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4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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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73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민규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870년 - 이준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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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917년 - 이준용 사망 |
이장 시기/일시 | 2005년 - 이준용 화장하여 납골묘로 이장 |
현 소재지 | 영선군 이준용 묘와 신도비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73 |
성격 | 묘|신도비 |
양식 | 원형 봉분[묘]|개석방부[신도비] |
관련 인물 | 이준용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있었던 일제 강점기 영선군 이준용의 묘와 신도비.
[개설]
영선군(永宣君) 이준용(李埈鎔)[1870~1917]은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자는 경극(景極)이며, 호는 석정(石庭)·송정(松亭)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손자이며, 고종(高宗)의 형인 이재면(李載冕)[1845~1912]의 아들이다. 이준용은 여러 차례 고종을 대신하여 옹립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유배되거나 일본에 망명하여 살았다. 1907년 망명 생활을 끝내고 부산으로 귀국하여 영선군에 봉해졌다. 이후 육군참장(參將), 상공근무사(商工勤務社)의 총고문,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 총재를 역임하였다. 1911년 은사공채를 받았고,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아버지의 공위(公位)를 계승하고 ‘이준(李埈)’으로 개명하였다.
[위치]
영선군 이준용 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73번지에 있었다.
[변천]
영선군 이준용 묘는 1917년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현 서울시 마포구]에 조성되었으며, 1948년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옮겨졌다. 흥선대원군의 묘역인 흥원(흥선대원왕) 왼쪽 100m에 있었다. 이후 2005년 화장하여 납골(納骨)되었으며, ‘이준공(李埈公)’이라는 표석이 건립되었다.
[형태]
영선군 이준용 묘의 이전 형태는 호석(護石)을 두른 원형 봉분 주위에 석양(石羊), 석호(石虎)가 있으며, 주변에 곡장(曲墻)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석인(文石人) 등이 건립되어 있었다. 신도비는 개석방부(蓋石方趺) 형식으로, 개석과 방주는 화강암을 사용하고, 비신은 오석(烏石)을 사용하였다. 개석 용마루에는 이화(梨花) 문양이 조각되어 있으며, 방부는 하엽(荷葉) 형태로 조각된 유일한 사례이다.
[금석문]
이준용 신도비는 1919년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김윤식(金允植)[1835~1922]이 짓고, 윤용구(尹用求)[1853~1939]가 썼으며, 김성근(金聲根)[1835~1919]이 전자(篆字)를 썼다.
[현황]
영선군 이준용 묘는 2005년 화장하여 납골되었으며, 신도비를 포함한 묘소 석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야외에 전시되어 있다. 이준용 납골묘에는 낙천군(洛川君), 은신군(恩信君), 흥친왕(興親王), 이문용(李汶容), 이우(李鍝) 등 선조와 형제 및 자손이 함께 납골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영선군 이준용 묘와 신도비는 20세기 초 왕실 묘역 석물의 기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