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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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善道 |
이칭/별칭 | 약이(約而),고산(孤山),해옹(海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채용 |
출생 시기/일시 | 1587년 6월 22일 - 윤선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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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94년 - 윤선도 윤유기에 양자 입양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03년 - 윤선도 남원 윤씨와 혼인 |
활동 시기/일시 | 1603년 - 윤선도 진사 초시 합격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09년 - 윤선도 생모 순흥 안씨 상 |
활동 시기/일시 | 1611년 - 윤선도 전라남도 해남으로 낙향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12년 겨울 - 윤선도 생부 윤유심 상 |
활동 시기/일시 | 1616년 - 윤선도 함경북도 경원으로 안치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윤선도 방면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윤선도 의금부 도사 제수,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윤선도 전라남도 해남으로 낙향 |
활동 시기/일시 | 1628년 - 윤선도 별시 초시 장원 |
활동 시기/일시 | 1628년 - 윤선도 봉림대군·인평대군 사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윤선도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38년 - 윤선도 경상북도 영덕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639년 봄 - 윤선도 전라남도 해남으로 귀향 |
활동 시기/일시 | 1660년 - 윤선도 함경남도 삼수 안치 |
활동 시기/일시 | 1665년 - 윤선도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 |
활동 시기/일시 | 1667년 - 윤선도 방면 |
몰년 시기/일시 | 1671년 6월 11일 - 윤선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72년 - 윤선도 복관 |
추모 시기/일시 | 1675년 - 윤선도 이조판서에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678년 - 윤선도 충헌(忠憲) 시호 |
추모 시기/일시 | 1680년 - 윤선도 허목이 신도비문 찬 |
출생지 | 윤선도 출생지 - 한성부 연화방 |
거주|이주지 | 고산촌(孤山村) -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
유배|이배지 | 윤선도 유배지 - 함경북도 경원군 |
유배|이배지 | 윤선도 유배지 - 경상북도 영덕군 |
유배|이배지 | 윤선도 유배지 - 함경남도 삼수군 |
유배|이배지 | 윤선도 이배지 - 전라남도 광양시 |
묘소|단소 | 고산 윤선도 묘소 -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산183-18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해남(海南) |
대표 관직 | 예조참의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별서를 두고 머물렀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이다. 할아버지는 좌참찬을 지낸 윤의중(尹毅中)이다. 아버지는 예빈시부정을 지낸 윤유심(尹惟深)이고, 어머니는 좌의정 안현(安玹)의 손녀로 승의랑(承議郞) 안계선(安繼善) 딸 순흥 안씨(順興 安氏)이다. 윤선도의 처모(妻母)는 전주 이씨 이윤영(李潤英)으로 태종(太宗) 서6남 희녕군(熙寧君)의 현손녀이다. 윤선도의 손위 동서가 동복 오씨(同福 吳氏) 오정(吳靖)인데, 오정은 인조(仁祖) 3남 인평대군의 처부 오단(吳端)의 사촌형이다. 윤선도의 부인은 판서 윤돈(尹暾)의 딸 남원 윤씨(南原 尹氏)이다. 부인 윤씨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낳았고, 측실 부인과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낳았다.
[활동 사항]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 6월 22일 한성부 연화방(蓮花坊)에서 출생하였다. 8살인 1594년(선조 27) 숙부 윤유기(尹惟幾)의 양자가 되었다. 17세가 되던 1603년(선조 36) 윤돈의 딸 남원 윤씨와 혼인했고,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생모 순흥 안씨의 상을 당하였고, 2년 뒤인 1611년(광해군 3) 10월 3년상을 마치고 선산이 있는 전라남도 해남으로 내려갔다. 이듬해인 1612년(광해군 4) 봄 진사시에 입격하였는데, 1612년 겨울에 생부 윤유심의 상을 당하였다.
1616년(광해군 8) 12월 당시 대북의 영수이었던 예조판서 이이첨(李爾瞻)을 비롯하여 외척 유희분(柳希奮), 박승종(朴承宗) 등 대북 세력의 핵심 인사들의 처벌을 청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함경북도 경원(慶源)으로 안치되었다.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방면되었고,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가 파직되자 전라남도 해남으로 돌아갔다. 1628년(인조 6) 별시 초시에 장원한 뒤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는데, 이후 약 4년간 봉림대군의 사부로 재직하였다. 1633년(인조 11) 문과에 급제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배를 타고 강화도에 갔지만 다시 전라남도 해남으로 돌아왔다. 2년 뒤 1638년(인조 16) 병자호란에 분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상북도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1639년 봄에 풀려나 전라남도 해남으로 돌아왔다.
효종이 즉위하자 대군 시절 사부였다는 인연으로 특별히 성균관사예가 되었고, 이후 동부승지 등에 제수되었다가 곧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부근인 경기도 양주의 고산촌(孤山村)으로 내려왔다.
1659년(현종 즉위년) 효종이 사망하여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계 산림으로서 허목의 삼년설을 지지하여 송시열 등 서인과 대립하였다. 1차 예송의 결과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1660년 함경남도 삼수(三水)로 안치되었으며, 이듬해인 1661년 위리(圍籬)를 더하게 되었다. 1665년(현종 6)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되었다가 2년 뒤인 1667년(현종 8) 특명으로 방면되었고, 전라남도 해남으로 내려가 보길도[현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에서 거처하였다. 4년 뒤인 1671년(현종 12) 6월 12일 향년 85세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1639년(인조 17) 경상북도 영덕 유배지에서 방면된 뒤에는 주로 보길도에서 「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고금영(古今詠)」·「증반금(贈伴琴)」 등을 지었고, 효종 연간에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 『고산유고(孤山遺稿)』와 별집(別集)에 한시와 40수의 단가 등이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
[묘소]
윤선도의 묘는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산183-18에 조성되었다.
[상훈과 추모]
윤선도는 1672년(현종 13) 복관되었고, 1675년(숙종 1)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1678년(숙종 4) 충헌(忠憲)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1680년(숙종 6) 허목이 신도비문을 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