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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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門壽 |
영어음역 | Park Munsu |
이칭/별칭 | 송암,충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강정만 |
[정의]
고려 후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죽산(竹山). 호는 송암, 시호는 충현. 남원에서 세거한 죽산박씨의 조상이다.
[활동사항]
박문수는 고려 말에 우정승을 지냈으나, 조선 개국 후 두문동에 들어가 고려왕조의 신하로서 절개를 지켰다. 조선 개국 후 아들 박포가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대항하다가 참수당했다.
당시 박문수의 손자인 박자량이 전라관찰사였는데, 숙부 박포의 사건에 연루되자 벼슬을 떠나 처가가 있던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초리에 서당을 세우고 은거했다.
일찍이 박문수는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우정을 쌓았다. 이들은 조정에 나가면 충성을 다하고 나오면 서로 모여 시문을 즐겼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삼노’라고 칭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건국될 무렵 박문수는 동료에게 “임금이 충신의 간함을 듣지 않고, 신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우리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말하며 탄식했다.
마침내 이성계가 등극하자 박문수는 고려의 충신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이른바 두문동 72현이라는 말이 이 때 나왔다.
박문수는 입산하기 앞서 김씨 부인에게 “나는 고려에 누대를 끼쳐온 중신 가문의 자손이라 절의에 죽음은 당연하거니와, 그대는 고향으로 내려가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자손들이 끊이지 않도록 하오.”라고 당부했다.
박문수는 오로지 고려 유신의 절개를 변치 않는다는 일념 아래 부모가 점지하신 이름까지 고쳤다. 원래는 처음의 이름이 박문주였으나, 만수산 두문동에 들어가 순절할 뜻을 정하고 두문에서 ‘문’자를, 만수에서 ‘수’자를 따서 ‘문수’라고 개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