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전기의 열녀. 유학(幼學) 강검(姜儉)의 아내이다. 『진양지』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정씨(鄭氏)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에 왜적들에게 항거하여 정절을 지키려다가 죽었다고 한다. 진주 가좌촌에 살았다고 한다. 중종 때에 열행이 알려져 정려되었다. 진주는 예향(禮鄕)으로써 예로부터 선비가 많기로 이름난 고장으로 많은 선비들의 덕행과 절행을 찾아볼 수 있다....
-
조선시대의 효자.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강결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노모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노모의 나이 92세 때 강결이 노모에게 꿩고기를 대접하려고 마음 먹고 목욕재계를 한 후 하늘에 빌었는데, 이때 갑자기 꿩이 부엌으로 날아왔다고 한다. 또한 이전에 마을에 역병이 돌아 어머니를 모시고 산중으로 피신 갔다가 온 일이 있었는데, 호랑이가 문...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 진산마을에 있는 강권수의 효행을 기리는 비. 손가락을 잘라 병든 아버지를 간호한 강권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 진산마을 가마고개 도로변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36㎝, 너비 39㎝, 두께 18㎝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글자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비의 제목은「처사진양강공...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위거(渭擧), 호는 지우당(至愚堂). 임진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도와 공을 세운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현손[5대손]이며, 아버지는 강여완(姜汝完)이다. 학문과 인품으로 이름을 날린 강세준(姜世儁)의 아버지이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땅을 치고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모습이 이미 성인의 모습과 같았다. 집이 본...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우약(友若), 호는 묵촌(黙村). 조선 초기의 문신인 강숙경(姜叔卿)[1428~1481]의 후손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부모가 병들었을 때는 그 똥을 맛보았으며 부모의 치유를 위해 하늘에 기도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상복을 벗지 않고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3년 동안 하였다. 아우인 강달지(姜達之)...
-
조선 전기의 열녀. 사노비로 강대익(姜大益)의 첩이다. 15살 때부터 강대익을 섬겼는데,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함락될 때 강대익이 전사하자, 몸소 그 유해를 거두어 묻고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진주 백곡리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술(彦述). 임진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도와 공을 세운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다음과 같이 강득윤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품성이 효성스러웠고,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랐다. 또한 청렴하고 근후하여 가훈(家訓) 3편을 지어 이를 철저히 지키도록 했다. 아버지의 상...
-
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밀양부사를 지낸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의 아들이다. 진주 진성면 지역에서 살았다. 품성이 효성스러웠고, 제사를 받들 때는 정성으로써 하였으며, 어버이를 섬길 때는 예로써 하였다. 가정을 이루어 분가한 곳이 3리쯤에 있었는데도 부모께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 올리는 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비록 큰바람이나 큰...
-
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가 종기를 앓았는데 의원이 두꺼비를 달인 것이 좋다고 하였다. 계절이 한겨울이라서 두꺼비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갖은 노력을 다해 두꺼비를 구해 드리니, 아버지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그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행적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표(旌表)를 받았다....
-
조선 전기의 열녀. 강몽정(姜夢禎)의 딸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강씨(姜氏)는 임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에 부모를 따라 산 속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부모와 형제가 함께 왜적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하자 불 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불에 타죽어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7세였으며 진주 사죽리(沙竹里)에 살았다. 정려(旌閭)는 받지...
-
조선 중기의 효자.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병을 고치고자 하였다. 여덟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70살에 추상(追喪)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그 행적이 기록되었다. 효종 때에 정려(旌閭)를 내려주었다....
-
조선 후기의 효자. 자는 상능(尙能), 호는 지지당(遲遲堂).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매우 추운 겨울날씨에도 베짜기를 멈추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이는 무엇을 하기 위함입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너의 옷을 만들려고 한다”라고 대답하니, “자식이 되어서 어머니로 하여금 수고스럽게 하는 것을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울면서 날실을 잘랐다. 어머니가 이를 보고 다시는...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주려(周呂), 호는 매호(梅湖). 아버지는 설림(雪林) 강성조(姜聖祚)이다. 어려서부터 어버이께 효도하고 아우 강주행(姜珠杏)과 강우송(姜玗松)에게 우애가 있었다. 아버지가 병이 걸리자 아우인 강주행(姜珠杏)과 더불어 여러 달 동안 시중을 들었는데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매우 슬퍼하였다. 천성이 단아하고 고...
-
조선 전기의 열부. 강세진(姜世軫)의 아내이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때에 왜군에게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맞서 싸우다 죽었다. 조정에 그 일이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旌門)을 내려주었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그 행적이 기록되었다.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에 살았다....
-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차현마을에 있는 남원양씨 효행비. 남원양씨는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생시키는 등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강수제(姜壽齊)에게 시집간 후로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었으나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셨고, 아들을 장가보낸 뒤에는 자신의 일은 다 마쳤다고 여겨 약을 먹고 숨을 거뒀다. 이와 같은 행적을 기리기 위해 비가 세워졌다. 원래는 1654...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성오(成五). 아버지는 장령(掌令)을 지낸 강성희(姜聖喜)이다. 아버지 강성희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 형인 강영호(姜泳鎬)와 더불어 밤낮으로 병 수발을 하였다. 한 모금의 물과 한 번의 소변이라도 공손히 시중하여 아버지를 매우 편안하게 하였다고 한다. 상을 당해서는 몹시 슬퍼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
-
조선 전기의 열녀. 아버지는 강순(姜淳)이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 산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적이 발견하고는 욕보이려고 하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항거하다가 결국 피살당하였다. 선조 대에 조정에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旌門)을 내려주었다. 진주 금산리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미중(美仲), 호는 소은(素隱). 조선 중기의 무신인 강덕룡(姜德龍)의 6대손이고, 아버지는 매은(梅隱) 강흥운(姜興運)이다. 어머니는 인재(忍齋) 하윤관(河潤寬)의 딸이다. 1734년 진주시 대곡면 설매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자질이 남달라 6~7세에 문리를 알았으며 효성 또한 뛰어났다. 한말 선비 이도묵은 강식준의 학문은 경...
-
고려 후기의 효자. 강안명(姜安命)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아버지가 매양 이웃 노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니 아내와 상의하여 힘껏 준비하여 이웃들을 모셔와 즐겁게 노시도록 하였다. 때문에 살림이 날로 어려워져갔으나 아버지에게 절대 어려운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아버지상을 당하여 그 슬퍼함이 자심하였고, 장사를 지내는데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지성으로 해드려 이웃사람들의 칭...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강엄(姜曮)이고, 아버지는 사인(士人) 유훤(柳煊)이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단정하였다. 남편 강엄이 병에 걸려 죽자, 한걸음에 달려가 슬퍼하며 말하기를 “곧 남편의 뒤를 따를 것이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세 달만 지나면 서로 만날 것입니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유씨의 배 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 달 후 아이가 태어나자,...
-
조선시대의 열녀. 진사 강여평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남편인 강여평이 중병이 들어 죽은 후에 3년 동안 죽만 마시고, 평생 소복을 입었다고 한다. 진주 평거리(平居里)에 살았다....
-
조선시대의 열녀. 진주 소촌역의 향리였던 강용(姜龍)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에는 ‘제조이[諸召史]’로 기록되어 있는데, 제조이는 ‘제씨 성을 가진 여성’을 뜻하는 말이다. 조이[召史]는 양반이 아닌 평민 출신의 과부를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남편이 죽자 장사에 예를 극진히 하였고, 옷을 모두 고쳐 상복으로 만들어 입었으며,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올리고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찬지(贊智).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다음과 같이 강의회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워서 부모를 섬길 때 뜻을 받들고 몸을 편안하게 하였다. 부모가 병드니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똥을 맛보아 병세를 살폈으며, 허벅지를 잘라 피를 내어 약에 섞기도 하였다. 고종(高...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사인(士人) 강민효(姜敏孝)의 아들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실려 있다. 아버지가 중병이 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바치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진주 수곡에 살았으며,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창원황씨는 남편이 병이 들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여 3일 동안 목숨을 연명시켰으나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곧 남편을 따라 자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가솔들을 부탁한다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자녀의 혼인을 끝내고는 집안 식구들에게 이별을 고한 뒤 자진하여 남편 뒤를 따랐다....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부계리에 있는 김해김씨의 효행과 열행(烈行)을 기리는 비. 김해김씨의 손자 김위중(金渭中)이 할머니의 효행과 열행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부계리마을 동쪽 입구 지방도변에 남향하여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에 높이 145㎝, 폭 50㎝, 두께 18㎝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문은 풍화로 인하여 몇 글자는 알아보기...
-
조선시대의 효부. 부장(部將) 강추국(姜秋國)의 딸이다. 효행이 뛰어나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바쳐 병이 낫게 하였다고 한다. 진주 금산리(琴山里)에 살았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극명(極明), 호는 우재(愚齋).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관인인 강회백(姜淮伯)[1357~1402]의 후손이다.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바치고, 변을 맛보아 그 병든 정도를 헤아렸다. 어머니가 중풍을 앓아 수족을 쓸 수가 없을 때는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곁에서 숟가락을 들어 식사 시중을 들었다. 상...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중용(仲容)이다. 9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싸움에서 죽으니 울면서 뛰다가 갑자기 기절하였으며, 집상(執喪)을 성인과 같이 하였다. 12살에 어머니가 병이 들자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한 번은 고기를 낚아서 밤에 돌아오는데 호랑이를 만났으나, 호랑이가 스스로 길을 피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기력이 많이 약해진 어머니는 ‘내가 죽으면 반드시 옥황상제가 세 번...
-
조선시대의 효자. 자(字)는 찬익(贊翼)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몸소 품팔이를 하여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부모를 공양하였다. 부모가 병이 나면 자신도 먹지 않았다. 아버지의 묘가 집에서 멀었는데도 날마다 가서 살폈고,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묘소로 달려가서 상복을 벗어 봉분을 덮어주기도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효자라고 일컬었으며,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그...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남편 강휘준은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본래의 생모를 후가(後家)의 낭실(廊室)에 모시고 양정(兩庭)을 효성으로 봉양하였는데, 재령이씨도 이에 순응하여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다. 남편 강휘준이 본래의 생모를 낭실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큰비가 오자 하천물이 갑자기 들이닥쳐 집이 떠내려가고 모자가 함께 물...
-
진주지역에 있는 서원. 경상도 지역에 건립된 193개의 서원 중 경상남도 지역은 19개 군에 44개 서원이 건립되었는데, 그 가운데 진주지역에 해당되는 서원은 7개로 경상남도에서 가장 많다. 재실의 수에 있어서도 진주지역에 약 500여개가 분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현재도 문중에 따라 새로 건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원은 선현을 모시는‘사(祠)’와 제자를 교육하는‘재(齋)’에...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사당. 진주하씨의 사우로서, 하즙(河楫)·하윤원(河允源)·하자종(河自宗)·하계종(河啓宗) 등 4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하즙은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진천군(晋川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를 원정(元正)이라 하였다. 그 아들인 하윤원은 충혜왕 말년에 등제하여 경상, 서해의 안찰사를 지내고 원주와 상주의 목사를 역임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명...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사우. 고려 초 거란에 끝까지 대항하다 순절한 충신 하공진(河拱辰)[?~1011]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1804년(순조 4) 수곡면 사곡리 낙수암(落水菴)에 창건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향사를 일시 중지하였으며, 1869년 부조묘(不祧廟)로 되어 다시 자손 봉사하게 되었다. 하공진 장군의 “정...
-
조선시대의 효자. 효자 김걸의 동생이다. 내노비로서 진주 명석리에 살았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항상 옆에 있었고 조금도 떠나지 않았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형이 이미 죽은 상황에서 병이 중한 어머니가 자신이 출타한 사이 돌아가시게 되면 종신토록 한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잠시도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제사를 올리는데 집...
-
조선시대의 열녀. 진주 나동에 살았다. 성품이 착하고 효성스러워, 시집간 후로는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시어머니가 병에 걸려 3년을 앓았는데 산이나 하늘에 정성으로 빌고, 시어머니의 대변을 맛보아 증상을 체험하는 등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 모성공회(慕聖公會) 및 군리로부터 표상을 받았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능성(綾城)사람 구사서(具仕書)이고, 아버지는 김희수(金希洙)이다. 진주 가정에 살았다. 김녕김씨의 남편 구사서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김씨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기를 결심했으나 늙은 시부모가 마음에 걸려 자진하지는 못하고, 헝클어진 머리와 때가 낀 얼굴로 미망인 생활을 자처하였다. 세 아이가 장성함에 따라 유학을 시키는 등 집안일을 정성껏 돌보았고, 마...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능성인(綾城人) 구치조(具致祖)이고, 아버지는 왕기삼(王基三)이다. 진주 가정에 살았다. 개성왕씨는 천성이 착하고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집이 가난하여 품팔이와 길쌈으로 생활을 꾸려나가고, 시부모에게는 몸에 편한 물건이나 입에 맞는 음식을 올렸다. 시어머니가 중한 병에 걸려 수년이 되도록 더해가니 왕씨는 백 일 동안 산에 올라가 시어머니...
-
조선 전기의 효자. 광대로 효성이 깊어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실렸다. 어느 날 밤 호랑이가 군만의 아버지를 물고 달아났는데, 그는 하느님께 아버지가 무사하기를 빌며 활과 화살을 갖추어 산속으로 따라갔다. 날이 밝아 어느 골짜기에 이르니 그 호랑이는 이미 아버지를 다 뜯어 먹고 양지바른 곳에서 자고 있었다. 이에 군만은 “내 화살을 받아라”고 고함치며 살기어린...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에 있는 사당. 공자(孔子)를 모시는 사당으로, ‘궐리’는 중국 산뚱성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가 태어나서 살던 궐리촌을 본떠 지은 이름이다. 진주 이외에 충청남도 논산시의 노성(魯城)[충남기념물 제20호], 경기도 오산시의 궐동[경기도 기념물 제147호] 등에 공자의 사당인 궐리사가 있다. 노성궐리사는 1716년(숙종 42)에 권상하·김만준·이건명 등...
-
조선시대의 효자. 노비 고음동의 형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왜구를 만났을 때 그 어머니가 병이 깊어지자 등에 업고 피난하여 어머니를 온전히 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두 팔이 성치 못하자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수저를 들어서 먹게 하였다. 진귀한 음식이나 신선한 과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가지고 돌아와 어머니께 드렸다. 두 명의 아우와 함께 살았는데 우애가...
-
조선 전기의 열녀. 본관이나 부모 등은 알 수 없으며, 남편은 김대용(金大鎔)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적병을 만나자 정절을 지키고 죽었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선조 조에 열행이 알려져 조정에서 마을에 정려(旌閭)을 내려 주었다....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중천리에 있는 진양하씨의 열행비. 진주의 유생 김동철(金東喆)에게 시집간 진양하씨는 문충공 하륜(河崙)의 후손으로, 남편이 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자신의 무릎 살을 베어 먹여 소생시키는 등 정성껏 간병했다. 이 일이 알려져 진양하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비가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중천리의 양들 공군교육사령부 후문 입구의 도로변에 위치한다...
-
조선시대의 효자. 진주 백곡(栢谷)에 살았던 인물로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올라 있다. 유학(幼學)이며 효자로 명성이 있었다. 성품이 크고 담대하였다. 어버이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바쳐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
조선 전기의 열녀. 진사 김명선의 아내이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도중에 산세가 험한 곳에 이르자 스스로 몸을 기울이니 결박된 것이 끊어지면서 떨어져 죽었다. 진주 영신대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전기의 효자.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김백산이 16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갈 지경에 이르자, 낫을 휘둘러 호랑이를 쳐서 아버지를 구해냈다고 한다. 이 일이 알려져 1478년(성종 9)에 정려되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하촌리에 있는 원주원씨의 열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열녀비(烈女碑). 열부(烈婦)인 원주원씨를 기리는 비로 그녀의 손자 김두연과 집안사람 김억조가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하촌리 가좌부락을 조금 벗어나 대곡면으로 가는 지방도 옆에 동향으로 있다. 사각의 받침돌 위에 높이 135㎝, 폭 46㎝, 두께 16㎝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강씨는 남편 김서룡이 병이 들어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두 되 남짓의 쌀을 가지고 가만히 산 속에 들어가 어느 무덤 속의 시체 곁에 두었다가 다음날 가지고 와서 미음을 써서 남편에게 봉양하기를 세 번 하였다. 미음이 효력이 없자, 이번에는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남편에게 구워 먹였다. 남편이 기력을 회복하고...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삭녕최씨는 성품이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잘 섬겼다. 시부모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있자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고, 울적함을 달래주기 위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등에 업고 즐겁게 해드리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
조선 전기의 열녀. 김선명(金善鳴)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의하면, 1593년 임진왜란 중에 피하지 못하고 왜병에게 잡혔다. 저항을 하니 결박이 되어 소의 등에 실려 갔다. 매우 험한 곳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몸을 기울여 거꾸로 향하니 결박된 것이 끊어져서 떨어져 죽음으로써 그 절개를 지켰다.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크게 흠앙을 받았다....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의 시어머니가 학질을 앓아 고통이 심하여 거의 실신할 지경에 처하자 강씨가 울면서 하늘에 빌고, 또한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약을 지어 올리는 등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강씨의 정성으로 병이 나은 시어머니는 천수를 누린 후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
조선시대의 효자. 개인에게 소속된 노비인 사노(私奴)이다. 부모와 형제에게 지극하여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부모들이 토지를 그 아우에게 모두 물려주었는데도, “나는 처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있으니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하며 조금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노비가 재산을 소유했고, 여자도 상속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진주 시천리(...
-
조선시대의 효자. 김준원(金俊元)의 손자로 효성이 남달랐다. 16세가 되던 때, 아버지가 병이 들자 집 뒤쪽에 단을 쌓고 아버지의 쾌차를 위해 울면서 하늘에 빌기를 한 달이 넘도록 하였다. 어느 날 홀연한 기운이 돌면서 무지개와 같은 것이 단에서 나와 아버지가 누워있는 병상 쪽을 향해 뻗쳤다. 이후 아버지의 병은 곧 나았다고 한다. 그 효행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되었으며 『진양속지(...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김승택(金昇澤)이고, 아버지는 강호운(姜浩運)이다. 진주 미천에 살았다. 진양강씨는 남편 김승택이 중한 병에 걸려 수개월간 자리에 누워있자, 지극 정성으로 간병을 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어느 날 가만히 방으로 들어가 약을 마시고 자진하니 집안 식구들이 서둘러 구하고자 하였으나 숨을 거두었다. 얼마 후 남편이 회복되어 쾌차하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지...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광주노씨는 시아버지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약을 지어 올리는 등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또한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위독하자 밤낮으로 하늘에 쾌유를 빌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게 하는 등 병든 시부모를 정성껏 간병하였다. 이 일에 감복한 향리가 조정에 보고하여 고종 조에...
-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소곡리 삼구부락 입구에 위치한 수원백씨의 효열비(孝烈碑). 김용봉의 처 수원백씨의 효행과 열행을 기리고 있다. 1918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지나는 사람들에게 효(孝)와 열(烈)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수원백씨의 효행과 열행이 조정에 알려져, 남편 김용봉은 동몽교관으로, 수원백씨는 숙부인으로 증직(贈職)되었다. 향리 사람들...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온수리 장곡마을에 있는 효행비. 김응문은 아버지가 중병이 들자 갖은 정성으로 간호하였는데 이와 같은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김응문의 처 거창유씨도 시아버지가 혼절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먹여 소생시키는 등 김응문에 못지않게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깅응문은 동몽교관 겸 예조정랑이란 벼슬이 내려졌고, 부인 거창유씨에게도 정려가 내...
-
조선 전기의 열녀. 정병(正兵) 김응봉(金應鳳)의 처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그 열행이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 진주성이 무너질 때 오랑캐에게 잡혔다. 그러나 구차히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적병을 향해 의연한 모습을 보이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절개를 지키다 죽었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 되었다....
-
조선 말기의 효자.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다음과 같은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김종길(金鍾吉)은 성품이 바르고 그 행함에 지나침이 없었다. 17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거상을 함에 있어 모든 절차가 한결같았다. 후에 아버지가 병들자 정성을 다하여 구완하였고 또한 똥을 맛보아 병의 차도를 살폈는데, 병이 쉽게 낫지 않았다. 의원이 말하기를 백장사(白章蛇)의 기...
-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에 있는, 효자 김종길(金鍾吉)의 효행을 기념하는 비각. 1896년(고종 33) 김종길의 효행을 조정에서 포상하여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 마을 입구의 도로변에 남향하여 있다. 1965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로, 지붕은 맞배형이다. 이 정려의 본래 명칭은 “효자증동몽교관조봉대부김공정려(孝子贈童蒙敎官...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에 있는 김종립 처 경주최씨의 열행비. 경주최씨는 남편 김종립이 병에 걸리자 주저 없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이는 등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간호하여 소생시켰으나, 정작 자신은 그로 인해 고생하다 죽었다. 그 열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 진산마을의 가마고개 도로변에 위치한다. 사각형 받침돌 위에 높이 142㎝,...
-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갈곡리에 있는 진양하씨의 효부비. 진양하씨의 큰아들 김훈태(金薰泰)가 어머니의 효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1937년에 세웠다. 비문은 대체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주인공의 효성을 기리는 내용과 건립경위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갈곡리 부락 입구 지방도 변에 동북향(東北向)하여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35㎝, 폭 51㎝, 두께...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 진산마을에 있는 김종팔 형제의 효행비. 김종팔은 어머니 전씨가 매우 중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메고 있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게 하여 소생시켰다. 또한 동생 김종오도 아버지 김영곤이 병들자 형과 똑같이 행동하여 아버지를 간병하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가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 진산마을의 가마고개 도로변에 위치한다....
-
조선 말기의 효자.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봉양함이나 죽어서 장례를 치름에 그 정성을 다하였다. 초상을 치르던 중 깊은 밤에 움막에서 불이 나서 걷잡을 수 없었다. 불꽃을 무릅쓰고 영구(靈柩)를 안고 하늘에 부르짖으며 통곡을 하니, 하늘에서 폭우를 내려서 불을 껐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는 여묘에서 3년상을 모시니 맹호가 와서 지켜주었다고 한다. 1878년(고종 15)...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는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잘 섬겼는데, 시집간 후로는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친지들에게 예로써 접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남편 김중철이 오랫동안 학질로 고생하였는데, 사람의 살이 효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약을 지어 올렸다. 이후 남편의 병세가 호전되는...
-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두문리에 있는 효적비. 유인 남원양씨가 시아버지에게 행한 효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효행내용을 기록하여 두문마을에 세운 비를 말한다.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두문리 두문마을 산기슭에 위치한다. 비좌는 방형이고 비수는 한옥와가 형태의 가첨석인데, 방형의 받침돌 사방에 석주를 세워 대형의 비수를 받치고 있어서 마치 보호각의 역할을 겸하도록 하였다. 비문은 한문...
-
조선시대의 열녀. 첨사(僉使: 조선시대 일선 진영(鎭營)을 관장하던 무관직) 김진(金震)의 아내로 진주 가좌촌에 살았다. 『진양지(晋陽誌)』 권3「열녀조(烈女條)」에서 그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중에 왜적으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죽었으며, 중종 때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旌門)을 내려주었다....
-
근대 개항기의 열녀. 윤선랑은 본래 함안 양가의 딸이었는데 1876년(고종 13)에 큰 흉년을 당하여 일가가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진주 청원촌(淸源村)에 이르러 최씨 집안의 불 때는 종이 되었다. 주인의 어머니가 몹쓸 병이 들자 정성껏 간병하였고, 남편이 사망하자 그 시어머니를 잘 봉양할 것을 동서에게 부탁하고 후사를 세워 남편의 뒤를 이어줄 것을 시동생에게 부탁한 다음 식...
-
조선 말기의 효자. 효성이 깊고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병들어 다섯 달 동안 백약(百藥)이 무효하였다. 단지 사슴의 피만이 효험이 있다고 하여, 하늘에 빌었더니 산에서 사슴이 저절로 내려왔다. 사슴을 잡아 그 피를 드렸더니 병이 즉시 회복되었다고 한다. 1891년(고종 28)에 정려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이나 가계사항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강조이[姜召史]’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남편은 보인(保人: 조선시대 군역을 지는 정군(正軍)에게 딸린 경제적 보조자)인 김축(金軸)이다. 남편이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주어 목숨을 구하였다. 진주 자매곡(自梅谷)에 살았다. 조이[召史]는 양반이 아닌 신분의...
-
조선시대의 효자. 훈도(訓導)로 성품이 바르고 온화하면서도 절개가 있었다. 또한 예와 효를 행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비록 집이 가난하였으나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서 반드시 부모가 좋아하시는 맛있는 음식들을 갖추려고 노력하였다. 나이가 들어 어버이의 상(喪)을 당해 애통해 하였는데, 예(禮)를 갖추어 채소와 과일을 먹지 않고, 3년 상을 치르는 동안 죽만으로 연명하였다. 이에 사람...
-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에 있는 효열비. 방형의 비좌에 비신을 세우고, 비신 양옆으로 석주를 세운 다음 가첨석을 얹었다. 비문은 한문으로 지었는데 그 내용은 증가선대부호조판서 황우수의 딸인 유인 회산황씨가 김해인 김평린에게 시집와 시부모의 병구완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인 지극한 효행을 행한 것을 기록하였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김녕김씨 김형백(金炯佰)이고, 아버지는 하계윤(河啓潤)이다. 행실이 정숙하여 시부모와 남편을 정성을 다해 모셨다. 시할머니가 오랜 기간 병상에 누워있게 되자, 밤낮으로 탕약을 지어 올리는 등 간병하는 데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산적이 깊은 밤에 나타나 남편을 포박하여 데리고 가려 하자, 진양하씨가 따라가서 ‘나의 남편이 무슨 죄가 있기에 죽이려 하느냐’...
-
조선 전기의 학자 남명 조식의 사상과 학문을 연구하기 위한 기관.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교육자인 조식(曺植)[1501~1572]의 자는 건중(楗仲), 호(號)는 남명(南冥)이다. 경상도 합천(陜川) 출신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1990년 8월 설립된 남명학연구소는 남명 조식의 사상과 학문을 연구하기 위한 연구기관이다. 남명학을 중심으로 한국 전통사상을 연구...
-
조선시대의 열녀. 선무랑(宣武郞, 조선시대 종6품의 문관 품계) 남정소(南廷召)의 부인이다. 진주 원당촌에 살았다. 지조가 뛰어나 마을에는 정문(旌門)을 내려주었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실렸다....
-
조선 중기의 효자.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진주 어느 절의 노비로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어버이에게 바치는 효성만은 누구 못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은 어머니를 업고 떠돌아다니면서 걸식하여 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힘을 다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고, 담제(禫祭: 대상을 치른 다음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를 지낸 뒤 비로소 고기를 입에 넣은, 하...
-
경상남도 진주시 하대동에 있는 서원 터. 도동서원은 조선 초기 단종 때의 충절 신하였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분(鄭苯)·김문기(金文起) 등 4위를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었다. 그후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이 서원도 훼철되고 터만 남게 되었다. 도동서원은 단종을 위해 죽은 사화공신 중 1순위인 삼상(三相, 황보인·김종서·정분)을...
-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신갈리에 있는 효행비. 지극한 효성으로 동몽교관이 된 창원황씨 황섭(黃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신갈리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47㎝, 너비 58㎝, 두께 19㎝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신에 비해 머릿돌이 매우 커서 사방에 받침기둥을 마련하였다. 글자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비의 제목...
-
조선시대의 열녀. 사노비(私奴婢)로 진주 백곡리에 살았다. 산골짜기에서 밭을 갈고 있는데 지나가는 중이 그를 욕보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막지는 목숨을 걸고 이에 저항하였다. 중이 낫을 당겨 목을 누르며 위협하였으나 욕을 하면서도 따르지 않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에 있는 재령이씨의 정자. 1941년 이기환이 지은 목조 기와형으로 지은 건축물이다. 만수정(晩修亭)이란 이름은 뒤늦게 인격을 수양한다는 시의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기환은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이 재실을 짓게 되었는데, 그의 선조들은 근면, 빈객 맞이, 그리고 제사 등에 있어서 향리사람들로 칭송을 받는 이들이었다. 또한 명리 보다는 의리를 중시하였...
-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에 있는 재실. 진양하씨로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하천서(河天瑞)와 하경호(河慶灝) 부자의 재실이다. 하천서의 호는 망추(望楸), 하경호의 호는 읍추(泣楸)로, 하천서의 호를 본떠 망추정이라 하였다. 하천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군대를 훈련시키고 허물어진 진주성을 수축하고 못을 깊이 파서 장차를 대비하였다. 후에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
-
조선시대의 효자. 효자인 사간(司諫) 모순(牟恂)의 후손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성품이 바르고 충효로웠으며 온 힘을 다해 예를 행하였다. 부모가 함께 죽자 연복 6년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 효성과 예절에 탄복하고 흠앙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옥산리에 있는 정려각. 조선시대 이 지방의 선비였던 김장운(金長云) 처 진주강씨와 아들 김명식(金命植)의 절개와 효성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각이다. 김명식은 아버지가 등창이 나 고생하자 어머니와 더불어 정성껏 돌보며 하늘에 기도하여 낫게 하였으며, 또 상을 당하여서는 지극한 효성으로 장사지냈다. 고을 선비들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고 정려각 건립을 건의하...
-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에 있는 사당. 진주정씨의 사우로서, 정예(鄭藝)·정시양(鄭時陽)·정유(鄭裕)·정수균(鄭守均)·정홍차(鄭洪且)·정안사(鄭安社)·정수(鄭需)·정을보(鄭乙輔)·정이오(鄭以吾)·정황(鄭璜)·정분(鄭苯) 등 11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이들 11위 중 진주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이오, 정분 부자로, 정이오[1354~1434]는 고려 공민왕대에 나서 세종대까지 활약...
-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 죽곡마을에 있는 비. 밀양손씨가 남편 김영성이 학질에 걸리자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먹이는 등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간호하여 소생시킨 열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 죽곡마을의 입구 도로변에 위치한다. 사각형 받침돌 위에 높이 137㎝, 너비 46㎝, 폭 20㎝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대형의 머릿돌을 얹었다. 받침돌 사방...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부계리 저동마을에 있는 박승유(朴承裕)의 효행을 기리는 비. 아버지가 병이 들어 혼절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이는 등 정성으로 간호하였고,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근신하면서 머리를 빗지 않았다고 하는 박승유의 효행을 기념하여 아들인 박정승(朴靜乘) 등에 의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부계리 저동마을 입구의 도로변에 위치한다....
-
조선시대의 효자. 중종 조에 정려된 효자 박인(朴氤)의 손자이다. 진주 말동리(末洞里)에 살았다.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재산을 나눌 때 스스로 매우 적게 가지려고 하였고, 이후에도 형제 가운데 군색하고 모자라는 이가 있으면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시대의 효자. 중종 조에 정려된 효자 박인(朴氤)의 손자이다. 언제나 『소학(小學)』 한 부를 가지고 다녔으며, 몸을 다스리는데 빈틈이 없었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는 죽만 먹었으며, 애통해하는 것이 낮밤을 가리지 않았다. 항상 관 옆에 있었으며 상복을 벗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올리매 친히 그릇을 씻고 음식을 들었다. 또한 사당의 의례와 법도를 분명히 하였다. 모든 일에...
-
조선시대의 효자. 효자 박효근(朴孝根)의 둘째 아들이다. 심성이 비르고 효성이 깊었다. 어버이가 병이 들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려 노력하였으며, 그러던 중에 길에서 눈 속에 백화사(百花蛇)를 얻어 올렸더니 어버이의 병이 나을 수 있었다. 1885년(고종 22)에 정려되었다.『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태안(泰安). 자는 자복(子馥), 호는 호은(湖隱)이다. 진주 말동에 살았다. 부모상을 당하였는데, 당시 연산군의 폭정으로 3년 상을 못 치르게 할 때였으나 개의치 않고 3년 시묘를 예대로 치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중종반정 후 1509년(중종 4) 박인의 효성이 조정에 알려져 표창을 받고, 정려가 세워졌다. 『진양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효자리에 있는 광산김씨의 효행을 기리는 비. 광산김씨의 효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박종래(朴宗來)가 주도하여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효자리로 들어가는 효자교 부근 진주~합천간 지방도 옆에 남향으로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에 높이 153㎝, 폭 55㎝, 두께 37㎝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의 제목은 “효부광산김씨지려(孝婦光山...
-
조선 후기의 효부. 정유재란 때 일본군 정벌의 대장으로 활약했던 정기룡(鄭起龍)[1562~1622]의 딸로, 함양인 박태홍(朴泰弘)의 아내이다. 『증보 진양속지』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정숙하더니 시집가서는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공경하였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남편이 병사하니, 정씨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시부모가 살아 계심에 손수 염습과 장례를 치렀다. 이후 시부모를 지성으로...
-
조선시대의 효자. 가계나 활동사항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과 효행만이 기록되어 있다.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바치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진주 비라곡리에 살았다....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 초문마을에 있는 재령이씨의 재실. 방어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는 뜻에서 방산재로 부르게 되었다. 1967년에 재령이씨 이상열이 선조의 별세 후에 이 재실을 지었다. 그의 선조는 신의가 두텁고 가풍을 중시하는 점에서 향리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이들이었다. 또한 명리보다는 의리를 중시하였고, 이웃사람들과 잘 지내는 다정다감한 성품도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
조선시대의 효자. 속명(俗名)은 하일천(河一千)으로 사인(士人) 하극충(河克忠)의 아들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백천사(百泉寺)에 살면서 해상(海上)의 고기잡이와 친하게 지내어 고기를 얻어서는 즉시 그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서 드리는 등, 달고 맛있는 음식은 언제나 어머니에게 가져다주었다. 만년에는 정촌서재(鼎村書齋)에 거주하면서 어머니를 위하여 향도계(香徒契)에 들어 힘을 다하...
-
조선 전기의 열녀. 변립(卞岦)의 아내이다. 임진왜란 때 남편 변립이 그의 아버지 변연수(卞延壽)가 일으킨 의병을 따라 이순신 장군의 진으로 가서 군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당포싸움에서 부자가 모두 전사하자, 이를 안 김씨는 그 날로 자결하여 남편을 따랐다. 고종 때 이 일이 알려져 정려를 세우게 하고, 숙부인을 추증하였다. 아버지는 나라에 죽고, 아들은 아버지에 죽고, 아내는...
-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에 있는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모시는 사당. 강이식 장군은 진주강씨의 시조로, 고구려 영양왕 9년(598) 임유관(臨楡關) 전투와 612년(영양왕 23)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대군 30여만 명을 섬멸시킨 명장이다. 950년 고려 광종은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의 구국충절을 기려 봉산사를 건립하고, 매년 한식날에 제사를 모시게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
조선시대의 열녀. 황수장(黃壽長)의 아내로, 사비(私婢)였다. 스무 살에 남편을 잃었는데, 상복을 벗지 않고 매우 애통해 해서 몸이 상할 정도였다. 아버지가 불쌍히 여겨서 개가(改嫁) 시키려 하였지만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진주 청원리에 살았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진주향교에 속한 건축물. 9동으로 구성된 진주향교의 건축물 중 하나로 1986년 중건되었다. 진주향교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987년(고려 성종 6) 의곡사 계곡에 향학당(鄕學堂)으로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011년(현종 2) 중수 및 서재를 중건하고 수학원(修學院)·학사(學舍)·서재(書齋)·사교학당(四敎學堂) 등으로 개칭하였다. 1398년(태...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에 있는 강민첨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산앙사(山仰祠)에 봉안된 강민첨(姜民瞻)[?~1021]은 진주(晋州)가 본관으로 목종 때 문과에 급제, 1012년(현종 3)에 안찰사(按察使)로서 영일(迎日) 등지에 쳐들어온 동여진(東女眞)을 격퇴하였다. 1018년 거란[契丹]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자 강감찬(姜邯贊)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본동에 있는 비각. 이 건물은 3명의 효자를 기리는 내용을 기록한 판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삼효각은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본동에 있는 충의사로 접어드는 삼거리의 개울 건너편 산자락에 위치한다. 이익공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구조이다. 가구구조는 이익공 양식으로 처마의 네모서리에는 원형초석 위에 세워진 원형...
-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 고분군의 분묘 옆에 세워져 있는 재실. 영모재는 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1454]을 기리고 있다. 정분은 본관이 진주(晋州)로 자는 자외(子畏),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며,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1856년 가을에 진양정씨 종중의 논의를 거쳐 재실을 짓기로 합의하여 정분의 묘소 동편 옆에 중건하였다. 재실을 짓게 된 간략한...
-
근대 개항기의 효부 및 열녀. 달성서씨(達成徐氏) 서상재(徐相載)의 아내이며, 김해김씨 후손인 김응현(金應炫)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곧고 따뜻하며 부모에게 매우 효성스러웠다. 서상재에게 출가해서는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남편을 대할 때는 예를 어김이 없었다. 또한 자녀들을 기를 때에는 자녀들이 반듯한 길로 나아가는 데 모범이 되었다. 1909년 남편 서상재(徐相載)...
-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운영기구. 서원의 기능과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즉 공부하는 곳, 선현을 모신 곳, 향촌사회의 도서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종교행사와 관련된 서원의 역할은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곳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교육의 기능보다 사묘(祠廟)의 기능이 더...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덕곡리에 있는 비. 경주최씨가 남편 서치담(徐致淡)이 중한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이는 등 온갖 정성으로 남편을 간호한 행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사각형 받침돌 위에 높이 107㎝, 너비 76㎝, 폭 12㎝의 몸돌을 세웠다. 머릿돌이 존재하지 않는 대신, 특이하게 몸돌의 윗부분 모서리를 각을 내어 뾰족하게 처리하였다. 비의 제목은 ‘열부서...
-
조선시대의 효부. 진양인 하경휴(河慶烋)의 딸로, 석정재(石楨載)의 아내이다. 『진양속지 증보』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아하고 효성스럽더니 17세에 시집가서는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남편을 예로써 섬겼다. 시아버지가 우연히 낫기 어려운 병을 얻어 4년간을 병석에 눕자 백방으로 좋은 약을 구하고자, 집 뒤 산에 우물을 파고 매일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었다. 그러나...
-
조선 전기의 효·열부인 선산김씨의 정려비. 선산김씨는 이인형(李仁亨)의 자부이며, 생원 이핵(李翮)의 아내이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딸이다. 14세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에게 마시게 하였다. 시집와서는 시부모 지극정성으로 섬겼으며, 남편이 죽자 뒤따라 자결하였다. 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고 진주 가좌촌(嘉佐村)에 효열부(孝烈婦) 정문을 세웠다. 경상남도 진주시...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성경철(成慶喆)이고, 아버지는 강기섭(姜岐燮)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는 심성이 효성스러워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중한 병에 들어 자리에 눕자, 3년 동안 하늘에 빌어 마침내 신령스러운 효력을 얻었다. 나이 20여세 때 아들을 낳았는데, 홀로 된 시어머니 때문에 우는 소리도 내지 못하니 보...
-
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창녕. 자는 추지(樞之). 성종 때 교리를 지낸 성안중(成安重)의 손자로, 성일휴(成日休)의 아들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지성으로 모시면서 법도에 어긋남이 없도록 했으며,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서는 6년간의 시묘살이로 자식된 도리를 다했다. 어머니가 먼저 별세하여 서모를 모셨는데, 서모도 친모처럼 섬겼으며, 서동생들도 친동생같이 돌보았다. 서동생...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성사회(成師悔)이고, 아버지는 정사갑(鄭師甲)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정씨는 남편 성사회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혈서를 써서 세 번이나 영정 앞에 두고 갓 끈으로 스스로 목을 매에 죽었다. 암행어사에 의해 이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1816년(순조 16)에 정려가 내려졌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성치린(成致麟)이고, 아버지는 허란(許鑾)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김해허씨는 평소에 정조를 엄격히 지켰다. 남편의 장례 때 곡을 하면서 생각하기를 ‘3년 상을 정성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흐트러진 머리와 때가 낀 옷으로서 제를 마치고 상이 끝나는 날에 조용히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절개를...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창녕. 자는 화백(和伯), 호는 죽와(竹窩). 인조 때의 학자 성여신(成汝信)의 후손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효성스러워 가난한 형편에도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겼다. 그의 아버지가 죄를 입어 먼 곳에 귀양을 가게 되자 걸어서 서울까지 가 혈서로 아버지를 구해 달라는 호소문을 올렸는데, 열 손가락이 온전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왕이 그 지성스러운 효성에 감동하여...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 청원마을에 있는 재령이씨의 정자. 어려움에 대처하는 지사의 뜻과 기상을 말하는 점에서 세한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1924년에 재령이씨 이성률(李聖律)의 백부인 청호처사(淸湖處士) 이씨가 지은 목조기와형 건축물이다. 청호는 문장에 집착하는 선비가 아니고 평소 덕행에 힘쓰는 인물이었으며, 세한정은 생전에 학문과 덕행을 닦는 서실로 지었다. 추운 겨울이 되...
-
조선시대의 열녀·효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정씨는 시아버지가 병이 들어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여 회생시켰으나 아직 위독한 상황이었다. 이 때 꿈속에서 어떤 사람이 집 뒤의 바위틈에 산삼이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하여 실제로 캐어보니 산삼이 나왔다. 캔 산삼을 시탕하여 올렸더니 시아버지가 쾌차하였다. 한편 학...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 봉대마을에 있는 재령이씨의 재실. 1986년에 이현도·이현금이 지은 목조기와형 건축물이다. 이서규의 호를 따서 송강재라 부르게 되었다. 이서규는 학행과 효행이 모범적이어서 마을 사람들의 칭찬을 들은 처사였는데, 그의 후손들이 선조의 모범적인 삶을 이어받고 기리기 위하여 건축한 재실이다.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성실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넉넉한...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 거곡마을에 있는 재령이씨의 재실. 1976년에 지은 목조기와형 재실이다. 조상 묘의 소재지인 송현과 독계의 이름을 따서 송계재라 이름을 지었다. 재실을 지은 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기문이 없어 이종호가 기문을 붙였다. 선조들의 덕행을 기리고 본받고자 후손들이 힘을 모아 세우게 된 것이다.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성실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넉넉...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 거곡마을에 있는 재령이씨 재실. 이병기가 그의 9대조인 이형규의 덕행을 기리고 본받고자 1984년에 건립한 재실이다. 이형규는 영명하고 지혜로움이 뛰어나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사과의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오래 그 관직에 있지 아니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수신에 힘쓴 사람이었다.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성실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넉넉한 음식을...
-
경상남도 진양군 수곡면 사곡리 싹실마을에 있는 진양하씨의 시조인 하공진의 봉당(奉堂). 진양군 수곡면 사곡리 사곡동 싹실마을에 있는 하시랑공(河侍郞公)의 봉당(奉堂)은 진양하씨(晋陽河氏)의 시조(始祖)인 하공진(河拱辰)의 사당으로, 매년 음력 12월 보름에 제의(祭儀)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제의(祭儀)는 각 종파에서 선출된 10명 내외의 제관(祭官)들이 주관하는데, 인근 후손들도...
-
조선시대의 효자. 효심이 깊어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사노(私奴)였던 승남은 궁노장(弓弩匠: 활과 쇠뇌를 만드는 장인)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쇠뇌[노(弩)]를 묻어놓은 곳에 갔다가 호랑이가 아버지를 물어갔다. 동행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피하여 달아났지만, 홀로 호랑이와 맞서 싸워 아버지를 구했다. 진주 시천리(矢川里)에 살았다....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장흥리에 있는 비각. 조선 1718년(숙종 44) 9월 12일 숙종이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1454~1504]의 위패를 모신 신당서원을 사액하고 예조좌랑 이안국(李安國)으로 하여금 제를 고하는 사제문비를 세우고 이를 보호할 비각을 세웠다. 조지서는 1474년(성종 5) 과거에 합격한 후 사가 독서하였으며, 연산군 때 창원부사(昌原府使)로 내려왔다가...
-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이곡리 어수마을 입구에 있는 신명천 처 함안조씨의 열행을 기록한 비. 함안조씨는 남편 신명천과 자식이 일찍 죽었으나 평생을 수절하였다. 그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이곡리 어수마을 입구에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40㎝, 너비 48.5㎝, 두께 18.5㎝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머릿돌은 몸돌에 비해...
-
조선시대의 효자. 원래 순창(淳昌)의 사인(士人)이다. 호남에서 옮겨와 진주 덕산(德山)에서 살았다. 사람됨이 기개가 크고 효성스러웠다. 아버지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죽만 먹었으며, 밤낮으로 슬퍼하였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旌門)을 내려주었으며, 그 효행이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기록되어 있다....
-
고려 때의 효자.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성심껏 섬겼으며, 후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3년간의 시묘살이를 정성껏 했다. 하루는 까마귀가 향로상 위에 얹어 놓은 모래그릇을 물고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여효제는 자신의 효성이 까마귀보다도 못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크게 탄식하였다. 그러자 그 날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3일 후면 그 모래그릇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
조선시대의 효자. 사노(私奴)였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그 행적이 전한다. 아우인 여상(汝祥)을 대신하여 북쪽으로 군역을 수행하러 떠났는데, 이는 아버지가 아우를 가장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대신 군역을 짊어져 아버지를 편안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정성을 다하여 상을 치렀으며, 아우도 극진히 보살폈다....
-
절개가 높은 여자. 열녀는 일반적으로 위난을 당하여 죽음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또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난과 싸우며 수절하거나 남편을 위해 헌신한 여인을 일컬으며, 열부(烈婦)나 절부(節婦)를 통칭한다. 열녀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과부가 되면 마땅히 수절을 하여야 하고, 위난을 당하면 목숨을 바쳐 정조를 지키는 것이 부녀자의 도리로서 정착된 것은...
-
조선 중기의 열녀 청주한씨의 열행을 기록한 비와 비각. 한응(韓譍)의 딸 청주한씨의 절개를 기념하기 위해 1736년에 세웠고, 1985년에 중건한 정려이다. 1593년 6월 16일, 왜적이 청주한씨를 끌고 가려하였지만, 끝까지 거부하다 자결하였다. 이에 영조가 정려를 내렸다.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리 746-4번지에 있다. 세월이 오래되어 비각이 훼손되자 1985년에 중건하...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리에 있는 열녀의 기념비. 칠원윤씨 문중 여인의 종부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1870년에 건립되었다. 칠원윤씨 돈암공의 5대손부이고 한석건의 부인인 윤씨가 남편이 병으로 숨을 거두자 자신도 곧 따라 죽으니 영조가 정려를 내리게 되었다. 고전적인 기와정려 형태로 8개의 기둥을 사용하여 건축하였으며, 안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마을의 입구에 세운 점과 기와...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에 있는, 김해김씨 부인을 기리는 효열비. 김해김씨의 아들 홍영대가 어머니의 열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1862년에 세웠다. 옛 비석이 풍화되어 글씨를 알아보기 어렵게 되자 1996년에 김해김씨의 후손인 홍학석이 그 옆에 새로운 비를 만들어 현재 나란히 서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 천곡마을 앞산 기슭에 동북향하여 서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에 있는 열부 밀양박씨의 행적을 기리는 비. 황기찬의 처 밀양박씨는 남편이 전라도 지방에 나갔다가 죽자 스스로 남편의 시신을 옮겨와 고향에 묘를 마련하고, 부지런히 일해 자식들을 훌륭히 키웠다. 그 열행을 기리기 위해 자손들이 세웠다.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 함촌마을의 입구 도로변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42㎝, 너비 52㎝,...
-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반지리에 있는 비. 문보현(文寶鉉)의 처인 안동권씨가 시부모에게 행한 효행과 남편에게 행한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받침돌은 드러나 있지 않아 명확히 알 수 없고, 몸돌은 높이 143㎝, 가로 58㎝, 폭 15㎝로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특이한 점은 몸돌 좌우로 장방형의 판석을 세워 머릿돌을 받치고 있다. 비의 제목은 ‘효열부유인안동권씨지비(孝烈婦安...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에 있는 열녀 전주유씨의 정려비. 강엄의 처 전주유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35㎝, 너비 56㎝, 폭 15㎝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몸돌의 좌우에는 장방형의 받침돌을 덧붙여 머릿돌을 받치게 설치하였다. 비문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비의 제목은 「열부유...
-
조선시대의 효자.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오인(吳仁)은 아버지가 등에 커다한 부스럼이 나서 매우 심해져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직접 입으로 농즙(膿汁)을 빨아서 낫게 하였다고 한다. 진주 수곡리(水谷里)에 살았다. 진주는 유교적 덕목이 뿌리 깊게 이어지는 예향(禮鄕)으로 오인을 비롯한 많은 효자를 배출하였다....
-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상미리 기전에 있는 효자비. 아버지가 병이 들어 위독한 상황에 놓이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게 하는 등 정성으로 간호한 오철상의 행적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경상남도 미천면 상미리 기전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귀부를 얹고 높이 134㎝, 너비 47㎝, 두께 15㎝의 몸돌을 세우고, 몸돌 좌우에 장방형의 판석을 세워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
조선 말기의 효자. 본관은 의령. 진주 출신으로 부인은 함안조씨이다. 어릴 때부터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겼다. 아버지가 병으로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맛있는 음식을 구해 병구완을 했다. 어느 날 의령까지 가서 약을 구해 진주로 돌아오는데 밤이 되고 비가 와서 길을 걷기가 힘들었다. 이때 마침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호위하여 인도하였으며, 스님이 나타나 사연을 듣고는...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 초문마을에 있는 재령이씨의 재실. 1987년 초문마을에 살아 온 재령이씨 후손들이 선조들의 덕행을 기리고 본받고자 세운 목조기와형 재실이다.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성실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넉넉한 음식을 차려 놓아도 후손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모아 재를 세우는 일을 하였는데, 이러한 일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떳떳한 삶을...
-
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 쪽 가계는 알 수 없고, 어머니는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보이는 박인(朴氤)의 천첩 후손이다. 사노비(私奴婢)였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매우 슬퍼하면서, 육식을 먹지 않았다. 사람들이 먹기를 권하면 형도 먹지 않는데 내가 어찌 먹겠냐고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3년 동안 그 생활을 유지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
-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서재. 박승임(朴承任)[1517~1586]은 본관은 반남, 자는 중포(重圃), 호는 소고(嘯皐)로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조좌랑 등을 거쳐 정언(正言)을 지내고, 소윤(小尹)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1...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 청원마을에 있는 재령이씨의 재실. 1920년 청원마을에 삶의 터전을 닦아 온 재령이씨의 후손들이 지은 목조기와형 재실이다. 선조들의 덕행을 기리고 본받고자 후손들이 힘을 모아 건립하였다. 청원마을은 재령이씨가 300여년을 세거하던 땅이다. 고전적인 기와집 안채와 바깥채 2채로 건축하였으며, 방의 주변에 마루가 둘러져 있는 식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제...
-
공자(孔子)를 개조(開祖)로 하는 전통시대의 대표적인 사상. 유교의 교리는 곧 인의(仁義)와 도(道)와 수기(修己), 치인(治人)에 귀결된다.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의 오경(五經)과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사서(四書)는 유교의 중요한 경전이다. 공자 이후 유교가 천하에 행하여져 여러 학파와 함께 일어났으나 증자(曾子), 자사(子思)를...
-
경상남도 진주시에 소재하는 유교적 신념을 공동체적으로 구현하는 단체. 조선조는 유교를 국교로 삼아 숭상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의 가르침과 덕목이 일상생활 속에 파고 들어와서 생활화 되었다. 인간의 삶을 규율하는 온갖 형식과 규범치고 유교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유교단체란 유교적 교리에 바탕을 둔 각종 단체로 볼 수 있으며, 그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을...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밀양박씨는 시부모를 잘 봉양하고 남편을 공경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과부가 되었다. 슬하에 어린 아이가 있어 남편을 잃은 애통함을 억제하고 시부모를 위로하면서 30년간 수절하였다. 그동안 음식은 소채로 하고, 의복도 소복으로 하였으며, 세수하지 않고 머리에 빗질도 하지 않았다. 시부모가 중한 병이 들자 그...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의성김씨는 남편 유치덕이 강화에서 객사하자 천리 길을 왕복하여 시신을 짊어지고 돌아와 고산에 안장하였다. 그 후 14년이 지나 남편의 제삿날에 자녀들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남편을 따라 자결할 마음이 간절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어렸기 때문이다. 지금은 장성하여 내가 할 일을 끝냈다.”라 하였고, 제...
-
조선 전기의 열녀. 임진왜란 때 부장(部將)으로 공을 세운 유홍(柳洪)의 딸이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진주성전투 때 왜적에게 붙들렸으나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그 열행이 기록되어 있다.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내렸다....
-
조선 시대의 효자. 윤사관(尹思寬)은 부장(部將) 윤춘란(尹春蘭)의 아들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윤사관이 살고 있던 집에 큰 불이 나서 노모가 방에 있으면서 나오지 못하자 직접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어머니를 업고 나오다가 불꽃에 쓰러져 모자가 함께 죽었다고 한다. 진주 대여촌(代如村)에 살았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파평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천성이 순수하고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잘 섬겼다. 아버지가 종기로 수개월 동안 자리에 누워 있자,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치료했다고 한다. 그리고 꿩과 올빼미 등을 부모가 원하는 대로 올렸다. 부모가 천수를 다하여 세상을 떠나니 상중에도 슬퍼했으며, 비바람이 부는 날에도 성묘를 폐하지...
-
조선 전기의 열녀. 조선 전기의 선비 윤여훈의 처이다. 진주 가좌촌에 살았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의 진주성전투 때 왜적을 만나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내렸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
조선시대의 열녀. 유학자 윤탁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남편인 윤탁이 병이 들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게 함으로서 소생시키는 등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다고 한다. 진주 금산리(琴山里)에 살았다....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고려 장군 강민첨(姜民瞻)의 사당. 강민첨은 고려 전기의 명신 겸 장군으로 본관은 진주, 태어난 곳도 진주이다. 옥봉동의 강민첨 탄생지는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는데, 장군의 위업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1980년대에 사당과 정문, 그리고 재실을 신축, 정화하였다. 은열사는 강민첨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으며, 부속...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월암리에 있는 비. 김춘식의 처인 은진송씨가 부모님께 행한 효행과 남편에게 행한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45㎝, 폭 18.5㎝, 가로 44㎝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올렸다. 비문은 다른 비문과는 달리 몸돌에 장방형으로 비문을 새길 부분을 파서 그 속에 새겨놓은 점이 특징이다. 비의 제목은 ‘은진송씨효열비(恩津宋...
-
조선 전기의 효자. 아버지는 참봉 이일민(李逸民)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아버지가 중풍을 앓아서 한쪽 발이 불편하였는데, 언제나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아버지를 업고 산에 숨었는데, 아버지가 적에게 발견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자신의 몸을 던져 적과 함께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
-
조선 전기의 열녀. 효자 이경훈(李敬訓)의 아내이다. 진주 대여촌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남편과 함께 산골 깊이 피난하다 산골을 마구 뒤지던 왜적에게 붙들리게 되었다. 남편은 그 자리에서 무참히 살해되고 자색이 아름다운 부인은 그들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데 달탄(達灘)에 이르렀을 때 왜적의 눈을 피해 강물에 몸을 날려 절개를 지키고 죽었다. 숙종 때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진양...
-
조선 후기의 열녀. 남편은 이광림(李光臨)이고, 아버지는 고응추(高應樞)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장흥고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집안 식구에게 말하기를 “여자가 순종해야 할 세 가지 길이 있는데, 나는 따라야 할 자식이 없으니 남편을 따라서 죽는 것이 옳다. 내가 죽거든 남편과 같이 장사지내 달라.” 하고 목을 매어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전의(全義). 자(字)는 진여(進汝), 호는 구와(懼窩). 아버지는 이만조(李滿肇), 형은 이광림(李光臨), 동생은 이광국(李光國)이다. 진사에 올라 문장에 능했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승순(承順)에 어김이 없었다. 여덟 살에 처음으로 학문을 시작하면서 “사람은 다시 소년이 될 수 없다”는 구절을 읽고서는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울었다고 한다....
-
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가 돌아가자 3년 동안 죽만 먹으며 크게 슬퍼하였는데, 결국 몸이 쇠약해져 거의 실성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진주 백곡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전주최씨는 1719년(숙종 45)에 남편 이덕유(李德裕)가 세상을 떠나자, 같이 죽을 것을 맹세하고 스스로 상복을 입고 독을 마시고 자진하였다. 5년 뒤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
일제강점기 때의 일본인 교장 이마무라의 송덕을 기려 세운 비. 일본인 이마무라 다다오[금촌충부]는 1925년 5월 8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진주농업학교(후의 진주산업대학교)에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1937년 6월 12일 진주농업학교 교정에서 경상남도지사와 하동군수 등 기관단체장과 유력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마무라 교장의 송덕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는데, 그 연유는 그가 교...
-
조선 전기의 열녀. 의금부도사인 이번(李蕃)의 아내이다. 진주 운곡리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부딪혀 싸우다 죽음으로써 그 고귀한 절개를 지켰다. 숙종 때 이르러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함안인(咸安人) 이상립(李相立)이고, 아버지는 강태관(姜泰館)이다. 진주강씨는 어려서부터 품행이 정숙하고 총명하였다.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이상립이 우연히 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에 이르자 백방으로 조치하고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으나 마침내 세상을 하직했다. 강씨는 곧바로 약을 먹고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는데, 25세의 젊은 나이였다. 이 일이 알려...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재령. 할아버지는 현감 이공보(李公輔), 아버지는 이득분(李得賁), 남편은 이유성(李惟誠)이다. 진주 초문에 살았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고, 시집가서도 부인의 도리를 잘 지키면서 시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다. 지아비가 죽자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빈소에서 16일 동안 엎드려 쌀알 하나도 목으로 넘기지 않았다. 3년상을 치르고 난 후 3년을...
-
조선 전기의 열녀. 이유해의 아내이다. 진주 종화리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하여 집현산으로 숨었는데 뜻하지 않게 왜적을 만나게 되었다. 왜적은 하씨를 억지로 자기의 말 위로 끌어 올렸다. 잠자코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물을 건너게 되었다. 그 강의 절반쯤에 이르렀을 때 업고 있던 아기와 함께 몸을 날려 강물에 빠져 죽었다. 하씨는 뛰어난 미인이었던 터라 왜적은 그 죽은 것을...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정씨는 15세의 나이에 남편 이인호가 요절하자, 오히려 시부모를 위로하고 조금도 비통해하는 빛이 없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남편의 뒤를 따라 자진하려 했다. 진양정씨의 부모가 그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개가를 시키려 하자 가만히 방으로 들어가 자결하였다. 이에 향인들이 진양정씨의 열행을 가상히 여겨 비를 세...
-
조선 후기의 효부. 본관은 재령. 이중광(李重光)의 딸이며, 한시회(韓時晦)의 부인이다. 시부모를 섬기는데 지극한 효성으로 하였다. 시부모가 돌아가자 친정으로 와서 부모를 섬김에 또 효성을 다하였다. 나이 70이 되었어도 의복과 음식을 친히 마련하였으며 부모가 돌아가자 3년상을 치렀다. 숙종 대에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복호(復戶)를 주고 숙부인(淑夫人)을 증여하였다. 『진양속지(晋...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함안이씨 나이 16세에 남편이 중한 병에 걸려 요절하였다. 함안이씨는 이를 깨물고 스스로 맹세하더니 마침내 식음을 전폐하고, 요절한 남편을 따라 생을 마쳤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함안이씨의 열행을 기려 비석을 세웠다....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안동권씨는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잡혀가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호랑이를 향해 크게 소리치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대항하는 등 기지를 발휘하여 시아버지를 구했다. 이 일이 숙종조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신씨는 16세의 나이에 시집을 갔는데, 다음해에 남편 이충엽이 요절하자, 염습의 준비와 장례 음식을 몸소 다하였다. 어느 날, 부실(副室) 김씨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고 자식도 없는데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라 하고 눈물을 흘리니 듣는 사람 역시 또한 슬퍼했다. 부실 김씨는 이때부터...
-
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재령. 아버지는 이태로(李台老)이다. 하응림(河應霖)의 아내로 일찍이 남편을 잃고 시아버지를 홀로 봉양하며 살았다. 늘 남편의 후사가 없는 것을 한탄하다가 남편의 기일을 맞아 제사를 지내고 곡을 하고는 자결하였다. 효열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받았다. 『삼강록(三綱錄)』에 실렸고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녀조(烈女條)」에도 이름이 올랐다....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자중(子中). 이공청(李公淸)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강개하고 조행(操行)이 있었다. 극진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겨, 비록 전란으로 피난해야 할 상황에서도 반드시 그 예를 다하였다. 불행히도 일찍이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진주 대여촌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중기의 효부, 열녀. 매헌(梅軒) 이인형(李仁亨)의 자부이며, 이핵(李翮)의 처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딸이다. 14세 때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어머니에게 마시게 하여 중병을 낫게 하였다. 시집와서는 시부모 섬김에 있어서 지성이었으며, 남편이 죽자 뒤따라 자결하였다. 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고 진주 가좌촌(嘉佐村)에다 효열부 정문을 세웠다. 현재 경상남도 진...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재령. 자는 이문(以聞), 호는 제헌(霽軒).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의 후예로, 할아버지는 이강, 아버지는 이중복이다. 어버이가 병들었을 때 변을 맛보아 가며 보살피고, 하늘에 쾌차를 빌었다. 상을 당했을 때에는 여묘에서 제를 마쳤다. 이러한 행실로 인해 향리에서 유학의 실천이 우수하다는 평을 들었다. 특히 이형의 행장에는 ‘품성이 강직하고 행동이 바...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용선(庸善), 호는 사가(四可).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의 후손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형제간의 우애 또한 매우 돈독하여 어버이의 뜻을 어기는 바가 없었다. 어머니가 이질에 걸려 몇 달을 병석에서 신음하자 하늘에 오래 사시기를 빌면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으로 마시게 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에는 재산을 기울여 명당을 구하였고,...
-
통덕랑(通德郞) 강운(姜沄)의 처인 인천이씨의 열행(烈行)을 기린 비각. 인천이씨(仁川李氏)는 당시 효자이던 좌통례(左通禮) 이교(李郊)의 딸이다. 나이 20세에 강운에게 시집왔는데, 24세에 남편의 상을 당했다. 인천이씨는 그 뒤 평생 동안 매운 음식을 먹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았으며, 머리도 빗지 않고 불편한 생활을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곡을 하면서 상을 당하였을 때와...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 청원마을에 있는 재령이씨의 정자. 이이로(李彛老)가 증조부 송재공(松齋公)을 위해 지은 목조기와형으로 지은 정자이다. 손자인 이기환이 후에 이건하여 현재의 위치에 이 정자를 두었는데, 초기에 건축한 장소가 가파르고 땅이 비좁아 불편한 점이 그 이유였다. 후손들이 뜻을 같이하는 지인들과 더불어 학문을 연마하고 심신을 수양하는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어옥리에 있는 비. 효자 임병태가 행한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어옥리에 있는 미천초등학교 옆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80㎝, 너비 60㎝, 두께 15㎝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문은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비의 제목은 ‘효자나주임공병태행적비(孝子羅州林公炳泰行蹟碑)’로 효자 임병태의 행적이...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 있었던 서원. 조선 숙종 28년(1702)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창주(滄州) 하증(河憕),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 등 다섯 분의 학문과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의견을 모아 창건하였다. 그 가운데 하증은 어머니 진주강씨 부인이 왜놈에게 항절하다 죽음을 당하였기 때...
-
조선 전기의 열녀. 수군 장억수(張億守)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왜군에 맞서 절개를 지키다 죽었는데, 이 일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월아리에 있는 진양정씨의 효행을 기리는 비. 진양정씨의 5세손 장춘원(張春源)과 6세손 장진의(張振義)가 중심이 되어 1942년에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월아리 마을회관 옆에 남향으로 있다. 거북받침돌에 높이 141㎝, 폭 53㎝, 두께 23㎝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머릿돌 중앙에는 태극문양 조각이 있다. 비의 제목은 ‘유인진...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장한우(張翰佑)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나이 18세 되던 해에 결혼하였는데 시댁에 가기도 전에 남편이 요절하였다. 김씨는 머리를 풀고 달려가서 애통해 하더니 성복하는 날에 칼을 물고 엎드려 남편의 뒤를 따르니, 고을 인사들이 비를 세워 김해김씨의 열행을 기렸다....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길재(吉哉), 호는 남호(南湖). 공대공(恭戴公) 정척(鄭陟)의 후손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얼굴이 곱고 기상이 맑으며 경전(經傳)을 널리 연구하고 겉으로 백가(百家)에 통달하였다. 종일토록 책상을 대하고 사색에 잠겼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효심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병에 걸리어 낫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니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단을 모아 하늘에...
-
조선 전기의 열녀. 첨지(僉知) 정계원(鄭繼元)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 에 의하면,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항절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가 피란했을 때에 그의 남편에게 말하기를 "적을 만나 정절을 잃게 되면 나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라 하여 죽음으로서 정절을 지킨다는 뜻을 평소에 정했던 것이다. 진주 정촌(鼎村)에 살았다. 선조 때 항절이 알려져...
-
조선 전기의 효녀·열부. 비록 천한 출신이었으나 효심이 남달라 임진왜란의 난리 속에서도 늙은 어머니의 병을 지성으로 돌보았고, 세상을 떠나자 오래도록 어머니를 사모해 맛있는 음식이 생겨도 먹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때마침 언니와 함께 피난을 갔는데, 언니가 역질에 걸려 걷지 못하므로 그를 업고 30리길을 달려서 마침내 낫게 하였다. 또한 남편에게도 착실하여 모두 칭송하였다. 『진...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백유(伯裕). 참봉 정석찬(鄭碩贊)의 아들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함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정엄(鄭嚴), 정교(鄭敎) 두 아우가 모두 명성을 얻어 이름이 났으나 과거는 여러 번 실패하여 합격하지 못하였다. 봉화훈도(奉化訓導)를 지냈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양. 자는 성약(聖若).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손이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하였고 어버이를 섬김에 그 성효(誠孝)를 다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정규로는 나이 겨우 17세에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끊어 잠시 회생시켰다. 겨우 5일이 지나고서 아버지가 또 갑자기 병들어 양우(兩憂: 부상과 모상)를...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성산이씨는 본래 성품이 착하고 효성스러웠는데, 남편 정규로가 병이 들자, 집이 가난한 탓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돈을 마련하여 약을 구했다. 또 남편 대신 자신이 죽기를 하늘에 기원했다. 마침내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예로서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침실로 들어가 자진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
조선 전기의 열녀. 강세승(姜世昇)의 딸로, 충의공(忠毅公) 정기룡(鄭起龍)의 아내이다. 임진왜란 이듬해 적을 피해 진주성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적삼에 혈서를 써서 남편에게 죽음을 고하고, 시어머니, 시누이와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공약(功若), 호는 관란(觀瀾). 승지(承旨) 정대융(鄭大隆)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정달현(鄭達賢)은 효성이 깊다고 이름이 나서 나라에서 교관(敎官)을 증직하고 정려(旌閭)를 명하였다고 한다....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행지(行之), 호는 모렴(慕濂).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후손이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머니의 상중일 때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치도록 죽과 밥을 들지 않고 보릿가루를 물에 타 마셨다. 새벽과 저녁으로 묘에서 곡한 뒤 냇물을 건너 수 리나 떨어져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 보살펴 드렸다. 이 일을 비록 추울 겨울일지라도 그치지 않고 지성으로...
-
조선시대의 효자·선비. 자는 거원(巨源)으로,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둘째 아들이다. 황암(崲岩) 박제인(朴齊仁)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아 짧은 기간에 학문을 성취할 수 있었다. 나이 28세 때 어머니 상을 당하자 슬퍼함이 예를 넘어서 병이 들 지경이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감찰(監察)을 추증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고려 후기의 열녀. 영암의 선비 최인우(崔仁佑)의 딸로서, 주(州)의 호장(戶長) 정만(鄭滿)의 부인이었다. 1379년에 정만이 일로 인하여 서울에 갔더니 적이 마을에 들어왔다. 적이 최씨에게 칼을 들이대고 협박하므로 나무를 안고 막다가 화를 내며 적들을 꾸짖고 죽었다. 1389년에 도찰사(都察使) 장하(張夏)가 조정에 최씨의 열행을 알려 정문(旌門)을 명령하고 아들 정습(鄭習)에...
-
조선 전기의 효자. 고려 때 사정(司正)을 지냈다. 묘를 대동(大同)에서 지키며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청송심씨는 남편 정문혁이 병에 걸려 수개월을 간병하였으나 위독한 지경에 이르자, 도끼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게 하였다. 그러나 소생의 기미가 없자 기절했다가 곧 일어났다. 이에 시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자식이 노모를 버리고 갔는데 애통하여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 하고 미음을 만들어 드렸다. 이...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해주. 자는 화백(華伯). 정유기(鄭有祺)의 증손이고, 농포 정문부(鄭文孚)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천성이 곧고 행실이 고결(高潔)하였다. 아우 정규(鄭珪), 정목(鄭睦)과 더불어 어버이를 섬김에 지성을 다하였다. 거상에는 여묘(廬墓)로 제(制)를 마쳤다....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이천리에 있는 남원양씨의 효행을 기리는 비. 남원양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진성면 유림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이천리 도동마을 남쪽 어귀 경전선 철길 건널목 근처에 동북향으로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에 높이 162㎝, 폭 55㎝, 두께 27㎝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의 제목은 “효부정유인남원양씨비(孝婦鄭孺人南原...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해주. 자는 극명(克明), 호는 무호옹(無號翁).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후예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스럽고 형을 받드는 데에는 우애로웠다. 정빈의의 형이 안주(安州)의 임소(任所)에 있을 때에 갑자기 풍비증(豊痺症) 때문에 여러 달 동안 고통이 심했다. 정빈의가 산에 올라가서 백일 동안 기...
-
조선 전기의 열녀. 유학 정삼성(鄭三省)의 처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모녀(母女)가 함께 절개를 지키다가 죽었다. 진주 영이곡(永耳谷)에 살았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남편 정상규(鄭翔圭)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그러자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물고기가 잡히거나, 꿩이 집안으로 날라 오는 등 기이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고, 단계(端溪) 김인섭(金麟燮)[1827~1903]이 정려기를 찬하였다...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함안조씨는 홀로된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남편에게는 매우 공경히 대하였다. 남편 정상천(鄭相天)이 죽음에 직면하자, 손수 송별사를 시어머니와 본가에 써서 두고 얼마 후 조용히 남편 뒤를 따라 세상을 하직하였다. 숙종 때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되었고, 정언(正言) 이약렬(李若烈)이 정려문을 찬하였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임경(林卿), 호는 원재(源齋)이다. 어릴 때부터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부모(父母)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더우면 베개머리에서 부채질하고, 추우면 더운 이불을 덮었으며, 밖에 나가서 고기나 과일을 얻으면 반드시 품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서 어버이에게 드리었다. 밤에는 책을 읽고 낮에는 땔감을 베었으며 항상 맛있는 음식으...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최씨는 어려서부터 심성이 착하고 효성스러웠는데, 18세에 시집가서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다. 남편 정세현(鄭世鉉)이 병을 얻어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울면서 시어머니께 이르기를 “지아비가 죽으면 지어미는 따르는 것이 도리이니 맹세코 장차 같이 갈 것입니다.”라고 하고 손가락을 잘라 입에 대어 넣고, 하늘에 빌...
-
고려 말의 효자. 정유(鄭兪)와 더불어 지선주사(知善州事) 정임덕(鄭任德)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에 아버지를 따라 하동군(河東郡)을 지키고 있었는데, 왜병이 밤을 타 갑자기 쳐들어 왔다. 이때 많은 무리들은 모두 도망쳐 달아났으나 정임덕은 병이 들어 말을 탈 수가 없었다. 이에 정손과 정유 두 형제가 아버지를 붙들어 끼고 달리는데 적이 뒤쫓아 왔다. 정유가 말을 타고 수십 인을 쏘...
-
조선시대의 효자. 현감 정세창(鄭世昌)의 아들로, 형은 정인평(鄭仁平)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정순평은 만년이 되어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애통해하며 죽만 마시다가 상중에 죽었다. 진주 진성리에 살았다....
-
조선 전기의 열녀. 전주최씨 최운개(崔云凱)의 딸로, 진주인 승사랑(承仕郞) 정승업(鄭承業)의 아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칼을 차고 스스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만일 불행한 일을 만나게 되면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 죽음을 결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를 넘겨 1593년에 왜적이 이웃 마을을 핍박하여 거의 모두 죽기에...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한명(漢明), 호는 소헌(素軒). 동오(東塢) 정우교(鄭佑敎)의 아들이다. 진주 가곡(佳谷)에 살았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모친상을 당해 슬픔이 도를 넘었고, 날마다 반드시 묘(墓) 앞에 문안인사를 하고는 피눈물을 흘리어 옷깃이 썩었다. 이웃이 그 효성에 감동해 글을 주목(州牧)에게 올렸으나 조정에 보고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수백(壽伯).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증손이다.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을 날렸으나 문과에는 실패하고 무과에 급제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어 어머니의 병환 때에는 귀한 물고기와 산삼을 구해 병을 고쳐 드렸고,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죽으로만 3년을 연명하며 예를 다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복하여 경상감사에게 알려 세금...
-
조선시대의 효자. 자(字)는 수백(壽伯). 필한(筆翰)이 정묘(精妙)하였으나 여러 번 문과에서 낙방하고 무과에 급제하였다. 어머니의 병이 4년을 계속되자 변을 맛보아 가며 그 차도를 징험하였고 눈 속에서 고기를 얻고 영산(靈山)에서 삼(蔘)을 얻으니 신명(神明)의 감응이 있은 것이었다.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죽만 마셨고 슬픔을 하루와 같이 하였다. 향리에서 그 효행에 감탄하여...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연(子淵).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에 유순하여 부모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병들었을 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 하루 동안 회생해 있도록 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슬픔으로 예를 다하니 향리에서 이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진주 가곡(佳谷)에 살았다....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원경(源卿), 호는 일재(一齋).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천성적으로 신중하고 과묵하며, 학식이 풍부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성실하게 지체(肢體)의 봉양을 다하였다. 부친이 마비를 앓아 7년이나 병상에 누워있을 때에도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부친의 몸을 닦아주고, 변기를 몸소 세척하여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아니하였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나이 22세가 되던 해에 시집을 갔는데 남편 정연항(鄭蓮恒)이 14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부모가 김해김씨를 가엾게 여겨 다시 시집보내려 하자 금약을 마시고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윤원(允元), 호는 모재(慕齋).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성품이 침중하였으며,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학질을 앓았다. 새벽마다 어머니가 쾌차하시기를 빌었더니 홀연히 새매가 메추리를 떨어뜨렸다. 이를 세 번에 걸쳐 드리니 어머니의 병이 드디어 나았다. 나이 34세에 병사하자 그 아우 정낙균이 형의 죽음을 슬...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금곡리 구계 부락에 있는 열녀 정운창 처 이씨의 행적을 기념하는 효열비(孝烈碑). 병든 남편을 정성껏 간호한 정운창 처 이씨의 효열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운표의 주도 하에 1936년에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금곡리 구계마을 건너편 도로변에 서쪽을 향해 세워져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15㎝, 폭 37㎝, 두께 19㎝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재령이씨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대신 전처 소생의 딸이 있었다. 남편이 병에 걸려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이고, 하늘에 남편의 쾌유를 기원했다. 남편 정운창(鄭運昌)은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고 늙은 시부모와 전처의 딸, 그리고 후사를 들여 종가를 이을 것을 부인에게 부탁하였다. 재...
-
고려 후기의 효자. 선산군수를 지낸 정임덕(鄭任德)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아버지의 임지인 하동에서 동생과 함께 변경 수비 임무를 맡고 있었다. 때마침 왜구가 갑자기 침입하자 동생 정손(鄭愻)과 함께 병석에 있는 아버지를 호위하여 모시고 피란 갈 때 왜구들이 뒤쫓아 와 해치려 하자, 말을 달려 공격을 하며 사력을 다해 물리쳤다. 그러나 동생 정손은 적의 칼에 찔려 젊은 나이에 죽었...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해주. 자는 후지(厚之), 호는 역효당(亦囂堂). 정대륭의 후손이며 정상점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이학(理學)에 잠심(潛心)하여 세상에서 명유(名儒)라 일컬었으며, 효행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고 정려(旌閭)를 받았다....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에 있는, 동몽교관 역효당(亦囂堂) 정육의 효행을 기록하여 세운 정려비. 정식명칭은 ‘동몽교관조봉대부역효당정효비(童蒙敎官朝奉大夫亦囂堂旌孝碑)’로, 1892년(고종 29) 고종황제가 효자 정육의 효행을 기려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하고 정려를 내린 내용을 새긴 비이다. 정육의 5세손 정영석이 나라로부터 정려를 받은 은덕을 드러내고자 1942년 임오년 청...
-
조선 후기의 열녀. 남편은 정은교(鄭誾敎)이고, 아버지는 임노헌(林魯憲)이다. 평택임씨는 시어머니가 민물고기를 좋아하므로 하늘에 기원을 올려 한 자 크기의 물고기를 구했으며, 남편이 중한 병에 걸렸을 때도 하늘에 기원을 올려 남편이 쾌차하였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전기를 찬술하였다....
-
조선 전기의 열녀. 진주 금산리에 살았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남편 정응발(鄭應發)이 왜적을 만나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거의 죽게 되었는데 황씨가 풀숲 속에서 나와서 돌을 안고 돌진하여 남편을 구하였다고 한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전기의 효자. 진주 대평에 살았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죽만 먹고 지냈으며 제사를 모실 때는 예로써 하였다. 또 명종 승하 시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진양지(晋陽誌)』 권3 「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시대의 효자. 현감을 지낸 생원(生員) 정세창(鄭世昌)의 아들이다. 진주 진성리에 살았다. 나이가 들어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슬픔에 몸이 상할 정도였으며, 죽만 먹어 겨우 연명하였다. 아우인 만호(萬戶) 정순평(鄭順平)도 역시 죽으로 연명하다가 상중에 죽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시대의 효자. 진주 성태동(省台洞)에 살았다. 그 어머니와 함께 밤중에 방아를 찧던 중 어머니가 범에게 물려가게 되자 절구공이를 가지고 급히 쫓아가서 위험에 처한 어머니를 구했다고 한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김해허씨는 일찍 남편을 잃어 후사가 없었고, 또한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정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모셨다. 어느 날 병상에 누워있던 시아버지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여 하늘에 빌자, 얼마 후 꿩이 갑자기 날아들어 처마 밑으로 들어왔다. 이를 잡아 만든 꿩 요리를 시아버지께 올렸더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리고...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해주인 정창석(鄭昌錫)이고, 아버지는 이시영(李時榮)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합천이씨는 남편 정창석이 병이 들어 죽었으나, 나이 서른에 가깝도록 자녀가 없는 것을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 또 관에 넣을 물건들을 손수 챙기고, 남편의 형에게 부촉하여 남편의 후사를 정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밤에 남편의 시신이 있는 방에...
-
조선 전기의 열녀. 수문장을 지낸 정천계(鄭天啓)의 아내로, 진주 송곡리(松谷里)에 살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그의 딸이 곁에 있다가 스스로 못에 빠져 죽었는데, 그때 나이 16세였다. 후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되었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군성(軍聖), 호는 가헌(稼軒).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후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머니가 병으로 십여 년을 누워 지냈다. 동생 정석기(鄭碩基)와 함께 지성으로 간호하며 매서운 추위와 혹심한 더위에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빨래까지도 아내나 가족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하였다. 정성을 다하여 보살핀 결과 어머니의 병이 점점 좋...
-
조선시대의 효자. 진사 정대호(鄭大護)의 아들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어머니가 병들어 점점 심해지니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올리는 등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해주. 자는 옥여(玉汝), 호는 만성재(晩省齋)·부암(敷庵). 승지 정대륭(鄭大隆)의 후손이다. 진주시 용암리 출신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동몽교관을 증직받고 정려(旌閭)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전기의 열녀. 유학(幼學) 정훈(鄭薰)의 처이다. 진주 설매곡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남편 정훈이 적에게 살해당하고, 적병들이 이씨를 욕보이려고 하자 두려워하지 않고 적에게 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선조 조에 행적이 알려져 정려되었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시대의 열녀. 현감인 정희건(鄭希騫)의 첩이다. 진주 대여촌에 살았다. 정희건이 경성에서 벼슬을 하게 되자 성씨에게 글을 보내어 인연을 끊자고 하였다. 문족들이 그녀의 나이 어린 것을 가련하게 여겨 다른 이를 따르라고 권하였으나 죽을 때까지 절개를 지켰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전기의 열녀. 정희립(鄭希立)의 처이다. 진주 가귀곡리에 살았다. 정유재란 때 적군에 쫓기어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낭떠러지에서 스스로 떨어져 목숨을 끊고 정절을 지켰다. 마을에 정려문이 세워졌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전기의 열녀. 생원 정변소(鄭卞韶)의 딸이며, 정희성(鄭希聖)의 처이다. 진주 주내에 살았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될 때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적을 꾸짖으며 의연히 죽어 정절을 지켰다. 정려문이 세워졌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부계리 화광마을에 있는 효자비. 제유해(諸維解)는 어머니 정씨가 생선가시가 목에 걸리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토해 내게 하였고, 돌아간 후에는 생선(도미) 요리를 절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행적이 알려져 나라로부터 포상을 받았고, 제유해의 아들이 이를 기념하게 위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부계리 화광마을의 대로변에...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남평문씨는 정조 때 남편 조경진(趙經鎭)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돌을 품고 강물로 투신하여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고, 훗날 사람들이 강씨부인의 열행을 기려 강 위의 돌에 열녀암이라고 새겼다고 한다....
-
조선 후기의 선비·효자. 본관은 함안. 자는 인수(仁叟), 호는 횡구(橫溝). 아버지는 동몽교관에 증직된 조광식(趙匡植)이며, 어머니는 김해김씨로 김석신(金錫信)의 딸이다. 자신의 호는 중국 북송 때 사상가 장횡거(張橫渠)의 ‘횡(橫)’자와 옛날 유방과 항우가 힘을 겨루었던 역사의 현장인 홍구(鴻溝) 땅 이름의 ‘구(溝)’자를 따서 지었다. 장횡거는 왕안석(王安石)과 뜻이 맞지 않...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는 천성이 착하고 효성스러웠는데, 시집가서는 홀로된 시어머니를 부모를 섬기듯이 잘 모셨다. 남편 조용한이 병이 들자, 진양강씨는 자신이 대신 죽기를 하늘에 기원하며 남편을 간호했다. 남편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 가족들이 진양강씨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기원하던 장소에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고 한다....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남편 조용화(趙鏞和)가 죽자 염하는 날에 자신도 따라 자진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되었고,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정려문을 찬하였다....
-
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강양이씨는 18세 되던 때에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남편 조윤(曺玧)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시댁에 도착하였으나, 남편은 이미 염한 뒤였다. 남편의 장례를 예로써 다한 뒤, 식음을 끊은 지 7일 만에 조용히 자진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 1832년(순조 32)에 정려가 내려졌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함안인 조인제(趙麟濟)이고, 아버지는 사인 하정식(河廷植)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하고 효성스러웠는데, 10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자 매우 애통해 하였고, 아버지가 낙상을 하여 여러 달을 자리에 누워 있자, 밤낮으로 그 곁을 지키면서 정성껏 간병하였다. 15세 되던 해에 시집을 갔으나 그...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재령이씨는 결혼한 지 겨우 1년 만에 남편이 중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못했다.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임신 중이었으므로, ‘천행으로 아들을 낳으면 대가 이어지는 것이지만, 만약 딸을 낳으면 남편의 뒤를 따라 갈 것이다’라 하였다. 해산하니 과연 딸이어서 남...
-
조선 전기의 열녀. 승지(承旨) 조지서의 아내이다. 1505년에 남편이 죽고 재물과 집이 전몰되자 정씨는 그 곁에 여막을 짓고 남편의 유의를 걸어놓고 제사를 올리면서 3년상을 치렀다. 1507년(중종 2)에 정려되었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에 있는 재령이씨의 정사(精舍). 미암공(薇庵公)의 아들 이종호·이일호가 선친을 기리기 위해 1938년에 목조기와형으로 지은 수학(修學)과 수행(修行)의 장소이다. 청원마을의 한 지명인 죽동을 따라 죽동정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종호와 이일호가 지은 목조기와형 수학 수행처이다. 미암공은 학문에 독실하고 의리 있는 행동을 중요시하는 선비여서 마을 사람들로...
-
조선시대의 효자. 사노(私奴)였다. 어머니가 나이 들자 봉양하는데 효성을 다하였고, 돌아가시자 장사에 정성을 다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는 사죽리(沙竹里)에 살았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군성(君聖).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가 병들매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소생시켰다. 상을 당해서 시묘살이를 하던 중, 들에 불이 나서 온 골짜기가 다 타고 묘소와 여막까지 불에 탈 위기에 처했으나 돌연 바람이 둘러져서 불이 저절로 꺼졌다 한다. 고종 때 정려(旌閭)되었으며,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에 있는 비각. 경주김씨 김옥(金鈺)과 그 어머니 능성구씨(陵城具氏)의 열행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겸 비각이다. 김옥이 18세 때 아버지 김병규(金炳規)가 서울 관사에서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모셔오던 중 혼절하므로 자기 손가락의 피를 내어 소생케 하였고, 그 후 마침내 별세하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극진히 모셨다. 1870년(고...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가진리에 있는, 김진의 처 진양강씨의 정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진양강씨의 남편인 김진이 왜적에게 화를 당하자 왜적 13명을 죽이고 자결한 진양강씨에게 내린 정려로, 1868년(고종 5)에 건립하였다. 맞배지붕의 기와집에 정면과 측면 각각 1칸이다. 좌우와 뒷면은 벽을 설치하고 전면은 목창살벽을 하였다. 내부에는 정려기와 정려판이 걸려 있으...
-
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양초(養初). 청백리 진유(陳猷)의 증손이며, 백곡(栢谷) 진극경(陳克敬)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힘써 배우는 데 뜻을 두었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자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약으로 드렸으나 홀연히 돌아가시자 3년상을 치르면서 돌을 스스로 날라다가 무덤가에 화성(火城)을 쌓아, 불이 나도 옮겨 붙지 못하게 하였다....
-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고려 초기의 서원.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계원리에 위치한다. 기문에 의하면 처음에 홍복사(洪福寺)로 건립되었으나, 1747년(영조 23) 홍지암(洪池庵)으로 개칭되었다. 홍지암 상량문에는 1891년(고종 28) 중수한 기록과 모원재(慕遠齋)로 개칭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부터 남양홍씨 문중에서 재실로 사용하였다. 1976년에 영남유림에서 이곳을 광제...
-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에 위치한 서원. 1919년 지방의 유림들이 중건할 당시 경주에 있는 서악서원의 이름을 본 떠 남악서원이라고 명명했다. 남악서원(南岳書院)이 처음 지어진 것은 680년경의 일이라고 하며, 1922년 지방 유림들이 중건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전략상 요지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신령을 만나 삼국통일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해...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에 있는 서원. 1610년(광해군 2)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인 하항(河沆)을 모시기 위해 대각사를 세웠다. 이후 손천우, 하응도, 김대명, 이정, 유종지, 하수일 등 일곱 명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1869년(고종 6)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8년 복원하여 오늘에...
-
경상남도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에 있는 재실. 공자를 중심으로 주자와 안자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1889년에 창설하여 공자를 주벽(主壁)으로 주자를 배향(配享)하고 안자를 종향(從享)하고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8월 27일 공부자 탄신일에 제향(祭享)을 행하고 있다. 원래 대평면 하촌리 547-2번지에 소재...
-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신풍리에 있는 창원황씨(昌原黃氏) 재실. 동산재는 1680년에 창원황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제를 지낸다. 내부에는 황석기(黃石奇), 황상(黃裳), 황준(黃濬), 황윤의(黃允義), 황우(黃瑀), 황여필(黃汝弼)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된 재실이다. 창원황씨의 경우 시중공파·소장공파·공희공파 등...
-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효자인 모순(牟恂)의 정려비. 모순은 진주모씨로 호는 절강이다. 조선 1417년(태종 17)의 식년친시(式年親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사간을 지냈다. 세조 때 진주로 와 살았다. 일찍이 효행이 지극하였는데, 모친상을 당하여 상여가 강을 건너지 못하자 하늘에 통곡하니 흐르는 물이 중단되었다. 마침내 강을 건너 장례를 치렀고, 이 때문에 호를 절강이라...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加芳里)에 있는 조선 중기의 누각(누정) 건물.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慶尙右道) 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닦던 장소였다. 부사정(浮査亭)의 ‘부사(浮査)’는 부사 또는 야로(野老)로 불려지던 성여신(成汝信)[1546~1632]의 호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성여신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야로로 남명 조식(曺植) 선생의 문...
-
경상남도 진주시의 비봉산에 있는 누각. 비봉산 아래에 위치하여 비봉루라는 명칭이 붙여졌을 것이라는 추측 뿐 별 다른 명칭유래는 없다. 비봉루는 고려 말의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장구지소(杖求之所: 지팡이와 짚신을 놓아두었던 곳)여서 정몽주의 후손인 정상진이 1939년에 누각을 지은 것이다. 비봉루는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 887-1[창렬로 205-...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에 있는 서재. 우곡정은 고려 말의 문신 우곡 정온(鄭溫)이 은거하였던 곳이다. 정온은 진주정씨로 대사헌을 지냈으며,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두문동과 지리산 청학동에 은거하다가 조선 태조 2년(1393) 이곳 진주에 서재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우곡정이라 하였다. 정온은 앞뜰에 못을 파고 백일홍나무 여섯 그루를 심고 불사이군(不事二君)...
-
임진왜란 때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의기 논개(論介)의 사당. 의기사는 1721년(경종 원년)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이 진주지역민 등의 요구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을 근거로 논개에 대한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였고, 1740년(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건립되었다. 1779년(정조 3)에 경상우병사 홍화보(洪和輔)가 낡고 부서...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사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등 39위와 모든 군졸의 신위를 안치하기 위하여 1595년 경상감사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였다. 1607년 창렬사라 사액되었고, 1712년(숙종 38) 병사 최진한(崔鎭漢)에 의하여 중수되었다. 김시민 목...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117[용암길 59-2]에 있는 사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본래 귀곡동에 있었는데, 1995년 남강댐 공사로 인하여 현재의 장소로 이건하였다. 정문부는 호가 농포(農圃)로, 함경도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길주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그 전공으로 길주목사가 되었다. 왜란...
-
진주강씨 부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비각. 진주강씨는 임진왜란 때의 첨사 김진(金震)의 처이다.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 때 남편이 왜적에게 화를 당하자 칼로 왜적 13명을 죽이고 자결하였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정려를 내렸다. 정려문은 1868년(고종 5)에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가진리 744-1번지에 있다. ‘경렬문(景烈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향교. 교육 도시 진주의 오랜 명성을 잘 말해 주는 관학 교육기관이다.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다. 987년(고려 성종 6) 의곡사 계곡에 향학당(鄕學堂)으로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 232-1번지[경상남도 진주시 향교로 99-3]에 소재하고 있다. 1011년(고려 현종 2)에 중수(重修) 및 서재가 중건되었고, 수학원(修學院)·...
-
조선시대의 효자. 어머니가 병이 들자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병든 어머니의 몸을 씻기고, 어머니의 쾌유를 위해 정성을 다해 하늘에 빌었다. 끝내 어머니가 돌아가자 크게 애통해 하였고, 예를 다해 장사를 지냈으며, 여묘에서 미음을 먹는 등 정성을 다했다. 진주 설매리(雪梅里)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전기의 열녀. 노비인 채학의 아내였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1597년 정유재란 중에 절개를 지키다 죽었고, 인조 대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진주 영선리에 살았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천사국(千思國)이고, 아버지는 전성덕(全成德)이다. 현모양처의 기품이 남달라 시부모와 남편을 잘 공경하고 모셨다. 시아버지의 성격이 엄하였으나 이를 잘 받들어 효성으로 모셨고, 병이 들어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성껏 간호했다. 시어머니 상을 당하였을 때는 매우 애통해 했다. 이와 같은 경산전씨의 열행은 마을에 알려져 주위 사람들이 여러...
-
조선시대의 열부. 남편은 천사택(千思澤)이고, 아버지는 박헌형(朴憲衡)이다. 진주 설매에 살았다. 시집가기 전부터 현모양처의 기품이 배어있었는데, 19세 되던 때에 천사택(千思澤)에게 시집가서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고 남편에게 순종하였다.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수개월간 회복하지 못하자 산과 하늘에 시어머니의 쾌차를 비는 제사를 올리는 등 극진히 간호하였다. 그러나, 결국 시어머니가...
-
지수면 청원리에 있는 재령이씨의 서당. 이 정자의 소재지는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 청원마을이며, 1970년에 이철호, 이기환이 지은 목조기와형으로 지은 학문연마의 장소이다. 청원마을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 1704] 선생이 도의(道義)를 강론하던 곳이며, 후일이 그의 영향을 받은 도내의 선비들이 모여 유계를 조직하였는데, 주선자는 후손 이철호, 이기환이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서원.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은열공(殷烈公) 정신열(鄭臣烈)과, 고려 말 물레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木棉, 목화) 옷을 입게 한 문충공(文忠公) 정천익(鄭天益)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이다. 두 분은 각각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본래 대평면 마동에 건립되었으나, 1868년(...
-
지수면 청원리에 있는 재령이씨의 재실. 이 정자의 소재지는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 청원마을이며, 1853년에 건축된 목조기와형 재실이다. 맑은 계곡을 끼고 있어서 청계재라 부른다. 쳥계재는 건축 당시에 3간이었으며 그 뒤에 5간으로 증축되었다. 그 후에 이 재실의 뒤에 서실을 짓고 강당으로 사용하였다. 고전적인 기와집 형태로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방과 대청마루가 있고, 여...
-
사봉면 봉곡리에 있는 정자. 이 정자의 소재지는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 초문마을이며, 1986년에 건축된 목조기와형 재실이고, 제사 회의 강학 등의 다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청사 이선생의 호에 따라 청사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오랜 전에 청사정사가 있었는데, 3백년이 지나자 다시 손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에 후손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3간으로 재건하여...
-
조선시대 지수면 청원리에 건축했던 사당. 이 사당의 소재지는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이며, 조선시대에 건축되었던 사당이었으며, 고종시에 철폐되어 현재 복건사업이 진행 중이고, 비석이 남아있다. 성종시의 명신인 홍문관 부제학 이관재와 그 후손인 행와 행정을 배향하여 제사지내던 사당으로 조선시대에 건축되었다. 그 후 고종시에 이 사당이 철폐되었는데, 후손인 이기환이 이 사실을 안...
-
조선 전기의 열녀. 수군(水軍) 최귀석(崔貴石)의 딸이다. 나이 20여 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하고 있더니 정유재란 때인 1597년에 우산(牛山)에서 화를 피하다가 적이 와서 핍박하고자 하므로 소리를 질러 크게 꾸짖고 절개를 온전히 하고서 죽었다. 진주 방방리(芳房里)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
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운천리에 있는 순흥안씨의 효행과 열행을 기린 효열비(孝烈碑). 효열부 순흥안씨를 기리는 비로 1898년(무술년)에 지방의 유림과 최찬호·최종락 등 집안사람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운천리 운천부락 포실 소류지 길 옆 언덕에 남향으로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27㎝, 폭 50㎝, 두께 15㎝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
-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에 있는 의병장 최대성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1752년(영조 28) 최대성(崔大晟)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세운 공로를 인정하여 “충신모의장군 증통정대부형조참의어모장군행훈련원정최대성지려(忠信募義將軍 贈通政大夫刑曹參議禦侮將軍行訓練院正崔大晟之閭)”를 내리면서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 안간지구대 옆에 동향하여 있다. 1999년...
-
조선 후기의 열녀. 남편은 최동태(崔東泰)이고, 아버지는 이승효(李承斅)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벽진이씨는 성품이 효성스러워 남편과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남편이 중한 병에 걸리자 자신의 손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했지만 결국 죽고 말았다. 이에 자결하고자 했으나 주위에서 말리는 이가 많아 손수 상복을 만들어 유감됨이 없게 하였다. 후에 시...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집안의 시어머니와 맏며느리의 상이 함께 있자 시아버지의 명령대로 살림을 맡고 모든 조카들을 자식처럼 길렀다. 그러다가 남편 최상린(崔祥鱗)이 세상을 떠나자 마음속으로 따라 죽을 것을 맹세하면서도, 밖으로는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이 진양하씨의 범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 채고 항상 살폈는...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동산리에 있는 충노 효자 최의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최의남(崔義男)의 주인에 대한 충성심과 그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기려 1686년(숙종 12)에 정려를 내렸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동산리 산 94에 있는 용고미(龍顧尾)마을 입구에 남동향으로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시멘트 바닥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정씨는 남편 최태재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 식구에게 말하기를 “여자가 순종해야 할 세 가지 길이 있는데, 나는 자식이 없으니 남편을 따라서 죽는 것이 옳다. 내가 죽거든 남편과 같이 장사지내 달라.” 하고 목을 매어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
조선시대의 열녀. 사비(私婢)로, 사노(私奴)인 개동(介同)의 부인이다. 남편이 죽은 뒤에 다른 사람이 정조를 뺏으려 하였으나, 굳게 지켰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는 사죽리(沙竹里)에 살았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 충신은 전통시대의 사상을 포괄하여 내려오는 용어이지만, 나라에 충성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할 수 없는 기본적 덕목이다. 이러한 충성심을 발휘하여 오늘날까지 후세의 칭송을 받고 있는 충신들은 그 마음이 항상 나라와 임금, 그리고 겨레를 위하는 일념에 차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때문에 개인의 영달이나 어느 한 집단의 권력 쟁취를 위하여 공을...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의원(儀元).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의 후손이다.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는데, 항시 시탕(侍湯)에 곁을 떠나지 아니했으며, 부모가 위독할 지경에 처했을 때는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목숨을 아홉 달이나 연장시켰다. 사후에는 시묘(侍墓)를 삼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전기의 선비·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공곽(公廓). 호는 매헌(梅軒).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모시고 상주에 갔다가 도중에 왜적을 만났다. 왜적이 아버지를 베려 하자 하경휘는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으로 칼을 막았으나 무도한 왜적은 부자를 모두 무참히 살해하였다. 뒤에 조정에서 하경휘의 효행을 기려 효자의...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대천리에 있는 하경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하경휘의 호는 매헌이며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상주(尙州)에 갔다가 왜병의 칼에 죽게 되자 아버지를 안고 적의 칼을 맞아 같이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적이 먼저 아버지를 치려 하자 하경휘가 양팔을 벌려 아버지를 막고 칼을 막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아버지는 충...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진양인 하계락(河啓洛)이고, 아버지는 사인 박인호(朴仁浩)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밀양박씨는 천성이 순하고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잘 모시고 남편을 공경하는 등 예의규범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특히 계시모를 섬기는 데에 정성을 다하니 향리에서 모두 그 효행에 감복하였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하계석(河啓錫)이고, 아버지는 이호주(李浩柱)이다. 합천이씨는 남편이 일찍이 습진에 걸려 고생하였는데 효험 있는 약이 없었다. 어느 날 미꾸라지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 시험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 날마다 대소쿠리를 가지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미꾸라지를 잡으러 다녔다. 추운 겨울철에도 미꾸라지를 잡아 시탕해 올렸으나 남편은 차도가 없었다. 하늘에 치성을 드려보...
-
조선 전기의 열녀. 본관은 진주. 조선 중종 때의 문신 강응태(姜應台)의 손녀이며, 사직(司直)을 지낸 강렬(姜冽)의 딸이다. 남편은 하국보(河國寶)이다. 평소에 부도(婦道)를 잘 지켰으며,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에 왜적을 만나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다. 진주 단지동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그 열행이 기록되어 있다. 뒤에 조정에서 절부의 정문(旌...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해주정씨는 성품이 단정하고 규범이 있었는데, 남편 하규원(河珪源)이 세상을 떠나자 매우 애통해하였다. 예를 다하여 남편의 장례를 치렀고, 시부모를 더욱 정성껏 모셨으며 집안 살림에도 정성을 쏟았다. 또한 “재물이 없으면 지아비의 제사를 받들 수가 없을 것이다.” 라고 하고 첫 기일을 맞아 남편의 묘를 찾아가...
-
조선 말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여삼(汝三). 조선 전기의 문신 하경복(河敬復)의 후손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남원양씨 부인을 지극한 정성으로 섬겼다. 그의 나이 14세 때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영약인 잉어를 구하기 위해 디딜방아 공이를 다듬어 읍내 장에 가서 팔려고 가다가 수곡의 조계마을 앞 길 위에서 쓰러져버렸다. 이튿날 햇살에 놀라 황급히 일어나 자기의...
-
조선시대의 효녀·열녀.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하득곤(河得鯤)의 딸 하씨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어려서 아버지가 병이 들어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를 하였으나 상태가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정려(旌閭)되지는 않았다. 진주 운곡(雲谷)에 살았다. 진주는 예향(禮鄕)으로써 많은 지조있는 선비들을 배출했는데 그에 못지않게 효자와 효녀도 많이 배...
-
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가선리 선동마을에 있는 청주한씨의 정자. 『진주누정지』에 의하면 1919년에 처음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 외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가선리 선동마을 입구의 도로변에 위치한다. 외삼문 1동, 재실 1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변에는 흙과 돌을 섞어 만든 담을 둘렀다. 외삼문은 목조구조를 기본으로 하며 벽체는 적색 벽돌로 마감되어...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주강씨는 성품이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남편상을 당하자 염습과 제수 마련을 손수하여 소홀함이 없게 하고 예로서 장례를 지냈다. 남편 사후에도 시부모 섬기기를 평소와 같이 하다가 어느 정도 집안일이 안정된 후 자진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하억(河檍)이며 어머니는 풍천노씨(豊川盧氏)로 통덕랑(通德郞)노약(盧爚)의 딸이다. 부인은 현풍곽씨 곽약의 딸과 경주김씨 김필백의 딸이다. 1647년(인조 25)에 출생하여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7세 때 진양하씨의 집성촌인 진주 수곡 사곡으로 이주해 터를 잡았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마을에 있는 하세희(河世熙)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하세희는 부모가 병이 들자 부모의 대변을 직접 맛보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게 하는 등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고,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빈소를 지켜 호랑이도 그 효행에 감동했다는 내용을 기록한 비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12㎝, 폭...
-
조선시대의 효부. 본관은 진주(晋州). 사인(士人) 하약(河瀹)의 부인이다. 일찍 남편을 잃고 평생토록 머리에 기름을 바르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였으나 제사에는 음식을 풍성히 하였다.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다가,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풍성히 하였다. 또한 염습과 의복을 모두 스스로 지었다. 진주 신당리(新塘里)에 살았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
-
조선시대의 효자.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하옥동은 향리(鄕吏)로, 성품이 본래 정성스럽고 부모를 정성을 다해 모시는 등 효성이 남달랐다. 부모가 돌아간 뒤에는 기름진 음식을 피하고 결국 생을 마쳤다고 한다. 진주 주내(州內)에 살았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하용도(河用渡)이고, 아버지는 최영순(崔永淳)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전주최씨는 심성이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남편이 중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최씨는 살아서 의지할 데가 없음을 애통히 여겨 바로 남편 뒤를 따라 하직하려 했으나, 스스로 이르기를 “자식이 없는 상인데 내가 어찌 예를 다하지 않겠는가.”...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밀양박씨는 효성이 지극하여 7, 8세의 어린 나이에도 홀로된 어머니를 잘 모셨다. 17세 되던 해 결혼을 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남편이 요절했다. 남편의 장례 후, 한결같은 예로써 3년 상을 행하였다. 시부모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밀양박씨를 가엾게 여겨 다시 시집보낼 생각을 하니, 이를 눈치 챈 밀양박씨는...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대중(大中), 호는 송파(松坡) 혹은 죽헌(竹軒). 성주목사와 김해목사를 역임한 영묘정 하진보(河晉寶)의 증손자이다. 할아버지는 장수 현감을 지낸 하성(河惺)이다. 아버지는 하달원(河達遠)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봉직랑 이명의(李明懿)의 딸이다. 아내는 울산김씨로 김극립(金極立)의 딸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다음...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구장(九章), 호는 연정(蓮亭)이다. 평소 성품이 청아하고 인품이 넓고 후덕했다. 어릴 적부터 이미 도량이 컸고 학문을 함에 있어서 실천을 귀한 것으로 삼았다. 어버이의 병을 돌보아드릴 때 다섯 달 동안이나 백방으로 힘을 써도 효력이 없고 점점 위독한 상황에 이르자 북두칠성에게 빌었으며, 또 글을 지어 산에 빌었다. 지성을 다한 끝에 다섯 줄...
-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사언(師彦).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의 아들이다. 글 읽는 것을 상례(喪禮)에서 익혀 어릴 적부터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아버지 명을 받아 밖에 나갔다 오다가 밤이 되어 문이 닫혀 있으면, 어버이가 잠에서 놀라 깰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부르지 않고, 또 돌아와서 얼굴을 대하지 않는 것도 염려스러운데다 자기 방에서 편안히 지내는 것도...
-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응백(應伯), 호는 어은(漁隱)·초은(樵隱). 하맹산(河孟山)의 현손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고 영특하였으며 지조가 높았다. 또한 효심이 지극하여 『소학』의 「내칙(內則)」에 뜻을 두어 힘써 익히다가 닭이 울면 어버이 침소를 돌아보고 보살펴 드렸다. 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를 할 때는 까마귀 한 쌍이 날아와 여막에서 지새니, 사람들이...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의 후손이다. 집이 가난했지만, 어버이 봉양에는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올렸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려 소생시켰다. 어머니가 눈이 멀자 개구리를 구워 드려 시력을 회복하게 하였다. 효행 조정에 알려져서 벼슬을 추증하고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
조선 말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송강(松岡) 하항(河恒)의 후손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린 나이 때부터 아버지를 모셨다.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의 피를 입에 넣어 드렸고, 부모상을 당해서는 마치 어른과 같이 예를 다했다. 어머니를 모실 때는 약과 음식을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마련했다. 어머니 병환 치료를 위해 눈 속에서 비둘기를 구했고, 얼음 속에서 잉어를 구했다. 또한...
-
조선 중기의 효자·유림. 본관은 진주. 자는 천지(千之), 호는 이곡(梨谷).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하인수의 효행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타고난 인품이 순수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했으며 효심 또한 지극하고 학문의 깊이도 매우 뛰어났다. 어릴 적부터 필법이 출중했으며, 한결 같이 어버이의 뜻에 순응하여 털끝만큼도...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경가(敬可). 쌍강(雙岡) 하홍운(河洪運)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와 형을 따라 공부하였으나 가난이 심하여 봉양할 수가 없음을 알고 가산을 잘 다스려서 집안을 일으켰다. 형이 병에 걸려 여러 해 고생하다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나 부인을 잃었을 때도 한 번도 수심스럽거나 괴로운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어...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덕언(德彦), 호는 도곡(道谷).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하우현(河愚顯)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윤오(李潤五)의 딸이다. 부인은 인천채씨(仁川蔡氏) 채경진(蔡景珍)의 딸이다. 1812년(순조 12)에 태어나 사마시에 합격한 후 진사에 올랐다.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오도실에 있는 하재원(河載源)의 효행을 기리는 비. 홀어머니가 병이 들자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으로 간호한 진사 하재원(河載源)[1812~1881]의 효행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하재원은 운수당 하윤의 후손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오도실마을의 하씨재각 앞에 위치한다. 주위에는 하재원의 묘비(1913)도 세워져 있는데, 송사(松沙) 기우만...
-
근대 개항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해주정씨는 어려서부터 효행스러웠는데, 시집가서는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남편 하정원(河正源)이 병에 걸려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여 회생시켰으나, 며칠 뒤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해주정씨는 장례를 끝내고 나서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에게 고하고 조용히 자진하였는데...
-
조선 후기의 효자. 자는 성모(聖謨)이며, 쌍부헌(雙負軒) 하진룡(河震龍)의 후손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집이 심하게 가난하여 백부의 집에서 의지하며 살았다. 아버지가 금화현(金化縣)에서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글을 읽으며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다. 아버지가 종기를 앓게 되자 직접 환부를 빨아 구완하였으며, 목욕재계하고...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찬언(贊彦), 호는 행정(杏亭)이다. 생원 하락(河洛)의 현손이며, 하재악(河載岳)의 아들이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9세 때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조희맹(趙希孟)에게 수학하다가 19세 때 스승에게 울면서 어머니 봉양을 위해 돌아갈 것을 고하고 돌아와서는 50년 동안 하루같이 노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
조선시대의 효자. 성품이 온순하고 효성스러워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목욕재계하고 아버지의 쾌차를 하늘에 빌었으나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자 크게 애통해 하고, 예를 다해 장사를 지내니 주위 사람들이 크게 칭찬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대보(大甫). 호는 조산처사(螬山處士).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8년여 동안 서울에 걸어 다니면서 어머니의 열녀 정문을 내리게 하였다.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어머니는 열녀요 아들은 효자라.” 칭송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그 효행이 수록되어 있다....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이호(而浩), 호는 제암(霽巖). 성종 때의 문신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우애가 있었으며 자신의 처자만 편애하지 않고 오직 부모를 봉양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부모가 그를 분가시키고자 하니 울면서 거절하고 형제가 함께 살며 부모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상중에 있을 때에는 그 슬픔이 지극하여 향리에서 이...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성경(成卿). 대사간을 지낸 하결(河潔)의 후손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느 날 어버이에게 드릴 고기가 없어 걱정하고 있는데, 비둘기가 스스로 방에 날아들어 그것으로 봉양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가 추운 겨울에 배를 원했으나 끝내 구해 드리지 못하자 이것이 한...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여해(汝海). 진사 하협(河悏)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깨우쳤고, 성품과 행실이 효성스러웠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서 몸을 다하여 공경하였고,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3년의 시묘를 정성을 다하여 예로써 마쳤다. 후일 마을 사람들이 그 산소가 있는 골짜기를 ‘하효자 시묘골’이라고 이름 붙여 그의 효행을 칭송하였다....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중해(仲海). 선조 때의 학자 창주(滄洲) 하증(河憕)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효우에 돈독하였다. 어머니의 병을 모시기를 20년이나 계속하였으나 일심으로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어머니가 한때 위중하자 손가락에서 피를 내고 하늘에 빌어 마침내 회생할 수 있었다. 상을 당하여서는 상복을 벗지 아니하고 죽을 마시며 슬퍼하다가 드디어...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청주. 자는 천뢰(天賚), 호는 유계(柳溪).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증손이다. 성품이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극진히 모셨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 때 정희량(鄭希亮)이 안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상중이었으므로 이를 통분히 여겨 “늙은 신하는 임금의 욕됨에 놀라 적개심에 불타는 마음 나라...
-
조선 후기의 열녀. 칠원윤씨는 남편 한석건이 세상을 떠나자 매우 슬퍼한 나머지 곧 그 뒤를 따라 죽었다. 영조 때 이 일이 알려져 정려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 전기의 열녀.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한씨는 정조가 있어 평소에 말하기를 ‘여자로서 불행히 변을 만난다면 죽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위험에 처하자 정절을 지키다가 죽었다. 선조 대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진주 정수리(丁樹里)에 살았다....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남편 한진권이 병이 들어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하늘에 빌고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는 등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으나 남편이 결국 죽고 말았다. 예로서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남편의 영정을 거두고 난 후에는 즉시 방으로 들어가 약을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
-
조선시대의 열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는 남편 한진영이 병이 들어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으나 남편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얼마 후 진양강씨가 딸을 낳았으나 성장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니, 진양강씨는 남편의 묘로 가서 이를 아뢰고, 곧 돌을 안고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남편 한진영은 한진권의 쌍둥이 아우였다. 이...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김해. 자는 군무(君茂). 성품이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16세 때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써 3년을 더 연명시켰다. 그리고는 손을 항상 감추고 다니면서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니 아버지가 타이르면서 몸조심을 당부할 정도였다. 후에 아버지상을 당하여서도 상복의 띠를 풀지 않고 3년을 시묘하였으나 불행하게도...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담리에 있는 허소유의 정려. 허소유(許小(由+己))는 고려 공민왕 14년(1363) 사헌부장령을 지낸 관리였다. 본명은 계도(繼道)이다. 1384년(우왕 10) 모친상을 당하여 애통한 예를 지극한 마음으로 다하면서, 당시 침입한 왜구도 겁내지 않고 평소처럼 집례하는 것을 보고 그 효심에 감동하여 주위 수십 리에 침범을 금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허소유의 효성...
-
조선 전기의 열녀. 임진왜란 이후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왜적들에게 정절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절개를 온전히 하고 죽었다고 한다. 정려(旌閭)되지는 못하였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김해인 허정(許禎)이고, 아버지는 사인 하경춘(河慶春)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17세 되던 해에 시집가서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는데, 남편이 중한 병에 걸리자, 유명한 의원을 찾아다니고 아침저녁으로 남편 간호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편이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자신의 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여 간병하였다...
-
조선 전기의 효녀. 허진(許眞)의 부인이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적에게 해를 당하자 아버지와 더불어 같이 죽었다. 조이[召史]는 양반이 아닌 계층의 부인을 일컫는 말이다. 선조 때 조정에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旌門)을 내려주었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그 효행이 기록되었다....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전주이씨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했는데, 17세가 되던 해 남편 홍경섭이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 혼자 남은 전주이씨는 아들을 따라 죽으려는 시어머니를 말리면서 “지어미가 지아비를 따라 죽는 것은 의로운 일이지만, 어찌 어머니가 아들을 따라서 죽는 이치가 있겠습니까.”하고 슬픔에 잠긴 시어머니를 위로하여...
-
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나주임씨는 남편 홍차수가 중한 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고, 남편의 쾌차를 하늘에 비는 등 정성을 다하였으나 마침내 죽고 말았다. 남편의 뒤를 따라 갈 것을 결심한 나주임씨는 이 일을 시어머니께 고하고 세 명의 동서에게 자신의 두 아들을 부탁한 다음, 밝은 새벽에 침실에 들어가서 세...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운선(雲善). 통정대부 황계량(黃桂亮)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워 삯일을 하여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어느 해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3년간을 자리에 눕게 되자 지성을 다하여 약을 달이고 하늘과 산신에 빌었다. 그가 약을 구해 밤중에 산길을 오는데, 그의 효심에 호랑이도 감동하였는지 그를 지켜주었으며, 의원집에 가도 사나운 개가 꼬리를 치며 반겨주...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 대흥마을에 있는 정려. 회산구씨(檜山具氏)는 능성(綾城)의 승지 구연회(具然會)의 딸로 경주김씨 김병규(金炳規)에게 시집간 후, 남편이 중병에 걸리자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건강을 되찾게 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1875년(고종 12)에 정려가 내려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 대흥마을의 입구 도로변에 위치한다. 비의 제목은 「열녀김상흘처...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에 있는 비각. 경주김씨 김옥(金鈺)과 그 어머니 능성구씨(陵城具氏)의 열행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겸 비각이다. 김옥이 18세 때 아버지 김병규(金炳規)가 서울 관사에서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모셔 오던 중 혼절하므로 자기 손가락의 피를 내어 소생케 하였고, 그 후 마침내 별세하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극진히 모셨다. 1870년(...
-
부모를 극진히 잘 섬기는 아들. 효자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효녀(孝女)가 있지만, 전통적인 가족제도 하에서는 부모와 아들의 관계가 우선적이었으므로 ‘효자’라는 용어가 ‘효도를 하는 자식’의 개념을 포괄할 수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지배한 전통적인 규범으로서의 효 또는 효도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정성껏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사망한 뒤에도 극진히 제사를 모시는 일 등을 포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