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5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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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禹昌柱 |
영어공식명칭 | Woo Chang-ju |
이칭/별칭 | 명신(明新),구강(龜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영숙 |
추모 시기/일시 | 1891년 9월 - 우창주 정문 설립 요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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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911년 - 우창주 정려각 건립 |
출생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구령리 |
성격 | 효자 |
성별 | 남성 |
본관 | 단양(丹陽)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효자.
[가계]
우창주(禹昌柱)의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자는 명신(明新), 호는 구강(龜岡)이다. 우경(禹瓊)의 7대손이며,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구령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매우 슬퍼하니 인근 사람들이 효성이 놀랍다고 칭송하였다. 어머니 또한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여 조정에서 정려(旌閭)하였다.
[활동 사항]
우창주는 어머니가 우는 것을 좋아하면 울기도 하고, 웃는 것을 좋아하면 웃기도 하여 어머니를 즐겁게 하였다. 매일 병시중을 들면서 어떻게 하면 약효가 있을까 고민하였다. 어머니가 위병으로 고생하자 똥을 맛보아 병을 감지하며 자신이 대신 병을 앓기를 하늘에 빌어 여러 번 어머니의 명이 회생하였다. 우창주의 어머니는 80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우창주는 시묘살이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성묘하며 통곡하였다. 눈물이 떨어진 곳에는 풀이 다 말랐으며, 맑은 샘이 묘소 앞에서 솟아났는데, 제기와 눈언저리를 씻었다. 여막 가운데에는 상제에 관한 책만 있었다. 위문록에 기록된 사람은 한 고을의 현사들뿐만 아니라 대개 서울의 많은 명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다. 시묘살이 3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마른 풀이 다시 살아나고 샘물이 스스로 맑아졌다.
[상훈과 추모]
경상도 내 유생(幼生) 박한승(朴漢承) 외 17명이 1891년(고종 28) 9월에 밀양 부사와 경상도 관찰사 앞으로 건의하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 우창주의 정문(旌門)을 세울 것을 명하였으나 제목과 장수(匠手)는 관에서 스스로 주선하게 하였다. 당시 국내 사정으로 보류되었다가 1911년에 밀양시 초동면 구령동 마을 앞에 인근 사람들이 우창주의 정려각(旌閭閣)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