 전결(田結), 공부(貢賦), 군액(軍額), 권2는 성곽(城郭), 궁실(宮室), 누정(樓亭), 학교(學校), 사묘(祠廟), 역원(驛院), 창고(倉庫), 불우(佛宇), 권3은 고적(古蹟), 총담(叢談), 총묘(塚墓), 제영(題詠), 명환(名宦), 권4~5는 역대 성주 출신 인물, 권6은 효자, 열녀, 부행(婦行), 우거(寓居)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최초의 성주 사찬 읍지로서 『경산지』 간행의 저본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특히 이원정의 ‘친필 초고본’으로서 『경산지』 편찬 과정과 목판본에 누락된 내용의 보완, 성주와 칠곡 지역의 지방사 연구에 활용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또한 항목 구성에 있어 대체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체제에 따라 항목을 분류하되, 자료의 취사와 서술에 있어 일정한 기준과 체계를 갖추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없는 항목을 상세히 서술하는 등 체제를 달리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예컨대, 신분이 미천하더라도 행실이 효열(孝烈)에 관계된 것이면 빠뜨리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떠도는 이야기라도 전할 만한 것이면 최대한 수렴하였으며, 정사(正史)에 기록된 내용이라도 잘못된 점이 있으면 변별하는 등 사실에 입각한 기록을 지향하였다.
인물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대부분의 읍지에서는 성관(姓貫)을 근거로 하여 본 고을에서 생장하지 않았더라도 토성(土姓)에 해당되면 모두 기록하였지만, 『경산지』 초고본의 경우 이와 반대로 본 고을에서 태어난 사람은 토성(土姓)이 아니더라도 그 행적을 자세하게 기록하는가 하면, 다른 고을에 산 사람은 비록 성관이 관계가 있더라도 그 대략만을 들거나 혹은 그 선조의 전기에 덧붙이는 등 거주지 중심으로 인물을 선정 수록하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이러한 체제는 이후 편찬, 간행된 여러 종의 성주 읍지의 전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