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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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峴公普同盟休學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천로 37[장현리 383]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태현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에서 있었던 장현공립보통학교의 동맹 휴학 사건.
[개설]
일제 강점기 근대 교육 제도 하의 학생들은 선구자적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 치하의 학교 당국이 자행하는 차별적 처사와 민족적 불의에 민감하게 대응하였고, 이를 통하여 일반 대중을 각성시켜 대규모 운동 단계로 확대하고자 학생 운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중 동맹 휴학은 시위와 더불어 학생 운동 중 가장 급진적인 집단 행동의 하나로, 학생 상호 간의 연대를 통한 투쟁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동맹 휴학의 역사는 조선 시대 성균관 유생의 권당(捲堂)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특히 일제 강점기에 들어오면 항일 민족 운동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동맹 휴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동맹 휴학은 학생들의 항의를 학교 차원은 물론 사회적 차원까지 확산시킬 수 있었기에 효과가 컸고, 권력의 제재 조치를 약화시킬 수 있는 상호 보장적인 안전장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역사적 배경]
1919년 3·1운동 이후 1920년대 한국 학생들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또는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다방면에 걸친 학생 운동을 전개하였다.
동맹 휴학은 학원 내의 사소한 문제로부터 발단이 되어 일제 식민지 노예 교육에 대한 규탄, 나아가 조선 총독부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발전하고 결국 민족의 독립을 부르짖는 민족 운동의 성격으로 천착되어 한 학교,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한국인의 교육 문제, 전 민족의 문제로 나타났다.
특히 일제 식민지 교육의 본질은 일제에 의한 식민 지배 구조의 공고화 및 합리화에 있었기에, 일제는 우리 민족의 인격과 고유 문화를 무시하고, 식민 노예적 교육 제도와 교육관으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일본인 교사와 학생 가운데는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과 지배욕에 사로잡혀 교실 안에서 민족 감정을 무시하고 차별적인 대우와 모욕적인 언행을 일삼은 자들이 많았다. 또한 그로 인하여 말썽이 일어났을 때, 일제 헌병·경찰·관리는 일본인을 무조건 옹호하고 조선 학생만 처벌하는 일이 예사였기에 조선 학생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경과]
1926년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에 해당하는 당시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에 있는 장현공립보통학교[현 장현초등학교]의 교사였던 우에무라 사다키치[上村定吉]는 자신이 “학생을 교수하는 시간에 자기는 1종 교사이므로 어디로 가든지 교사의 자격이 된다.”라면서 조선인은 2종이므로 교원의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평소에도 자신의 교수법이 불충분하여 학생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 조선인은 배울 수 없다는 발언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학생들이 의문을 가지면 “빠가”[바보]라고 모욕을 주었다. 우에무라의 이러한 민족 차별적 언사에 반발한 장현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6학년생에 한하여 동맹 휴학을 벌였다. 다만 후속 보도가 확인되지 않아 사태가 추후 어떻게 귀결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장현공립보통학교에서 있었던 동맹 휴학 사건에서 나타나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 및 편견,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조선인 학생들의 구도는 일제 강점기의 교육이 내포하고 있던 식민 지배 구조의 차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