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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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法華寺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1071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한금실 |
건립 시기/일시 | 1269년(원종 10년) - 법화사 건립 공사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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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279년(충렬왕 5년) - 법화사 창건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986년 - 법화사 재건 |
현 소재지 | 법화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1071 |
성격 | 사찰|절 |
창건자 | 미상 |
전화 | 064-738-5225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 관음사 소속 사찰.
[건립 경위 및 변천]
법화사는 고려시대 제주 최대의 가람으로 전해지며, 창건 연대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으나 현재 통일신라시대의 장보고에 의한 창건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법화사의 중창은 고려 1269년(원종 10년)부터 1279년(충렬왕 5년)까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원나라가 제주를 남송 및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전략적 배경이 있지 않은가 하는 시각이 있다.
법화사에는 원나라의 양공(良工)이 주조한 아미타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며, 비보사찰로써 노비가 300여명에 이르는 등 위세를 크게 떨쳤었다. 그러나 원이 멸망하고 이어 등장한 명나라에서는 법화사에 안치된 금동아미타삼존불상을 가져가기 위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고, 제주에 직접 들어와서 금동불상 3좌를 가져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탐라의 형세를 파악하고자 하는 명나라 황제의 다른 의도가 있다는 주위의 권고에 따라, 조선의 태종은 급히 김도생과 박모를 보내어 법화사의 불상을 가져오게 하여 명나라 사신들에게 전해주었다. 명나라에서는 고려 말 이래로 제주도를 자국의 영토로 귀속시키고자 여러 차례 문제를 거론하여 왔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제주도 문제에 대해 상당히 예민해져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원나라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커다란 위세를 떨치던 법화사의 교세는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1408년(태종 8)에는 법화사의 노비 280인 가운데 30인만 남게 하고 나머지는 전농사로 삼았다. 그 결과 16세기 후반에 와서 법화사는 폐사되며, 이후 17세기에 초가 암자 몇 채가 지어져 사찰의 명맥을 유지해 오나 18세기에는 그것마저 사라지게 된다. 그로부터 근대에 들어오기까지 법화사에 대한 기록은 전무한 상태다. 하지만 근대 초인 1921년에 이회명 승려가 법화사에서 동안거 설법을 했다는 기록이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910년대에 이미 인근 법정사와 함께 사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법화사는 1926년 초 관음사 주지 안도월과 안봉려관에 의해 산남의 제주 관음사 포교지소로 새롭게 건물을 짓고 중흥의 시기를 맞는다. 그리고 그 해 음력 칠석일에 봉불식을 거행하여 이회명을 담임포교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1939년에는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대학에서 제주 순회강연을 개최하였는데, 관덕정·한림항·서귀포공립소학교에 이어 법화사에서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강연이 열리기도 했다.
근대에 활발한 포교활동을 펼치며 산남의 불교를 대표해 오던 법화사는 그러나 해방 이후 군에 의해 두 차례 소실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1948년 제주4·3사건이 한창이던 음력 10월 토벌대에 의해 법화사는 전소되었다. 그리고 1950년, 4·3사건이 진정국면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법화사 주지였던 장영복은 그 해 3월에 새로이 35평의 법당과 요사 등을 짓고 법화사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다시 6·25사변이 일어나면서 꺾이고 만다. 인근 모슬포에 육군훈련소가 세워지면서 1952년 법화사는 육군의 제3숙영지로 접수되어 또다시 폐사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법화사가 재건된 것은 정화의 바람이 불던 1960년대 후반이다. 당시 법화사 터에 정지 작업을 하던 중 직경 80~120cm의 주초석과 거대한 지대석들이 발견되어 발굴조사에 착수하게 되었고, 현재 다수의 유물과 여러 동의 건물 터가 발견되어 복원불사가 진행 중이다. 지금의 대웅전은 1987년에 중창하였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법화사는 1987년 대웅전 복원을 시작으로 2001년에 구품세계관을 상징하는 3,000평 규모의 구품연지를 복원하며 옛 명성을 되찾고 있다. 2004년에는 구품연지 안에 건평 54평의 2층 누각인 구화루를 완공하며 1단계 복원사업을 일단락 지었다. 2007년부터는 일주문·사천왕문·나한전·승방·강당 등을 추가로 복원하여 법화사의 옛 모습을 재현해내고 있다. 법화사지는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관련 문화재]
제주대학교 박물관의 법화사지 발굴 조사에서 법화사의 건물지는 모두 10동이 발굴되었다. 가장 큰 법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에서만도 지대석이 13매가 나왔다. 이 기단의 규모로 보아 이곳에는 가로 21m, 세로 16m, 면적 238㎡, 약 105평 규모의 건물이 존재하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사찰 경내에는 기와를 깔아 놓은 보도가 건물마다 설치되고 담장이 둘러져 있던 것도 확인되었다.
특히 담장 밖 폐와무지에서는 법화사의 중창을 알려주는 ‘지원육년기사시(至元六年己巳始)’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또한 운봉문 암막새, 운룡문 수막새 등 다수의 기와와 고급품의 도자기들도 상당수 출토되었다. 이 도자기들은 대부분 청자편이다. 청자 음각 앵무문 대접을 비롯한 국당초문 대접·운용문 대접·포도문 대접·청자상감 매병·청자상감 화병·청자상감 국화문 마상배 등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청동 숟가락·청동 소형종지·개원통보(開元通寶)와 더불어 나한상으로 보이는 소불(小佛)이 어깨 윗부분이 파손된 채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