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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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始復 |
이칭/별칭 | 중초(仲初),휴곡(休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재형 |
[정의]
조선 후기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중초(仲初), 호는 휴곡(休谷). 아버지는 오정규(吳挺奎)이고 할아버지는 오정(吳靖)이며, 증조부는 우참찬을 지낸 오억령(吳億齡), 외조부는 이여황(李如璜)이다.
[활동 사항]
오시복(吳始復)[1637~1716]은 1662년(현종 3)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어 수찬(修撰)·정언(正言)·지평(持平)·교리(校理)·이조 정랑·사인(舍人) 등을 거쳐 1675년(숙종 1)부터 승지·이조 참판·개성 유수를 역임하고, 강릉 부사가 되었다가, 부임 전에 허적(許積)에게 아첨하였다 하여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파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조 참판에 이어 한성 판윤·호조 판서가 되었다. 이때 그는 경비 부족을 메우기 위해 각 도, 각 읍의 은을 캐는 지역인 채은처(採銀處)를 호조에서 관장하여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였고, 각 아문의 둔전 경영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이조 판서 겸 수어사를, 이어 다시 호조 판서가 되었으나 갑술옥사로 하옥, 유배되었으며, 1697년 풀려나와 우부 빈객을 지냈다.
1702년(숙종 28) 5월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남인인 오시복은 정묵당·권중경과 결탁하여 장희빈을 복위하고자 기도하였다. 그들이 연서하여 복위의 상소를 올리기에 앞서 이상징은 장희빈의 인현왕후에 대한 제복(制服)문제를 가지고 상소하면서 임금의 뜻을 타진하였다. 그 상소문 가운데 ‘왕의 침전이 비었다’라는 ‘적의수공(翟儀遂空)’이란 구절이 있어 임금이 거슬리는 바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 대정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 1712년 전라도 함평·강진 등지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에 경상도 영해부에 이배되어 1716년 영해부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