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13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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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楊州 好坪洞 舊石器遺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물 산포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 |
시대 | 선사/석기 |
집필자 | 성춘택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2년 5월~2004년 11월 - 남양주 호평동 구석기유적 발굴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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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남양주 호평동 구석기유적 -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 |
성격 | 선사 유적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에 있는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
[개설]
남양주 호평동 구석기유적(南楊州 好坪洞 舊石器遺蹟)은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에서 발굴 조사된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이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차에 걸쳐 모두 네 지점으로 나눠 발굴 조사하였다. 1·2지점[지역]은 퇴적층과 문화층의 보존 상태가 좋고 유물도 집중 출토되었으며, 약 6분의 1 정도 면적을 조사한 이후 유적 공원으로 보존되었다.
[위치]
남양주 호평동 구석기유적은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 64-1 일원으로 추정된다. 천마산과 백봉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있다. 주변에는 천마산에서 사능천이 흘러 왕숙천으로 합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남양주 호평동 구석기유적은 공동주택 신축 전 기와 가마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석기 시대 석기가 알려지면서 2002년 5월부터 2004년 11월까지 3차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출토 유물]
남양주 호평동 구석기유적은 표토 아래 각력과 모래, 점토가 혼합된 2개 층이 있고, 아래 땅갈라짐[토양쐐기] 구조가 있는 갈색사질점토층[3층], 쇄설각력층[3·4·5층], 담회청색니사질층, 그리고 풍화암반층으로 이어진다. 3[지]층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조사단은 상부[3a층]문화층과 하부[3b]문화층으로 나누었다. 모두 1만 점이 넘는 석기 가운데, 9,298점이 발굴 유물이며, 하부의 1문화층에서 3,168점, 2문화층에서 5,889점을 수습하였다. 하부 1문화층 석기는 대부분 맥석영[96%]이며, 찍개와 다면구[여러면석기], 긁개, 홈날 등이며, 응회암 돌날을 떼어 잔손질하여 만든 슴베찌르개가 3점 나왔다. 상부의 2문화층의 유물은 맥석영[54%]과 함께 상당수의 흑요석[22%, 1029점], 혼펠스[16%], 유문암으로 만든 것들이다. 잔몸돌[세석핵]과 잔돌날[세석인]이 많이 수습되었고,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밀개와 매우 작은 잔돌날의 한쪽 끝을 정교하게 잔손질하여 만든 송곳[뚜르개, microdrills]도 나왔다.
[현황]
남양주 호평동 구석기유적 발굴 조사에서는 숯을 시료로 하여 여러 방사성 탄소 연대를 확보하여 유적에서의 점유 시점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그 결과 하부의 1문화층의 연대는 30,000±500 BP에서 27,500±500 BP 사이[4개]에, 그리고 상부의 2문화층에선 24,100±200 BP에서 16,190±50 BP에 이르는 연대를 10개 얻었다. 연대를 보정하면 1문화층은 35,000~30,000년 전에 이르는 후기 구석기 시대 초에 호평동을 찾던 수렵 채집민이 남겼음을 알 수 있다. 2문화층은 이른 연대는 28,000년 전까지 올라가며, 늦은 연대는 19,500년 전까지 내려오기에 몇 차례 다른 시점의 점유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2문화층은 가장 추웠던 최후빙하극성기[27,000~19,000년 전]의 수렵 채집민이 남긴 것이다.
1,000점이 넘게 나온 흑요석[85.4%] 대부분은 1지점의 서남쪽 A구역 9x6m 범위에 밀집하여 있었지만, 맥석영제 석기는 A, B, C, D구역에서 고르게 나왔다. 철도 부지에 대한 추가 조사에서도 5000점 넘는 석기를 수습하였다. 80%가 넘는 석기가 맥석영제이며, 혼펠스로 만든 것이 15.9%[867점], 흑요석은 46점만이 나왔다. 맥석영이 집중 분포하는 곳에서는 23,540±150 BP 등의 비슷한 시기 방사성 탄소 연대 3개가, 그리고 혼펠스 석기가 밀집한 곳에서는 17,930±100 BP 등 비슷한 연대 3개가 알려졌다.
[의의와 평가]
남양주 호평동 구석기유적에서는 후기 구석기 시대 초의 슴베찌르개와 돌날을 중심으로 하는 석기군과 함께 최후빙하극성기의 흑요석으로 만든 잔석기[세석기]와 밀개 등 다양한 석기가 수습되었다. 숯을 시료로 얻은 방사성 탄소 연대 역시 밀집 분포하고 있어 신뢰할 수 있는데, 잔석기와 흑요석의 사용이 빠르면 28,000년 전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때부터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서 매우 작고 정교한 석기 제작에 흑요석을 사용한다. 남양주 호평동을 비롯한 한반도 중부 지방에서는 포천의 늘거리, 용수재울, 화대리, 의정부 민락동, 연천 통현리, 홍천 하화계리, 인제 부평리 등 여러 유적에서 흑요석기가 알려졌다. 분석에 따르면 거의 모든 흑요석은 백두산이 원산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원산지와 직선거리로만 500㎞가 넘는다. 따라서 아무리 정교한 석기를 만드는 데 좋은 재질을 가진 돌이라 할지라도 직접 채집하여 오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혹한 환경을 살았던 수렵 채집민은 작은 집단이 이동 생활을 하면서도 주변 무리와 상시로 만나 정보와 물자를 나누고 혼인 관계를 맺으며 살았다. 이런 교류 과정에서 흑요석 같은 물품이 먼 곳에서 들어왔을 것이다. 이처럼 흑요석제 석기는 후기 구석기 시대 수렵 채집민의 광역의 교류 네트워크의 일단을 보여 준다.
흑요석은 자연 유리라 불릴 만큼 정질의 암석이기에 깨뜨리면 매우 날카로운 날을 얻을 수 있다. 먼 곳에서 들어온 희소한 돌감[석재]인 탓에 작고 정교한 석기를 만드는 데 쓰였고, 될 수 있는 한 떼어 낼 수 있을 때까지 집중적으로 이용한 듯하다. 호평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잔돌날의 한쪽 끝을 정교하게 잔손질하여 뾰족하게 만든 것이다. 아마도 송곳처럼 구멍을 뚫는 데 쓰였을 것이며, 사용흔 분석 결과도 추정과 비슷하게 나왔다. 혹한 환경을 살았던 이동 수렵민은 밀개를 이용해 가죽을 손질[무두질]하여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실로 꿰매 매우 든든한 옷을 입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