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587
한자 李迨
영어공식명칭 Lee Tae
이칭/별칭 중예(仲豫),월연주인(月淵主人),금서자(琴書子),월연(月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현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83년연표보기 - 이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10년 - 이태 식년시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17년 - 이태 성균관전적 역임
몰년 시기/일시 1536년연표보기 - 이태 사망
출생지 한양 -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용평동 지도보기
외가|처가 이태 외가 - 경상남도 밀양시 용평동
성격 관인
성별 남성
본관 여주(驪州)
대표 관직|경력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사헌부감찰|한성부판관

[정의]

조선 전기 밀양에서 거주한 문인.

[가계]

이태(李迨)[1483~1536]의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중예(仲豫), 호는 월연주인(月淵主人) 또는 금서자(琴書子), 월연(月淵)이다. 고려 말 두문동 72현의 한 명으로 충절과 문행을 떨친 기우자 이행(李行)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정9품 서반의 품계인 효력부위(効力副尉) 이사필(李師弼)이고, 아내는 이흠례(李欽禮)의 딸이다. 형은 이원(李遠)이다.

[활동 사항]

1483년(성종 14)에 한양에서 태어났다. 1499년(연산군 5) 17세 때 부모와 함께 외가인 밀양으로 내려와 사인당리[지금의 밀양시 용평동]에 터전을 잡았다. 1507년(중종 2) 25세 때 생원, 진사 2과에 동시에 합격이 되었다. 1510년(중종 5) 28세 때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검열, 시교, 봉교 등으로 한림(翰林)을 역임하는 동안 직필하는 사관(史官)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다.

1512년(중종 7) 30세 때 사필(史筆)을 고치라는 권력에 맞서서 싸우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장형(杖刑)을 받고 면직된 뒤로는 당대의 석학인 모재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 드나들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1517년 35세 때 성균관전적(典籍)으로 복직된 뒤 사간원정언, 사헌부감찰 등으로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왕도정치에 적극 협조하였다. 1519년(중종 14) 37세 때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에서 함경도사(咸鏡都事)로 좌천된 것을 기화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월연(月淵) 가에 집을 지어 쌍경당(雙鏡堂)이라 편액하여 학문을 닦고 시를 지으며 지냈다. 이후 약 5년 간을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형제를 비롯하여 이현보(李賢輔), 권벌(權筏), 김세필(金世弼), 류관(柳灌), 어득강(魚得江), 신광한(申光漢) 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승문원교검(承文院校儉)으로 복직하여 평안도사(平安都事), 풍기군수(豊基郡守),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에 보임되었고,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을 역임하였다. 1532년(중종 27) 50세 때, 삼척부사(三陟府事)로 다시 등용되었으나 홍문관응교로서 당시의 권력자인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규탄하다가 박해를 받아 관직을 사퇴하고 월연 별서(別墅)에 귀향하여 1536년(중종 31)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태는 김정국·이현보·권벌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였으며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났다. 이태는 시율(詩律)을 좋아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고 주역(周易)의 정몽(正蒙)에 대한 세론(細論)을 편저(編著)하기도 하였다. 저서는 2권 1책의 『월연집(月淵集)』이 있다. 후손 이장운(李章運)·이종술(李鍾述)이 이만재(李萬材) 등이 만들었던 유고(遺稿)에 부록 등을 첨부하고, 허전(許傳)의 서(序)와 이돈우(李敦禹)의 발(跋)을 받아 1873년에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 밀양문화원(https://miryang.kccf.or.kr)
  • 밀양시청(https://www.miryang.go.kr)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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