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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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京山志破板事件 |
영어공식명칭 | Destruction Event of the Seongju County Gazette, 『Gyeongsanji』|『Gyeongsanji』 Papan Sag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정철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681년 - 『경산지』 파판 사건 발생, 서인 강경파 이수언이 경상감사에 제수되고, 인동향교에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향전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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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682년 - 『경산지』 파판 사건 종결, 경상감사 이수언이 서인 선현들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실었다는 이유로 『경산지』를 파판함 |
발단 시기/일시 | 1680년 - 『경산지』 파판 사건,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권력 획득, 『경산지』를 편찬한 이원정이 역모 가담한 혐의로 귀양 가던 중 장살됨 |
전개 시기/일시 | 1681년 - 『경산지』 파판 사건, 이수언에 의해 남인계 인사들이 투옥되고 옥사함 |
발생|시작 장소 | 『경산지』 파판 사건 발생 장소 - 경상북도 성주군 |
종결 장소 | 『경산지』 파판 사건 종결 장소 - 경상북도 성주군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이수언|이원정|이도장|송시열|송준길|전극태|전극렴|이정화|채항길|김순발|장우추|서인|남인 |
[정의]
1681년 경상감사 이수언이 서인 선현을 모독했다며 성주군 읍지인 『경산지』 판적을 없애버린 사건.
[개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조정에서 남인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서인 정권이 남인 세력의 근거지인 영남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시작하였다. 『경산지(京山志)』 파판 사건은 서인 세력이 그런 공세의 하나로 남인 세력의 거두 이원정(李元禎)[1622~1680]이 간행한 『경산지』를 매개로 하여 영남의 향전(鄕戰)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경상북도 성주 지역 읍지에 대한 편찬 발의는 장현광(張顯光)[1554~1637]이 처음 시작하여 성주 출신 김주(金輳)와 여찬(呂燦)에게 편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이 진척되지 못하자 결국 이도장(李道長)[1603~1644]이 일을 맡게 되었다가, 얼마 후 이도장도 조정에 나아가게 되어 원고는 다시 상자 속에 방치되었다. 이후 이도장의 아들 이원정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고향에 내려와 1668년(현종 9) 무렵 아버지 뒤를 이어 편찬을 시작하여 1677년(숙종 3)에 『경산지』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이원정의 『경산지』는 그 후로 성주에서 편찬된 여러 읍지들의 선구가 될 정도로 내용이 충실하였다.
1674년(현종 15) 갑인예송(甲寅禮訟)부터 숙종 즉위 이후 1680년 경신환국 이전까지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 송준길(宋浚吉)[1606~1672]에 대한 처벌 상소가 올라가면서 서인 측은 이원정이 그 배후라고 보았다. 이런 시각은 서인 정권이 들어서는 1680년의 경신환국 때까지 이어졌고, 이후로 이원정은 서인의 주된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원정은 1680년 윤 8월 역모에 가담한 혐의로 초산으로 귀양을 가다가 조정으로 다시 불려가 장살되었다.
이원정이 편찬한 『경산지』는 읍지 형태였기에 내용상으로는 공격받을 여지가 크지 않았으나, 인물에 대한 서술에서 서인계 선현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가미하여 공격을 초래하였다. 이원정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서인들은 『경산지』의 일부 구절이 자신들이 존경하는 윤두수(尹斗壽), 송시열, 송준길, 정철(鄭澈)[1536~1584] 등의 선현들을 모욕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는 『경산지』의 파판과 국왕에게 올린 훼철 상소로 나타났다.
『경산지』 파판의 장본인은 1681년(숙종 7)에 경상감사가 된 이수언(李秀彦)이었다. 당시에 경상감사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수언은 서인 강경파의 일원이었다. 또한 그 무렵에는 중앙 정계의 분쟁과 마찬가지로 영남 지방에서도 향권을 두고 남인과 서인이 크게 대립하였다. 이수언은 경상감사로 있을 때 대구와 인동[현 경상북도 구미 지역] 등지에 서인 세력을 부식(扶植)하기 위해 크게 노력하였다.
[경과]
1681년 인동에서 인동향교(仁同鄕校)[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의 주도권을 놓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향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682년 서인계의 장경홍(張慶弘), 장류(張瑠)가 인동향교에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청원소를 위한 도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당시 향교는 남인계가 점거하고 있었다. 이에 장경홍과 장경홍의 조카 장유가 영남의 대표적인 서인 세력인 대구의 옥천 전씨 전극태(全克泰)·전극렴(全克念) 형제, 선산의 덕수 이씨 이정화(李鼎華), 함창[현 경상북도 상주 지역]의 인천 채씨 채항길(蔡恒吉) 등과 함께 인동향교에서 남인계를 몰아냈다. 인동향교의 주도권을 둘러싼 향전이 지속되자 인동부사 유진창(柳晉昌)의 보고를 받은 경상감사 이수언이 남인계 인사들을 잡아 오도록 명을 내렸고, 김순발(金順發), 장우추(張宇樞)가 감옥에서 죽기에 이르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이원정이 장하에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682년에, 경상감사 이수언은 이이(李珥)[1536~1584]·조헌(趙憲)[1544~1592]·정철 등의 선정을 모욕하는 내용을 담았다는 이유로 『경산지』의 판본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관련 내용을 치계(馳啓)하면서 책을 태워 없애 본보기를 보여줄 것을 청하였다.
[결과]
이수언의 요청에 대해 조정에서는 목판을 이미 없앴는데 간행된 책까지 굳이 태워버릴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환송하였다. 이후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경상감사에 남인계인 이현석(李玄錫)[1647~1703]이 임명되자, 남인계 후손들이 『경산지』 파판 사건이 편파적으로 처리되었다고 청원을 하였다. 이때 장우추의 아들 장차익(張次翼)은 경상감사 이현석에게 격쟁을 하면서 1680년 이원정의 귀장(歸葬) 후에 감사와 서인계가 억울하게 치전(致奠)을 드린 자들의 죄를 만들었다고 말하였다.
[의의와 평가]
『경산지』 파판 사건은 향전 처리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벌어졌고, 따라서 1682년 당시 영남 지역에서 남인에 대한 정치적 강경책의 일환으로 일어난 일이었다는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