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1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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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化-藝術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집필자 | 이정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8년 - 문화 단체 총연합회 서귀포 지부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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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5년 -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서귀포분회로 개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6년 -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서귀포 지부로 개칭 |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437-5 | |
김정문화회관 동흥야외공연장 - 서귀포시 강정동 176 | |
서귀포시민회관 - 서귀포시 동홍동 454 | |
제주국제컨벤션센터 탐라홀 - 서귀포시 중문동 2700 | |
천지연야외공연장 - 서귀포시 서홍동 689 | |
칠십리야외공연장 - 서귀포시 서홍동 689 | |
이중섭미술관 - 서귀포시 서귀동 532-1 | |
신영영화박물관 - 서귀포시 남원읍 남원리 2381 | |
롯데시네마 - 서귀포시 법환동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지역을 무대로 문학·음악·미술·무용·사진·연극·영화 등의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
[개설]
서귀포는 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유명 관광지면서, 감귤을 주요 생산품으로 하는 1차 산업 지역이다. 따뜻한 기온과 풍요롭고 청정한 자연환경, 인심 좋은 사람들, 좋은 먹거리 등이 자랑거리다.
이 때문에 서귀포는 언제나 문화·예술인들이 안정적이고 편안한 상태에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특히 서귀포를 둘러싼 천혜의 청정 자연환경은 문화·예술인들의 창작 욕구를 극대화시키는 촉매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에 몇 작품에서는 서귀포시가 일반인들이 간절히 꿈꾸는 이상향으로 묘사되었다. 그렇게 문화·예술인들에게 서귀포시는 삶의 고통을 없애고, 언제든지 편히 쉴 수 있는 넉넉한 안식처로 인식되었다.
[내용]
1. 발전 과정
1948년 제주 4·3 사건과 1950년 한국 전쟁 등의 혼란기가 제주에 덮치며, 1950년대 서귀포 지역의 문화·예술은 암흑기를 보냈다. 1952년을 전후해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제주에 피란을 왔는데, 이들은 서귀포 지역민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치며 서귀포 지역 문화·예술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50년대 제주에 거주했던 중앙의 문화 예술인들과 몇몇 예술 지망생들은 문화 예술인들을 모아 예술 단체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서귀포시 지역에서도 그 흐름에 맞춰 1958년 ‘문화 단체 총연합회 서귀포 지부’가 만들어졌으며, 이후 서귀포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하여 많은 활동과 업적을 남겼다.
문화 단체 총연합회 서귀포 지부는 1958년 6월 탐라 예술제를 개최하여 본격적으로 서귀포 지역의 문화·예술 역량을 결집했다. 탐라 예술제를 통해 문학·미술·서예·음악·사진·농악·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소개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서귀포 지역에서도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배출되었다.
문화 단체 총연합회 서귀포 지부는 1985년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서귀포 분회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1996년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서귀포 지부로 이름을 바꾸며 서귀포 문화·예술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2. 주요 문화·예술인
서귀포시를 대표하는 많은 문화·예술인이 있는데, 서귀포 태생은 물론이고 전쟁을 피해 왔거나 서귀포의 독특한 지역색에 감화되어 서귀포에서 살면서 뚜렷한 예술적 성취를 남긴 도외 예술인들도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가 이중섭이다. 평안남도 평원 출신인 이중섭은 1951년 1월 서귀포시로 피란 와 11개월간 거주하면서 「서귀포의 환상」·「섶섬이 보이는 풍경」·「바닷가의 아이들」 등 서귀포 시대의 명작을 남겼다. 특히 이중섭은 피란 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통해 서귀포를 이상향으로 묘사했다. 미술계를 대표하는 또 다른 인물로 변시지 화백이 있다. 호가 우성으로 서귀포시 서홍동에서 태어났다. ‘폭풍의 화가’로 알려져 있는 그는 제주 고유의 색과 빛으로 제주의 바람과 말 등을 표현해 왔다.
문학계에서는 김광협 시인과 한기팔 시인, 오성찬 소설가 등이 서귀포시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평가받는다. 김광협 시인은 1941년 호근동에서 태어나 대표작으로 「유자꽃 피는 마을」을 냈다. 한기팔 시인은 1937년 서귀포 보목 마을에서 태어나 병영 생활 외에는 고향을 떠나지 않은 순백의 향토 시인이다. 오성찬 소설가는 1940년 서귀포시 서호동에서 태어났다.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별을 따려는 사람들」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후 수 많은 소설과 산문집을 냈다.
서예에서는 현중화를 들 수 있다. 호가 소암으로 1907년 서귀포시 법환 마을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로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소암체’라는 독특한 서풍을 진작했다.
사진에서는 김영갑을 들 수 있다. 1985년 제주에 정착하여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제주 섬을 누비며 제주도의 들과 구름, 산과 바다, 나무와 억새 등의 자연 풍경을 소재로 한 수많은 사진 작품을 남겼다. 2002년에는 성산읍 삼달리에 있는 삼달 초등학교 분교를 임대하여 개조한 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개관하였다.
3. 주요 문화·예술 행사
서귀포시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행사로, 1958년 6월 8일부터 3일간에 걸쳐 서귀포시 내 일원에서 열린 제1회 탐라 예술제가 서귀포에서 열린 최초의 문화 축제로 기록된다. 하지만 제3회 탐라 예술제 행사가 끝나고 1961년 5·16 군사 정권의 임시 조치법에 의하여 전국 문화 단체 총연합의 기능이 해체되면서 서귀포 지부도 활동이 정지되었다. 제3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다시 탐라 예술제가 부활하였는데, 제4회 탐라 예술제를 시행한 후 예산 문제와 주관 부서의 문제, 이를 뒷받침하게 될 예술 단체의 부재로 행사의 계속성 여부가 검토되었다.
이후 1966년에 이르러 다시 재건 국민 운동이 민간 주도형으로 국민 계몽 차원의 지역 문화 선양이라는 취지 아래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제주도 지부와 보조를 같이하여 한라 문화제의 행사를 추진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명칭이 ‘제5회 한라 문화제’다. 한라 문화제는 2002년부터 다시 탐라 문화제로 명칭이 변경되어 열렸으며, 2012년에는 ‘2012 대탐라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열리게 된다.
이와 함께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서귀포 지부는 화가 이중섭을 기리는 ‘이중섭 예술제’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이중섭 예술제는 1회를 서귀포시가 주최하다 2회부터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서귀포 지부가 주관하게 되었다. 서귀포시는 이중섭의 예술성을 기념하고 서귀포시의 문화와 예술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최초로 화가의 이름을 거리명으로 제정하고, 이중섭이 거주하던 옛집을 복원하는 등 이중섭을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였다.
4. 주요 문화·예술상
서귀포시의 문화 향상에 힘쓰고 학문과 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현저한 시민을 기리기 위하여 서귀포시민상이 제정되었다. 서귀포시민상은 1991년부터 매년 서귀포시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주어졌는데, 2005년까지 시행되다가 2006년부터 중단되었다.
5.주요 문화·예술 시설
서귀포시의 주요 공연장으로는 김정 문화 회관 동홍 야외 공연장, 서귀포 시민 회관, 서귀포 학생 문화원 공연장, 제주 국제 컨벤션 센터 탐라 홀, 천지연 야외 공연장, 칠십리 야외 공연장 등이 있다. 미술관은 기당 미술관과 이중섭 미술관, 소암 현중화 기념관 등이 있다. 영화 관련 시설로는 제주 월드컵 경기장 내에 롯데 시네마 서귀포 7개 관이 있고, 남원읍에 신영 제주 영화 박물관이 운영 중에 있다.
[현황]
다른 지방의 시·군 지역과 마찬가지로, 서귀포시의 문화·예술 토양은 수도권이나 제주시에 비해 척박하다. 중앙에 편중된 문화·예술의 창작 및 소비 구조로 인해 서귀포시에 머물러 창작 활동을 벌이는 문화·예술가가 상대적으로 적고,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시설 등의 인프라도 부족해 지역민들의 문화적 박탈감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인구가 갈수록 줄어드는 등 서귀포시가 도시로서 활력을 잃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귀포시와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서귀포 지부가 중심이 되어 각종 문화·예술 발전 대책이 수립되어 시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