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25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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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興夫傳-母胎-興夫- |
영어음역 | Heungbujeongwa Heungbu Maeul |
영어의미역 | Story of Heungbu and Heungbu Village |
이칭/별칭 | 홍보가,박타령,흥보마을,춘보마을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승종 |
[개설]
『흥부전』은 판소리 「박타령」(「흥보가」)의 사설이 정착되어 이루어진 판소리계 소설이며, 흥부마을은 남원군 아영면 성리와 인월면 성산리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지역에는 지금도 『흥부전』에 나오는 지명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조선 후기 사회 변동이 반영되다]
작가와 연대 미상의 고소설이며 고대로부터 전승되던 설화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판소리의 사설로 창화(唱化)되다가 대본의 정착 단계에서 소설로 기록된 판소리계 소설이다. 작품의 명칭은 「박타령」·「박흥보가」·「흥보가」 등의 판소리계와 『흥부전』·『연의 각』·『장흥보전』 등의 소설계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현재 조사된 이본의 수는 37종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접경에 살던 연생원은 놀부와 흥부 두 형제를 두고 죽었는데, 형인 놀부는 부모의 유산을 독차지하고 동생인 흥부를 내쫓는다. 흥부는 아내와 여러 자식을 거느리고 움집에서 헐벗고 굶주린 채 갖은 고생을 하면서 묵묵히 살아간다.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여도 흥부의 살림은 여전히 가난하기만 하였다. 그런 어느 날 흥부는 땅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새끼 제비를 주워 정성껏 돌본 끝에 날려 보낸다. 이듬해에 그 제비는 흥부에게 보은(報恩)하고자 박씨 한 개를 물어다가 주었는데, 가을이 되자 잘 여문 박을 거두어 켜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박 속에서는 온갖 눈부신 보물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와 흥부는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것을 안 놀부가 흥부에게 달려와 벼락부자가 된 자초지종을 듣고는 자기도 새끼 제비 한 마리를 잡아다가 다리를 부러뜨린 뒤 실로 동여매어 날려 보낸다.
그 제비 또한 이듬해 봄에 박씨를 물어다 주었다. 그러나 놀부가 심어서 거둔 박 속에서는 온갖 괴물이 나타나 그의 재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없어지고 그의 집은 수라장이 되었다. 마음씨 고운 흥부는 그래도 놀부를 지성으로 섬겨서 함께 행복을 누린다.
이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설화는 「방이 설화」와 「박타는 처녀」 설화이다. 따라서 모방담의 전형적 구성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모방담의 구조는 크게 창조적 행위와 모방적 행위로 나뉘며, 전자는 긍정적으로 후자는 부정적으로 처리되어 권선징악의 주제 의식을 구현한다.
이 작품의 표면적 주제는 봉건적 질서를 확인하는 유교적 윤리 의식을 표방한다. 이에 따라 인물의 설정이나 사건의 서술에 있어서도 유형적이고 공식적인 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양반인 흥부와 놀부가 모두 시정인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으며, 서민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점에서 서민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울러 중국 고사나 대구의 나열이 그렇게 심하지 않아서 어느 정도 향토적인 정서도 느낄 수 있다.
『흥부전』은 또한 당시 서민 생활을 여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흥부전』은 돈을 중심으로 한, 살아가는 문제를 다루되 그것을 희극미로 표출하고 있다. 흥부와 놀부의 행위나 인물 묘사에 있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 희극미(골계미)는 평민 문학의 중요한 미의식의 하나이다.
이 작품은 보은 설화가 바탕이 된 「흥보가」의 정착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내세우면서도 이면적으로는 부농과 빈농 사이에 벌어지는 경제적인 갈등을 제시하고 있다. 유교적 윤리 의식을 강조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조선 후기 신분 변동에 따라 나타난 유랑 농민과 신흥 부농과의 갈등이 반영된 작품으로 당대의 퇴락하는 양반과 서민의 생활상에 대한 풍속사적인 보고라 할 수 있다.
『흥부전』의 전반부에서는 착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무기력하고 무능한 흥부와 돈에 눈이 어두워 형제간의 우의조차 저버리는 포악한 지주로서의 놀부를 대립시켜 무기력한 흥부의 고난상과 몰인정한 놀부가 부를 누리는 현실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보은과 보수의 박을 통해 흥부의 부와 놀부의 몰락을 보임으로써 권선징악적 교훈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때 박을 통한 흥부의 행운은 어려운 살림살이에 대한 서민들의 보상에 대한 꿈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방담 설화의 구조를 계승하다]
『흥부전』의 설화적 구조를 분석하면 ‘선악형제담(善惡兄弟譚)’, ‘동물보은담(動物報恩譚)’, ‘무한재보담(無限財寶譚)’ 등 세 가지 유형을 찾아낼 수 있다. 선악형제담은 착하고 악한 형제가 등장하여 착한 쪽이 먼저 잘 되면 악한 쪽이 이를 흉내내다가 실패하는 모방담(模倣譚)으로 「단 방귀 장수」, 「말하는 염소」 등 많은 설화가 전하고 있다.
동물보은담은 금수(禽獸)도 사람에게서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한다는 이야기로 「새 보은 설화」, 「사슴 보은 설화」 등이 있다. 또 무한재보담은 어떤 물체에서 인간이 원하는 물건이 한없이 나온다는 이야기로 「이상한 남비」, 「금방망이 이야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결국 『흥부전』의 흥부 놀부의 형제 이야기는 선악형제담에서, 제비가 다리를 고쳐 준 흥부에게 은혜를 갚는 것은 동물보은담에서, 그리고 박 속에서 많은 재물이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는 무한재보담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흥부전』은 이들 세 가지 유형의 설화가 일체화되어 이루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불경 『현우경(賢愚經)』의 선구악구(善求惡求) 설화, 『잡비유경(雜譬喩經)』의 파각도인(跛脚道人) 설화도 『흥부전』의 내용과 유사성이 많아 그 영향 관계가 있을 것으로 믿어지는데, 이는 『흥부전』이 지니고 있는 불교적 성격과도 관련된다고 하겠다. 이처럼 많은 배경 설화 중에서 『흥부전』과 내용 및 구조적인 측면에서 가장 유사한 것으로 인정되는 설화는 「박타는 처녀」와 「방이 설화」이다.
손진태는 「박타는 처녀」설화는 몽고에 많이 귀화한 고려인들을 통해 몽고에 전파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박타는 처녀」는 본래 우리 민담으로서 『흥부전』의 근원 설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방이 설화」는 신라의 설화로 알려져 있다. 『흥부전』과 어진 형, 악한 동생이란 차이는 있으나 형제간의 우애를 중심으로 구성된 설화라는 점에서 유력한 근원 설화의 하나이다.
「박타는 처녀」와 「방이 설화」는 모두 모방담으로서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박타는 처녀」에서 착한 처녀의 행위를 나쁘게 본받은 이웃집 심술궂은 처녀가 재앙을 받는 것처럼, 「방이 설화」에서도 착한 형의 행동을 본받은 악한 동생이 재앙을 당한다.
이 점에서 보면 흥부가 제비를 구해 주어 보은의 박을 얻게 되고 이것을 본받은 놀부가 제비 다리를 강제로 부러뜨려 결국 원수를 갚는 박을 얻게 되어 패가망신한다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 골격은 위의 두 설화와 같은 모방담인 것이다. 따라서 『흥부전』은 혹 떼러 갔다가 오히려 혹 붙이고 오는 이야기 등에서와 같이 우리나라에 광범위하게 유포된 모방담 설화의 기본 구조를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민층의 현실주의적 세계관이 반영되다]
『흥부전』의 중심 인물은 놀부와 흥부 형제이다. 대체로 이 작품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한 유교적 윤리에 바탕을 둔 도덕 소설로 파악되어 왔다. 그리고 인과응보적 권선징악을 주제로 보는 것이 종래의 일반적 견해였다. 그러나 『흥부전』은 조선 후기 서민 예능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작품이므로 당시 사회 현실이 반영되어 있고, 작중의 인물도 당시의 현실적 인간형이 투영되어 있다.
따라서 『흥부전』의 작가 의식과 주제는 유교적 윤리 의식이나 권선징악 외에 중세의 관념적 도덕관이나 현실적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서민들의 비판 의식이 공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흥부전』은 당시의 농촌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두 주인공은 당시 농민의 양면성, 즉 놀부는 축재에 밝은 이기주의적 부농을, 흥부는 농토를 상실하고 생활 수단을 갖지 못한 채 품팔이꾼으로 전락한 빈농의 전형을 대변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놀부는 원래 평민 이하의 신분이었는데 도망을 하여 자신의 신분이 천민임을 모르는 곳에서 자수성가하고, 반면에 흥부는 몰락한 양반으로 묘사되기도 하여 이 작품은 조선 후기의 신분 변동 현상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다.
『흥부전』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흥부전』의 표면적 주제는 선량한 자는 복을 받고 부도덕한 자는 벌을 받으니 사람은 선향하고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면적 주제는 천부(賤富)의 대두로 인해 가난해진 양반과 모든 기존 관념이 얼마나 심각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는 견해이다.
둘째는 흥부라는 인물이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굶주리는 반면 놀부라는 인물이 악질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부자로 살고 있는 현실이 모순이라 하여 현실적인 역리 현상에서 그 주제를 찾는 견해이다.
조동일은 『흥부전』이 사회 현실의 변화로 인한 기존 관념의 동요와 갈등, 이에 따른 서민적 사회관의 대두를 드러낸 작품으로 보고 있고, 임형택은 조선 후기 신분 변동의 현상을 보여주면서 악질적 인물은 잘 살고 성실한 인물은 아무리 노력해도 못 산다는 사회 현실의 모순을 나타낸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흥부전』은 당시의 급변하는 현실 사회에서 몰락한 양반과 아직도 위세를 부리려는 기존 관념이 허망한 것이라는 서민층의 현실주의적 세계관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영면 성리를 흥부마을로 고증하다]
1992년 경희대 민속학연구소는 남원시 아영면 성리를 『흥부전』의 배경지로 고증하였다. 이 조사에 의하면 『흥부전』은 조선 후기에 전라북도 운봉(지금의 남원) 쪽에서 일어났던 설화를 모델로 하여 만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아영면 성리에 살았던 춘보(흥보의 모델로 추정)는 원래 지금의 인월면 성산리에서 형 박첨지(놀부의 모델)와 같이 살다가 형에게 쫓겨나서 유랑 끝에 복덕촌(장수군 복성리)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다시 성리의 고둔터로 이사하여 머지않아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죽고 그의 가족들이 서울로 떠난 뒤에도 성리 사람들은 그 은혜를 잊지 못해 ‘춘보(망)’제를 지내고 있다.
아영면은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국경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신라의 영토로 아막성(阿莫城) 및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아막성을 일명 합미성(合米城) 또는 성리산성(城里山城)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신라 시대에도 성리라는 마을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성리마을은 1570년경에 곽씨가 처음 정착하였고, 그 후 나주오씨·광산김씨 등이 이주하여 차츰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지역은 신라·백제 국경 아막성 밑의 마을이므로 이름을 성리라 하였으며. 약 100m의 거리를 두고 2개의 자연 부락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위쪽에 있는 마을을 상성(上城), 아래쪽 마을을 하성(下城)이라 불렀다.
[곳곳에 흥부전의 사연이 배여 있다]
아영면은 남원시 최동북단에 위치한 면으로서 호남과 영남의 관문이다. 1984년 광주 대구 고속 도로가 면의 중앙을 가로 질러 개통되면서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가 되었다. 『흥부전』의 배경지인 성리 흥부마을은 지리산 IC에서 6.5㎞ 떨어져 있어 접근이 매우 용이하고, 봉화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봄이면 철쭉이 산을 붉게 물들여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성리에는 흥보가 허기져 쓰러진 고개로 알려진 ‘허기재’, 옛날 시장거리, 구름다리, 쓰러진 흥보를 구완한 자에게 보은한 논인 ‘한북 배미’, 사금 채취장인 ‘새금모퉁이’, 화초장을 지고 놀부가 건넜다는 개울인 ‘노디막 거리’, ‘화초장 바위’, 흥보 생가터인 ‘발복터’, 흥보의 묘에 해당되는 ‘박춘보 묘’, ‘망제단, 흥보가 부자가 되어 선덕을 베푼 진천인 ‘흥부 참샘’ 등이 아직도 남아 있다.
또한 인월면 성산리에는 ‘신털바위’, ‘주막거리’, 흥보가 큰 부자가 되어 제비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만든 다리라는 ‘연상교’, 놀부의 묘에 해당하는 ‘박첨지 묘’, 흥보가 볏단을 쌓아놓고 타작한 마당인 ‘박첨지 텃밭’, ‘서당터’, 홍보가 눈·비가 많이 와서 산제바우까지 못 갈 때에는 이곳에서 산에 절을 하였다는 ‘독배기’, 산제를 지냈던 제비봉 아래 골짜기인 ‘살제바우골’ 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