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552
한자 崔淸
영어공식명칭 Choe Cheong
이칭/별칭 직재(直哉),송음거사(松蔭居士),관가정(觀稼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산49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44년연표보기 - 최청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60년 - 최청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61년 - 최청 복주로 공민왕 호종
활동 시기/일시 1365년 - 최청 중서시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365년 - 최청 신주감무관 좌천
활동 시기/일시 1375년 - 최청 첨의중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78년 - 최청 남로선유사 직임 수행
활동 시기/일시 1384년 - 최청 명에 사행
활동 시기/일시 1384년 - 최청 두문동 은거
활동 시기/일시 1394년 - 최청 어래산 은거 마침
활동 시기/일시 1394년 - 최청 좌찬성 임명, 거절
활동 시기/일시 1394년~1414년 - 최청 송산 은거
몰년 시기/일시 1414년연표보기 - 최청 사망
수학지 개경? - 개성특급시?
부임|활동지 개경 - 개성특급시
부임|활동지 복주 - 경상북도 안동시
부임|활동지 신주 - 황해남도 신천군
부임|활동지 두문동 - 개성특급시
부임|활동지 어래산 - 경기도 남양주시
부임|활동지 송산 - 경기도 남양주시
묘소|단소 최청 묘역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산49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남성
본관 경주(慶州)
대표 관직 보문각학사|정당문학|중서시랑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에 묘소가 있는 고려 후기·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최청(崔淸)[1344~1414]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직재(直哉), 호는 송음거사(松蔭居士)·관가정(觀稼亭)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최습(崔隰)이고, 할아버지는 도순찰사(都巡察使)를 지낸 최유경(崔有慶)이다. 아버지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지낸 최자운(崔子雲)이고, 어머니는 풍양 조씨(豐壤 趙氏)이다. 부인은 경주 이씨(慶州 李氏)이고 최연지(崔淵止)·최신지(崔信止)·최검지(崔儉止)·최한지(崔漢止) 등 4남과 함께 2녀도 두었다.

[활동 사항]

최청은 1344년(고려 충혜왕 5)에 태어났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가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공민왕이 개성을 침입한 홍건적을 피해 복주(福州)[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로 남행하였을 때 호종하였고, 그 공으로 종2품 벼슬에 해당하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1365년(공민왕 14) 중서시랑(中書侍郞)을 제수받고 직임을 수행하던 중 신돈(辛旽)과의 마찰로 지방관인 신주감무관(信州監務官)으로 좌천되었다. 신돈이 축출된 이후 1375년(우왕 1)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임명되었으며 1378년(우왕 4)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의 직임을 수행하였다. 1384년(우왕 10) 명에 사행하였는데,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帶)를 하사받았다.

이후 조정이 어지럽자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는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杜門洞)에서 은거하였다. 이후 은거지를 풍양(豊壤)[현 남양주시 진건읍, 진접읍, 오남읍 일대]으로 옮겼다. 1394년(태조 3) 조선 태조가 좌찬성(左贊成)직을 주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최청의 절개를 높이 산 태조는 최청이 은거하는 산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관가정(觀稼亭)’이라는 편액을 내렸으며, 동국청풍서산고절(東國淸風西山高節)이라 칭송하였다. 최청은 “산의 이름에 임금이 왔다고 하였으니, 내가 어찌 이곳에 거처하겠는가!”하고 은거지를 다시 풍양의 송산(松山)으로 옮겼으며, ‘송음거사(松蔭居士)’라 자호하였다. 은거 생활을 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 오다가 1414년(태종 14) 9월 28일 사망하였다.

[묘소]

최청의 묘는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산49에 있다. 자손들에게 비문에 고려의 관직을 기재하라고 하였는데, 이후 비석을 새롭게 세우면서 조선에서 내린 좌찬성(左贊成)의 직을 기입하자 천둥과 함께 벼락이 떨어져 비석이 산산조각 났다고 전해진다. 추후 묘역을 3단으로 새롭게 조성하였으며, 석물도 새로 갖추었다.

[상훈과 추모]

최청 묘역 입구에 최청의 사당인 모송재와 함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