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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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恩基 |
영어음역 | Kang Eung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쌍교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병옥 |
성격 | 사회운동가|민주화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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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남원시 쌍교동 |
성별 | 남 |
생년 | 1942년 2월 16일 |
몰년 | 2002년 11월 9일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출신의 민주화 운동가.
[활동사항]
민주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민주 인사 강은기는 1942년 2월 16일 남원시 쌍교동에서 아버지 강용갑과 어머니 진차정 슬하에서 태어났다. 남원초등학교를 거쳐 남원중학교에 진학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3학년 때 중퇴하고 인쇄소에 취직했다. 이것이 출판물을 통해 민주화 운동에 나선 계기가 되었다.
요천변의 노천에서 옹기 장사를 했던 부모님 중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 주변 인물들의 증언이다. 약 2년 동안 인쇄소에서 일하던 강은기는 1960년 3월 말에 서울로 올라간다. 4·19혁명을 앞두고 3·15부정선거로 온 나라가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한 시기였다.
4·19혁명이 일어나자 시위 행렬을 쫓았던 강은기는 5·16쿠데타로 4·19혁명이 좌절되자 절망하여 머리를 깎고 법주사로 들어간다. 2년 가까이 사찰 생활을 하던 그는 이해학 목사를 만나 다시 속세로 돌아와 먹고 살기 위해 다시 출판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민주화 운동의 지하 유인물을 제작하고, 공급하였다.
1974년 11월 11일 박형규 목사의 저서 『해방의 길목에서』 제작으로 경찰서를 드나들게 된 그는 11차례에 걸쳐 경찰서, 중앙정보부에 끌려 다녔고 5차례에 걸쳐 구금되거나 옥살이를 했다. 1970~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강은기가 없었다면 그 많은 유인물 제작은 불가능했다는 것이 당시 운동권 사람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췌장암으로 60살을 일기로 생애를 마쳤을 때 장례위원회의 고문은 고은, 박형규, 한승헌을 비롯한 10명의 민주 인사였고, 공동장례위원장은 김근태, 이부영, 이창복, 이해학, 지선, 함세웅이었다. 집행위원장은 권형택이었고, 장례위원으로는 유인태, 정동영, 정대철 등 184명이 참여하였으며, 호상은 정동일, 장영달이 맡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양희선과 아버지의 세진출판사를 이어받은 딸 강신영과 아들 강동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