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12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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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无忽齋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양명길 250-62[귀명리 358]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강진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에 있는 광주김씨 재실.
[개설]
무홀재(无忽齋)는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에 있는 광주김씨(廣州金氏) 가문의 재실이다. 광주김씨 밀양 입향조는 조선 성종 때 판결사를 지낸 김려(金礪)이다. 시조 김석(金錫)의 14세손이자 전사포와 예림 사이에 병구(兵區)를 설치하여 밀양 삼별초의 대몽 항쟁을 진압한 김훤(金晅)의 5세손이다. 김려가 전거한 곳은 귀명리인데 인근 대사리와 함께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김려의 손자 김태허[1555~1620]는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워 일등공신에 녹훈되었고, 1825년 ‘양무(襄武)’ 시호를 받아 양무공파 파조가 되었다. 남명 조식의 문인 구옹(矩翁) 김태을(金太乙)[1530~1571]과 구봉(九峯) 김수인(金守訒)[1563~1626] 부자는 학문과 덕망으로 크게 이름이 났다. 특히 김수인은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성균관에서 독서하던 중 영창대군이 1613년 강화도에 위리안치되는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광해군이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의론을 홀로 선창하였다. 하지만 유생들이 기회만 엿볼 뿐 호응하지 않자 홀로 전은소(全恩疏)를 올린 뒤 왕의 비답이 없자 바로 낙향하여 국농호(國農湖)에서 울분을 삭이며 소요하였다. 인종반정 후 성균관재임으로 있던 중 사망하였다. 다섯째 아들이 명파(明坡) 김지흠[1606~1679]인데, 동생 김지건(金之鍵)이 명천부사를 지내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
무홀재는 김지흠의 후손들이 1963년 국농호가 마주 보이는 사등산 자락에 있는 김지흠의 묘소 아래에 재실을 건립하였다. 조상의 충의 정신을 이어받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무홀(无忽)’로 정하였다.
[위치]
무홀재는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 358번지 사등산 자락에 있다. 귀명리 입구의 양명길을 따라 하남읍 방면 좁은 길을 가다 보면 낮은 언덕에 광주김씨 구봉공파 명파공 후손 묘원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언덕에 올라서면 묘원 아래에 재실이 보인다.
[형태]
무홀재는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재실은 외삼문을 갖추고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재실 기문은 따로 없고, 재실 바로 뒤쪽에 광주김씨 구봉공파 명파공 후손 묘원이 조성되어 있다.
[현황]
무홀재는 재실과 묘원이 함께 있고 후손들이 잘 관리하여 건물 상태가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무홀재를 통하여 광주김씨의 경상남도 밀양 정착 과정과 지역 내 분포지를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