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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예(禮)에 어긋나지 않게 부모를 지극한 정성으로 섬기는 아들을 일컫는 말. 효(孝)는 전통 시대에 인륜의 가장 근본이 되는 항목으로 여겼다. 『소학(小學)』에서는 효를 “부모를 지성으로 섬기는 것”과 “물 뿌리고 걸레질을 스스로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위정」편에는 효를 가리켜 “어긋남이 없게 하는 것(무위(無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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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강민첨(姜民瞻)의 23세손이다. 부인은 경주정씨(慶州鄭氏) 노송정(老松亭) 정지년(鄭知年)의 후예이다. 강주택은 뛰어난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타고난 천성이 효심이 깊어서 부모에게 항상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드리고 그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초상과 장사 및 제사에 관한 예절을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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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 신라 경순왕 때 수은공의 후손이다. 김남중은 효성이 지극하여 병든 부모를 위하여 오줌과 변을 맛보면서 구환하였다. 부모의 병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부모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상을 당하여 부모의 장사를 치를 때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낮으로 효성을 다하였으며, 이에 감동한 귀신이 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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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김해(金海). 김일손(金馹孫)의 후예로, 아버지는 김창봉(金昌鳳), 어머니는 효열부(孝烈婦)로 이름난 밀양박씨이다. 효자|김창봉|효열부|밀양박씨|효자비|밀양박씨효열비|이긍복|박병준|김한곤 일찍부터 효열부로 이름난 홀어머니를 정성을 다하여 모셨는데, 그 뜻을 한 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항상 어머니의 잠자리를 보살피고 맛있는 음식을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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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김이구는 부모를 섬김에 자식의 도리를 극진히 다하였다. 부모의 병이 위독하자 그는 부모의 변을 맛보아 그 증세를 살폈으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부모에게 드려서 며칠 동안 목숨을 연명시켰다. 그의 처 충주지씨(忠州池氏)도 시부모를 극진히 섬겨 열녀로 이름이 높았다. 김이구의 효행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동몽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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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김치도는 어릴 때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먹을 것을 주면 자신의 입에 넣지 않고 반드시 부모에게 먼저 드렸다. 부모의 병환이 위중하자 명산과 북극성(北極星)에 기도하며 치유를 갈구하였으며, 상(喪)을 당해서는 예절을 지켜 섭섭함이 없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청도에서 창의(倡義)하여 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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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효자. 본관은 밀양(密陽). 찬성(贊成) 박건(朴楗)의 아들이다. 1729년(영조 5)에 경상도 밀양부 동강방에서 출생하였으며, 뒤에 부모를 따라 남원부 보현방 벌촌마을로 이거(移居)하였다 9살 때 부친이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병석에 누워 있자 그는 밤낮으로 옆에서 간병하면서 자신을 대신 죽게 해달라고 간절히 하늘에 기도하였다. 부친의 병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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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박안선(朴安瑄)이다. 박말선은 국상(國喪)을 당하자 마을 뒷산에 초막을 지어 3년간을 그곳에서 살면서 국상을 슬퍼하여 마치 부모상을 당한 것과 같이 예절을 갖추었다. 또한 동료나 친구의 죽음에도 3일간을 소식하며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했다. 1566년(명종 21) 명나라 황제 세종(世宗)이 승하하자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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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호는 둔세옹(遯世翁). 아버지는 방덕준(房德峻)이다. 방대순의 아버지는 수족이 저리는 병에 걸려 거의 치료 불가능의 상태에 이르렀다. 효자인 그는 수소문 끝에 명의(名醫)를 찾아가 그 증세를 다스릴 수 있는 기술을 배워 마침내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였다. 그 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한결같이 옛 예절을 준수하면서 상을 치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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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시 출신의 효자. 아버지는 전적(典籍) 방원정(房元井)이다. 방명흡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형제간에도 우애가 깊었다. 그는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여 기(氣)가 막히게 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에게 드려 목숨을 소생케 했다. 뒤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죽만 먹었고 잠자는 것조차 괴로워하면서 온 정성을 다하여 상례(喪禮)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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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이천(利川). 호는 강석(江石). 서택인(徐擇仁)의 아들이다. 서택인부터 그의 손자 서봉주(徐鳳周)에 이르기까지 3세(三世) 5효열(五孝烈)을 배출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서영측은 형 서영팔(徐永八)과 함께 효성이 지극하여 홀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뒤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두 형제가 함께 시묘살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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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구계공(龜溪公) 서침(徐沉)의 18세손으로, 아버지는 서한보(徐漢輔)이다. 서유경은 어버이를 섬길 때 정성을 다하여 봉양을 하였다. 그의 아들 서한보(徐漢輔) 역시 부모에 대한 효행이 극진하여 어머니 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들 부자의 효행은 흔히 왕상이 겨울철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얻어 부모를 봉양한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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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호는 낙재(樂齋). 아버지는 소규영(蘇奎永)이다. 출생한 지 8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었으나, 어려서부터 홀어미에게 지극 정성으로 효도를 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잃은 것을 항상 슬퍼하였으나 노모를 편히 봉양하는 일을 잠시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품행이 단정하고 학문에 힘써 식견이 고매하여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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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소병표는 어려서부터 조숙하여 부모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또한 효심이 지극하여 항상 맛있는 음식을 부모에게 대접하였으며, 철마다 서늘한 옷과 따뜻한 옷으로 항상 갈아 입혀드리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늘 자리를 지키면서 밤낮으로 구환하였으며, 대소변을 맛보면서 간병하였다. 그리고 뒷간의 수발이며 옷 빨래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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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광주(廣州). 아호(雅號)는 국포(菊圃). 청백리 사간공(思簡公) 안성(安省)의 8세손이다. 안우는 효자 집안의 후손으로 그 또한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다. 19살 때 부친이 돌아가자 상례(喪禮)에 따라 정성을 다해 장사를 치렀다. 그 뒤 모친이 병환으로 누워 있으면서 별미(別味)를 원하자 지성으로 이를 구해다 주었다.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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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양계상은 일찍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8살 때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의 피를 내어 아버지에게 주었고, 이어 허벅지의 살도 베어 주었다고 한다. 뒤에 어머니가 중병을 앓았을 때 어머니의 소원인 잉어를 구하기 위해 엄동설한에 냇가에 나가자, 때 아닌 잉어 한 마리가 얼음 위에 나와 있어 이를 구하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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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조선 초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충신이자 효자.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있으면서 대방군(帶方君)에 봉(封)해졌다.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 이성계가 세 번이나 불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평소 효행이 지극하였던 양천룡은 부친이 세상을 하직하자 묘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애통해하며 지극한 효심으로 시묘(侍墓)하였다. 연이어 모친의 상을 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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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양치민은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용성지(龍城誌)』권6 효자편에 기록되어 있음은 그의 효행이 탁월했음을 보여준다. 『용성지(龍城誌)』에 의하면, 그는 평소 온 정성을 다하여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였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드시게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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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남원. 초명은 양정(梁涏), 자(字)는 여관(汝寬). 부인은 전주최씨이다. 형제로 양집(梁濈)이 있다. 양필은 양집과 함께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한 형제였다. 두 사람은 아침에는 부모께 문안을 드리고 밤이면 편히 주무시도록 자리를 보아드렸다. 중병(重病)으로 어머니가 위태롭게 되자 대소변의 맛을 보아 병의 차도를 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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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서산(瑞山).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9권 전라도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 조의 기록에 보면, “어머니 현씨(玄氏)가 병에 걸리자 유익경은 어머니의 똥을 맛보고 사생(死生) 여부를 가늠했다. 이 일을 왕에게 보고하니 동부녹사(東部錄事)에 제수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가 주천면 용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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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문화(文化). 사육신의 한 사람인 충경공 유성원(柳誠源)의 5세손인 석헌 유옥(柳沃)의 13세손으로, 아버지는 유봉기이다. 효자로 이름이 높아 죽은 뒤에 정려비가 세워졌다. 정려비는 남원시 이백면 내동리 외동마을로 들어가는 도로 우측에 있다. 비에 ‘효자문화유형현지비(孝子文化柳亨鉉之碑)’라고 되어 있으며, “신미(辛未, 1931) 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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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영천(永川). 효자로 이름났던 이중엽(李重曄)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이익번이다. 이부춘은 천성이 착하고 가문의 전통으로 효심이 뛰어났다. 13세에 전주이씨와 혼인하였는데, 결혼한 지 3일 만에 이씨 부인이 물을 길어 밥을 짓자 태연하게 아침밥을 먹고 나서 아내를 데리고 처가로 갔다. 장인과 장모가 반갑게 사위를 맞이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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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영천(永川). 효자 이부춘(李富春)의 자손이다. 이상규는 8세 때 이웃에 사는 당숙 댁에 갔는데 당숙모가 참외를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고 한다. 당숙모가 이상히 여겨 물어보니, “아버지 어머니께서 아직 금년에 참외를 잡수시지 않았는데 어찌 제가 먼저 먹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자랄수록 효심이 더욱 지극해졌는데, 서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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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영천(永川). 고려 때 효행이 깊고 정치가로도 이름이 높았던 영천부원군 이능간(李凌幹)의 후손이며, 이승언의 맏아들이다. 이중엽은 용모가 단정하고 효심이 극진하여 학문을 즐겼는데, 이는 엄격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남원양씨에게서 받은 교육 때문이었다. 부모가 먹고자 하는 음식이나 일용품이 있으면 무엇이거나 좋은 것으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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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 할아버지는 존양당(存養堂) 이유시(李惟時)이며 이가철[1757~1815]은 이유시(李惟時)의 차남이다. 동생은 이시권(李時權)이다. 효행이 탁이(卓異)하여 이행권은 이가철·이시권과 함께 ‘삼효(三孝)’로 불리며 일문삼려(一門三閭)의 정려(旌閭)를 받았다. 양현재(養賢齋)는 전주이씨 영해군파(寧海君派) 종중(宗中) 재실(齋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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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이능간(李凌幹)을 시조로 하는 영천이씨는 전라북도 영천(寧川)에서 대대로 살았으며, 집성촌으로는 전라북도 남원군 이백면 초촌리, 전라북도 남원군 주천면 용담리,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등이 있다. 『용성지(龍城誌)』에는 이형길(李亨吉)이 고려 시중 송헌(松軒) 이능간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형길은 『용성지(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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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이흥표(李興標)는 『용성지(龍城誌)』 6권 효자조에 나오는 인물로, 군수(郡守) 이성임(李聖任)의 손자이다. 이흥표는 효도와 우애에 마음을 쏟으며 그 밖의 일에는 문 밖 출입을 잘 하지 않았다. 그의 형이 어머니를 봉양하며 5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는데, 이흥표는 신혼정성(晨昏定省)을 다하여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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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효자. 본관은 나주(羅州). 승지(承旨) 귀래정(歸來亭) 임붕(林鵬)의 후손이며, 형은 임동진이다. 임도진(林道鎭)은 부모를 섬기는 데 효성이 지극하고 일가친척 사이에 화목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자 전후(前後) 6년 동안 여막(廬幕)하니 그 효행이 널리 알려졌다. 임도진의 효행을 가상히 여겨 1893년(고종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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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조양(兆陽). 자는 인보(仁甫), 호는 국헌(菊軒). 아버지는 곡성훈도 임사강(林士綱)이며, 어머니는 개성고씨(開城高氏)로 이조참판을 지낸 고순(高淳)의 딸이다. 임옥산(林玉山)은 1451년(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5년 후 무과에 급제했다. 군기감직장에 재임 중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하여 사직한 뒤에는 어머니의 분뇨를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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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시 출신의 효자. 본관은 흥성(興城). 자는 사중(思中), 호는 율계(栗渓). 아버지는 경력(経歴) 장응규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이다. 장급(張伋)[1522~1589]은 품성이 뛰어나고 대의(大義)를 중시해 불의(不義)를 보면 그 자리에서 문책하였다고 한다. 1558년(명종 13) 아버지가 죽자 서울에서 남원까지 운구하고 여묘(廬墓) 3년 동안 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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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서산(瑞山). 시조는 송나라에서 원외랑(員外郎)을 지낸 정신보(鄭臣保)로, 송나라가 망하자 바다를 건너 고려로 망명하여 충청남도 서산시에 정착했으며, 현재 서산시 송곡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운성지(雲城志)』 「인물지(人物志)」 효자(孝子) 편에 ‘정규룡(鄭圭竜)은 효성이 지극하여 할아버지 할머니의 초상을 당했을 때 슬픈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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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광여(匡汝), 호는 송계(松溪). 안숙공 정종보(鄭宗輔)의 14세손이며, 정일화(鄭一華)의 아들이다. 정원세는 1732년(영조 7)에 전라북도 남원군 대강면 평촌리에서 태어났으며, 지기가 굳고 효와 충을 지극히 하였다. 일찍이 모친의 상을 당하여 애통해하는 모습이 도에 지나칠 정도였다. 나라에서 첨의벼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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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조한은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몸소 토석을 운반하여 묘를 이루고, 3년 동안 육식을 끊고 마을 밖에 나가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정려(旌閭)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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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주(晉洲). 하인채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여 나이가 차도록 결혼을 하지 않고, 혼정신성(昏定晨省)하여 좌우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봉양할 것이 없으면 품팔이도 하고 혹은 나가서 밥을 빌어다 먹이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위독함에 이르렀을 때 앵두를 먹기를 원하였으나, 구하지 못하여 애를 태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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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양(晋陽), 형억동(邢億東)의 아들이다. 형국윤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다르고 학문에 뛰어나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8세에 이르러 청주한씨(淸州韓氏) 청원군(淸原君)의 후손인 지평(持平) 한상기(韓尙箕)의 증손녀를 아내로 맞았다. 부부가 함께 지성으로 부모를 봉양했는데, 아버지가 40세에 이르러 눈이 멀어 출입조차 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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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서 남편을 위하여 지극한 정성을 다하며 절개를 지킨 아내를 일컫는 말. 유교에서 중요시하는 덕목 가운데에는 효(孝)와 열(烈)이 있는데, 효는 자식이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며 열은 아내가 남편을 잘 섬기는 것이다. 열녀는 어느 시대나 다 존재하였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열녀로는 삼국시대의 도미의 아내, 박제상의 아내, 평강공주 등이 있다. 고려 후기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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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남도 남원 출신의 열녀. 본관은 순흥(順興).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후손이다. 사인(士人) 김세기(金世基)의 아내이다. 가문이 뜻하지 않은 화를 입어 남편이 갑자기 죽자 일가에서는 모두 급히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안씨는 홀로 노비들과 함께 예를 다하여 남편의 시신에 염을 하였다. 입관을 하는 날 안씨는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로 맹서의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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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녀. 김오(金墺)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정숙하고 효행이 뛰어났다. 출가 전에 부모의 상을 한꺼번에 당한 김씨는 이를 애통해 했다. 그녀는 장례를 치르기 전에는 죽만 먹었으며, 엄동의 추위에도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빈소를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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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시 출신의 효녀. 양씨는 무인(武人) 박승선(朴承善)의 아내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지병인 풍병(風病)을 앓고 있었는데,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출가한 그녀에게 와서 의지하였다. 양씨는 손과 발이 불편한 어머니를 항상 보살폈으며, 추운 계절이건 더운 계절이건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였다. 또한 자신은 거친 무명으로 만든 짧은 옷을 입으면서도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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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열녀. 본관은 반남(潘南). 사인(士人) 방세정(房世挺)의 아내이자, 참판(參判) 박동망(朴東望)의 손녀이다. 방세정의 처 박씨는 혼인한 뒤 몇 개월 되지 않아 남편이 요절(夭折)하였다. 그녀는 손을 가슴에 모은 채 피눈물 속에 하루 밤을 시체를 끌어안고, 음식 한 점을 입에 넣지 않고 죽기로 맹세하였다. 그러다가 목을 매어 죽고자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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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열녀. 17세에 오익한의 첩이 되었는데, 결혼 후 남편이 병을 얻게 되자 그녀는 지성을 다하여 병을 구완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남편이 죽자 시체를 끌어안고 3일 밤낮을 지냈으며, 복상 3년을 하는 동안 내내 울부짖었다. 남편의 적자(嫡子)를 사랑으로 길렀으며 남편이 살아있을 때처럼 항상 자신의 주인으로 대하였다. 주위에서는 나이가 어려서 혼자 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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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시의 열녀. 수지방(水旨坊) 서득수(徐得水)의 아내이다. 남편이 큰 풍창을 얻어 사람들에 의해 마을에서 쫓겨나 산골짜기에서 여러 해 동안 막(幕) 가운데서 살았다. 그러는 동안 한번도 남편의 곁을 떠나본 적이 없었고, 지성으로 남편의 병을 구완하였다. 남편이 병으로 죽게 되자 그녀는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입에 넣어주었으나 끝내는 구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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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열녀. 본관은 경주(慶州)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신익룡의 처 이씨는 시집 온 지 몇 달이 채 안 되었을 때 남편과 함께 멀리 떨어진 마을의 친족 모임에 나갔다가 날이 어두워 귀가하던 중 갑자기 반노(叛奴)와 맞닥뜨렸다. 이들은 남편을 죽이려고 하였고 술에 취한 남편은 말에서 떨어져 인사 불성이었다. 이때 이씨는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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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열녀. 본관은 언양(彦陽). 아버지는 부사(府使) 김건(金健)이다. 김씨는 좌랑(佐郞) 안극충(安克忠)의 아내이다. 어느 날 화적(火賊)들이 느닷없이 집안으로 들이닥쳐 남편에게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때 김씨는 두 팔로 남편을 가로막고 그 대신 칼에 찔려 죽었다. 덕분에 남편은 간신히 화를 면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을 희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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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열녀. 고조부는 홍문관교리 이적(李迪)이며 아버지는 이영진(李榮震),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남편은 순흥안씨 안국로의 아들인 안희도(安希道)이다. 이씨 부인은 규방의 규수로서 예의범절과 몸가짐이 정숙하였으며 19세에 결혼하여 부모 섬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남편에게는 공경으로서 아내의 도리를 다하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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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열녀. 아버지는 고려시대 문과급제자 이이시(李以時)이고, 남편은 직제학 양수생(楊首生)이다. 이씨가 임신한 뒤에 곧바로 남편이 죽자 친정 부모는 개가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씨는 “나라의 풍속이 모두 그러한데 어찌 저 혼자만 어길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양씨(楊氏)의 핏덩이가 배 속에 있으니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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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효녀. 아버지는 첨지(僉知) 진재창(陳再昌)이다. 양여형(楊汝亨)의 아내 진씨(陳氏)는 경사(經史)에 능통하였으며, 효성 또한 지극하여 부모를 봉양할 때에는 한번도 그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결혼해서는 시댁에 의지하지 않았다. 본가에서 살면서 부모의 상을 당했던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죽만 먹는 등, 그의 오빠 진극서(陳克緖)와 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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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열녀. 남편은 생원 양중수(梁仲粹)이다. 이씨 부인은 왜적의 침입을 당하자 몸이 더럽혀질까 염려하여 끝까지 반항하다가 죽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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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열녀. 양진원의 아내 윤씨는 남편의 상을 당하자 3개월 동안 그 시신을 부둥켜안고 지냈다. 또한 삼년상을 치르면서 날마다 통곡하는 그녀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감동하여 함께 울었다고 한다. 윤씨의 열행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의 특전이 내려졌다. 그러나 정확한 명정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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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열녀. 남편 오여격(吳汝格)이 죽자 시체를 끌어안고 3일 동안 피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같은 날 자결하기로 한 것은 나의 본마음이지만 나에게 자녀가 없는데 누가 시체를 염(殮)할 것이며 장례를 치루겠습니까?”하였다. 그녀는 죽만 3년 동안 먹고 겨우 연명(延命)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제(祭)를 정성으로 예를 갖추어 극진히 하였다. 복제(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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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열녀. 남편은 사인(士人) 오윤제(吳允濟)이다. 고씨는 시어머니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고 남편을 섬김에 공경을 다하였다. 일에 처해서는 유순(柔順)으로 정대(正大)하게 하였다. 남편이 죽었을 때에는 불을 때지 않았으며 뼈를 세워 아침저녁으로 제(祭)를 예를 갖추어 정성으로 하였다. 그녀는 항상 남편과 함께 죽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죽을 때까지 흰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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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열녀. 군자감정(軍資監正) 이부성(李傅聖)의 아내로, 남편이 도적의 칼을 만나자 자신의 몸으로 그 칼을 막아 남편을 살리고 혼자서 죽음을 당하였다. 이러한 일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기록되어 있는데, 부(傅)자가 득(得)자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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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열녀. 사인(士人) 정세창(鄭世昌)의 아내이며, 의병이자 효자였던 노사예(盧士豫)의 손녀이다. 정세창의 처는 노씨(盧氏) 가문의 예절을 모두 익혀 정씨가(鄭氏家)로 시집간 뒤에는 더욱 부도(婦道)에 힘썼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고, 남편을 섬기는 데 예(禮)를 다하였다. 남편이 3년 동안 고질병(痼疾病)을 앓자 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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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의 열녀. 효자 정개(丁塏)의 작은 아들 정탁(丁鐸)의 아내이다. 최씨 부인은 시부모님을 섬김에 정성으로 효도를 다하였으며 남편에 대해서도 양순하고 극진히 섬겨, 마을에서 그녀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남편이 일찍 죽자, 하루 밤 가슴을 치며 남편과 함께 죽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먹지도 않고 방에 불을 때지도 않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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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의 열녀. 사재정(司宰正) 조석기(趙碩基)의 아내이다. 허씨는 부모와 시부모를 함께 모셨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효도를 하였다. 남편이 두질(痘疾)로 죽자 피눈물을 흘리면서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자녀가 어리고 제사를 지낼 사람이 없어 죽지 못하였다. 그녀는 오직 제사 때에만 차와 반찬 한 숟가락만 먹을 뿐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그리하여 육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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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의 열녀이자 효부. 적과방(迪果坊) 사노(私奴) 최억춘(崔億春)의 아내이다. 그녀는 나이 30세가 되어 남편이 죽었다. 그녀의 시부모는 모두가 맹인이어서 의지할 바가 없었다. 그녀의 부모는 사위가 죽자 그녀를 친정으로 데려갔지만, 번번이 시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품팔이를 하여 시부모님을 봉양함으로써 효를 다하였다. 이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사유(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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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북도 남원의 효부. 유학(幼學) 태천우(太天祐)의 아내이다. 그녀는 천성이 착하고 정성이 한결같았으며 부도(婦道)를 닦아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남편을 섬기는 데 효도와 공경을 함께 하였다. 시어머니가 질병에 걸리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의 질병이 더욱 깊어지자 그녀는 똥을 맛보아 질병의 원인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