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8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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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 强占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명학 |
[정의]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1945년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역사.
[행정구역]
일제는 효율적인 지방 지배를 위해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실시했다. 목적은 지방 지배의 핵심 단위인 면을 통폐합하여 재정 자립도를 향상하는 것이었다. 이에 지금의 남양주 지역에 해당하는 옛 경기도 양주군에 속한 면은 30개에서 16개로 줄어들었다. 구체적으로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변화상을 살펴보면 경기도 양주군 미음면, 금촌면, 상도면 일부가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으로 합쳐졌고 경기도 양주군 내동면, 별비면 일부, 노원면 불암리가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으로 통합되었다. 이어서 경기도 양주군 초부면, 와공면, 하도면 일부가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으로 합쳐졌고 경기도 양주군 진관면과 건천면이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으로 통합되었다. 마지막으로 경기도 양주군 진벌면, 접동면, 별비면 일부가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으로 합쳐졌고 경기도 양주군 상도면 일부와 하도면이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으로 통합되었다. 1914년에 형성된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면 단위 행정구역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인구]
전형적인 농촌 사회였던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인구 변동은 심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조사에 의하면, 1925년 10월 1일 기준으로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전체 인구는 8,114세대에 4만 4497명이었다. 세부적으로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이 1,354세대에 7,364명, 양주군 별내면이 943세대에 5,111명, 양주군 와부면이 1,745세대에 9,800명, 양주군 진건면이 1,157세대에 6,421명, 양주군 진접면이 1,366세대에 7,280명, 양주군 화도면이 1,549세대에 8,521명이었다.
그러다가 20년이 흐른 1944년 5월 1일 시점에서는 총 세대가 9,275세대로 14.3% 증가했다. 인구는 5만 550명으로 13.6% 늘어났다. 이를 면 단위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양주군 미금면이 1,656세대에 8,841명, 양주군 별내면이 1,070세대에 5,866명, 양주군 와부면이 1,991세대에 1만 900명, 양주군 진건면이 1,245세대에 6,943명, 양주군 진접면이 1,556세대에 8,480명, 양주군 화도면이 1,757세대에 9,520명이었다.
[경제 구조]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다. 전체 인구의 85% 이상이 농업에 종사했다. 경작지 가운데 논과 밭의 비율은 논이 45%, 밭이 55% 정도로서 경기도의 전작지대에 해당하는 다른 지역에 비해 논의 비율이 높았다. 구체적으로 1938년 당시 쌀의 작부(作付) 면적과 수확고, 그리고 반당(反當) 수확량을 살펴보면, 먼저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이 748.7정(町), 1만 3691석(石), 1.829석이었고, 양주군 별내면이 618.9정, 1만 500석, 1.697석이었다. 이어서 양주군 와부면이 692.1정, 9,652석, 1.395석이었고, 양주군 진건면이 883.6정, 1만 3000석, 1.471석이었다. 마지막으로 양주군 진접면이 713.5정, 1만 667석, 1.495석이었고, 양주군 화도면이 736.6정, 1만 4355석, 1.949석이었다. 전체적으로는 4,393.4정, 7만 1865석, 1.639석이었다.
한편 토지조사사업 이후 식민지 지주제가 강화되는 경향은 경기도 남양주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0~30년대 계층별 농가 비중을 보면, 1921년 옛 경기도 양주군에서는 지주가 3%, 자작농이 10%, 자작 겸 소작농이 35%, 소작농이 52%였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계층별 농가 비중은 지주가 255호로 3.7%, 자작농이 505호로 7.2%, 자작 겸 소작농이 1,517호로 21.8%, 소작농이 4,693호로 67.3%를 차지했다. 대략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자작농과 자작 겸 소작농이 몰락하고 반대로 소작농이 대폭적으로 증가하는 농가의 하향 분해가 심화되었던 것이다.
[교육]
3면 1교제에서 1면 1교제로의 전환이 상징하듯이 일제의 교육 정책은 초등교육 확충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초등 교육 기관은 이 기조에 따라 서서히 늘어났다. 시작은 1918년 세워진 금곡공립보통학교[현 금곡초등학교]였다. 1922년에는 장현·마석공립보통학교가, 1924년에는 덕소공립보통학교가 신설되었다. 1934년에는 별내공립보통학교를 비롯하여 덕소·마석공립보통학교의 부설기관으로 송촌·운수간이학교가, 1935년에는 진건공립보통학교가, 1938년에는 진건공립보통학교 부설기관으로 오남간이학교가, 1939년에는 조안공립심상소학교가 세워졌다. 1944년에는 정식 학교를 대신하여 마석·장현국민학교 부설기관으로 답내·부평분교장이 인가되었다.
[사회운동]
1919년 3·1운동이 막을 내린 이후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서는 1930년대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이상촌건설운동이 두 곳에서 전개되었다. 첫 번째는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의 전동이었다. 주도 인물은 이재희(李在熙)였다. 1930년 1월 이재희는 마을 주민을 규합하여 전동진흥회(全洞振興會)를 조직하고 농사 장려와 생활 개선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933년 5월에 이르러 주민 36호는 모두 자급자족의 길에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이재희와 동리 유력자의 도움을 받아 양주금융조합으로부터 저리 자금을 융통하여 논 3정보(町步)와 밭 3.5정보를 공동 명의로 구입했다.
두 번째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 봉안마을이었다. 주도 인물은 봉안 출신인 김용기(金容基)였다. 1935년 김용기는 4,000여 평[약 1만 3223㎡]의 땅을 장만한 후에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을 모아서 이상촌 만들기를 시작했다. 공동체주의와 연대의식에 기초한 이상촌건설운동은 짧은 시간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출발 당시 40여 명이었던 주민은 1940년에 이르러 64명으로 증가했고 밭과 논은 각각 1만 3000평[약 4만 2975㎡]으로, 과수원은 1만 2000평[약 3만 9669㎡]으로 대폭 늘어났으며, 농가 경제는 자제 1명을 외지 중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을 정도로 향상이 되었다. 여타의 농촌 사회가 일제의 갖가지 수탈로 피폐해지는 상황에서 이상촌의 주민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생활을 영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