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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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南士林-産室-晋州-書院 |
영어의미역 | Confucian Academy of Jinju, Birthplace of Gyeongnam Confucianists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고영훈 |
[정의]
진주지역에 있는 서원.
[서원의 성립]
경상도 지역에 건립된 193개의 서원 중 경상남도 지역은 19개 군에 44개 서원이 건립되었는데, 그 가운데 진주지역에 해당되는 서원은 7개로 경상남도에서 가장 많다. 재실의 수에 있어서도 진주지역에 약 500여개가 분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현재도 문중에 따라 새로 건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원은 선현을 모시는‘사(祠)’와 제자를 교육하는‘재(齋)’에서 출발하며, 훗날 이들의 기능이 합쳐져 서원이 되었다. ‘사’의 경우, 신라시대 충청북도 진천에 김유신(金庾信)을 모신 사우가 세워졌고, 고려조에서도 국가와 역대 제왕에 공헌한 공신들을 공신당(功臣堂)에 배향하자 일반인들도 이를 모방하여 사우를 건립하고 선현을 봉사하였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한층 조직적으로 사묘(祠廟) 건립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사묘제도는 조선 중엽의 서원 성립과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쳐 결국 서원의 성립은 사우의 발생에서 유래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성리학적 정치철학에 충실한 사림(士林)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선조대에 이르면 서원은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된다. 서원은 지방 사림들의 자치적 활동을 보장하는 향촌기구의 기능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정착되어가는 성리학을 배울 수 있는 교육시설이기도 하였다.
서원은 제향하는 인물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되는데, 연고지를 따라서 건립하는 것이 보통이다. 연고지란 대체로 가향[본관·출생·내향(內鄕)·외향(外鄕)·처향(妻鄕)), 거주[우거(寓居)·복거(卜居))], 사거(死居, 묘소 포함), 유배(귀양)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서원은 후손·문인·향인들이 따로 따로 세우는 것이 아니고, 대개는 서로 힘을 합쳐 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건립된 서원은 제향인의 후손들이 동족의 결합과 유대를 도모하는 장소이며, 제향인으로 대표되는 당색의 근거지이고, 또한 지방 양반들의 향촌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었다. 결국 서원의 발달은 전체적으로 양반들의 결속 및 기득권 유지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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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지방의 군·현에 빠짐없이 향교가 세워지고 관학교육이 정비된 것은 세종 때였지만, 한편으로는 관학이 출세의 기회를 잡는 곳으로 변하였고, 향교의 교관은 질이 저하되었으며 세조의 집정으로 양식 있는 선비들이 관학교육에서 멀어졌다. 관학의 부진은 16세기에 이르러 극한상황에 이르게 되는데, 연산군은 성균관을 연회의 장소로 사용하였고 학자들의 독서를 금하기조차 하였다. 때문에 관학은 극도로 퇴락해갔고 공부하는 곳을 찾아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따라서 참교육의 장이 요청되었으며 덕망 있는 스승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원이 생겨났으므로 그 뒤 서원은 쉽게 교육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서원 건물의 일반구성]
건축에는 늘 중심적인 건물이 있어 전체 건축물의 배치에 전반적인 틀이 잡혀진다. 궁궐건축에서는 정전, 상류주택에서는 안채와 사랑채, 사찰에서는 탑과 금당 등 나름대로의 질서 잡힌 구심적·공간적 기능을 담당하여 건축적 특성을 나타낸다.
서원의 사당과 강당은 서원건축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이다. 이는 서원의 설립이 선현을 봉사하고 아울러 유학을 강학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신적 지주가 되는 사당과 현세적인 강당은 시설의 기본을 이루는 것으로 모든 서원에서 건립되었다. 이 두 건물의 공간은 각기 묘(廟)와 학(學) 공간으로 불리어지며, 일반적으로 일직선상으로 배열이 되는데, 강당이 사당보다 전면(前面)에 배치되면 전학후묘(前學後廟), 사당이 강당보다 전면에 놓이면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로 불린다.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이 분포한다. 두 건물을 포함하여 기타 서원의 건물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사 당
: 선현의 신위를 모신 건물로서 서원에 따라 영정을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이는 원생들이 흠모하는 선현의 모습을 직접 가까운 곳에서 배알할 수 있어 존현숭배의 마음이 더욱 고취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배향 인물은 보통 1인을 주향으로 하여 시작되지만, 후에 다시 존숭하는 인물이 생기면 추가로 배향하기도 한다.
사당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며, 대부분이 아담한 정면 3칸으로 1~5인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기에 적당한 규모로 지어졌다. 선현의 학문적 깊이와 당시의 유학 풍토에 비해 지극히 유교적인 검소한 규모이다.
○ 강 당
: 서원 내 강학공간의 중심건물이다. 원생이 글을 배우는 곳이며, 아울러 선생의 거처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서원 내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 보통 정면 5칸인데, 중앙에 대청은 3칸 규모로 넓게 꾸미고 좌우에 온돌방을 1칸씩 둔다.
기능적으로 여름과 겨울을 모두 수용하고 아울러 공적인 건물로서 품위도 갖게 한다. 이러한 구조는 향교의 명륜당과 함께 강당 건물의 규범이 된다. 강당도 사당과 같이 고유한 이름을 가지는데, 건물의 중앙 대청 앞 처마 밑에‘○○당’, ‘○○서원’이란 현판이 걸린다.
○ 재(齋)
: 원생 등이 기숙하는 곳으로, 보통 강당의 전면 마당 좌우에 대칭되게 자리하여 강당과 함께 교육공간의 일곽을 이룬다. 강당이 보통 남향이지만 지세에 따라 달리 좌향할 때도 있으므로, 일반적으로 강당을 향하여 오른쪽을 동재, 왼쪽을 서재로 부른다. 동재는 서재의 원생보다 지체가 높은 자제가 보통 기거한다. 동·서재는 강당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작은데, 보통 정면 3~4칸 규모로 방 2~3개 혹은 작은 대청 등으로 꾸며지고 앞쪽으로는 툇마루가 놓여진다.
○ 장판고
: 전적과 목판 등을 보관, 관리하고 서적을 간행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습기를 멀리하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바닥을 마루구조로 하며, 벽은 판자로 막고 창문은 처마 밑에 조그맣게 살로만 된 형태를 취한다.
○ 제기고
: 제향 때 필요한 제수를 마련하고 기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전사청(典祀廳)이라고도 한다. 제향은 크게 향례와 묘사로 나누어지는데, 향례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中丁日 : 그 달의 일진에서 중간에 있는 丁日)에 묘사는 음력 3월 10일과 10월 2일에 행한다. 제향에 쓰이는 기물은 대개 목기(木器)와 죽기(竹器)를 쓴다.
○ 누 각
: 원생들이 공부하는 도중에 휴식하거나 여가를 위해 마련한 건물이다. 대개 서원의 정문을 겸하며 누각이 없는 곳도 많다. 서원의 정문은 보통 정면 3칸으로 각 칸에는 문이 있어 외삼문(外三門)이라 하며, 제향구역인 사당으로 출입하는 문을 내삼문(內三門)이라 한다.
[진주지역의 서원]
영남지방은 서원의 보금자리였다. 서원은 선비들이 모여서 성리학을 논하고 유학을 공부하던 곳이다. 따라서 선비들이 많이 살고 있던 지역에 서원이 많이 세워졌다. 서원은 당시 폭넓은 재지세력(在地勢力)이 존재한 경상도에 단연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는데, 경상도가 사림의 세력이 강력하였고 또 그들이 일찍이 붕당정치의 주역으로서 정치활동을 활발히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일찍부터 향촌에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서원 연구에서 활용되는 관찬사료, 예를 들면,『조두록(俎豆錄)』,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 『동국원우록(東國院宇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서원등록(書院謄錄)』, 『전고대방(典故大方)』, 『서원지총서(書院誌叢書)』 등에 나타나는 서원 현황에서 중종~헌종조의 서원 건립 추세는 경기 46개, 충청 64개, 전라 81개, 경상도 193개로 나타나고 있다.
경상도지역에 건립된 193개의 서원 중 경상남도 지역은 19개 군에 44개 서원이 건립되었는데, 그 가운데 진주지역에 해당되는 서원은 7개로 경상남도에서 제일 많다. 진주지방 대부분의 서원은 17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 건립되어 다른 어느 지역보다 상당히 빠른 편에 속한다. 광해군의 등극과 같이하여 북인인 정인홍(鄭仁弘)의 득세로 그의 스승 남명(南冥)과 남명 문인들을 제향하는 서원이 건립되고, 이어서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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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
16세기 중반 퇴계·남명 학파가 형성되어 동·서 분당시에는 같은 동인의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남북 분당시 좌도의 퇴계학파는 남인, 우도의 남명학파는 북인으로 갈리면서 이후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였다. 그러나 우도의 남명학파는 인조반정을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몰락한 이후 독자적인 하나의 정파내지 학파로서 독립이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진주지역 서원이 숙종[1675~1720] 이후에 건립되고 있는 점으로 본다면 남명 문도였던 지역사림들의 활동은 당색을 표방하지 않으면서도 당색과 무관한 선현들을 봉사한 서원의 건립과 운영에 참여하면서 향촌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00여년이 흐른 18세기 이후에는 점차 지역·문중별로 문중서원(門中書院)의 건립이 두드러진다.
○ 덕천서원(德川書院)
소 재 지 : 산청군 시천면 원리
연 혁: 1576년(선조 9) 창건, 1870년(고종 7) 훼철, 1920년 재건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을 제향하고 최영경을 배향한 곳이다. 덕천서원은 진주권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우도(慶尙右道)의 학문적 기반을 형성해왔던 대표적 서원이다. 위대한 처사이자 당대 도학의 우두머리로 추앙을 받았던 조식이 삼가현 토동(兎洞)에서 이곳 덕산으로 옮겨온 지 10년이 더 지난 1572년(선조 5) 2월 8일에 72세의 일기로 덕산의 사륜동 산천재에서 생을 마감한다. 선생의 사후 그의 문인들과 주위 사림을 중심으로 서원 건립이 발의되어 선조 9년(1576, 병자)에 위패를 봉안하고 덕산서원(德山書院)의 편액을 달았다. 광해군의 등극과 동시에 선생의 제자였던 내암(來庵) 정인홍[1535~1623]이 스승의 추존사업에 나서 진주의 덕천서원, 삼가의 용암서원(龍岩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등이 1609년(광해군 1)에 사액되었는데, 이 사액을 계기로 덕산서원은 이후 덕천서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식은 경(敬)으로써 내면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외면을 방정하게 한다고 하는 경의 사상을 통하여 실천을 중시하는 학풍을 열어 강좌학파(江左學派)를 대표하던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의 이론적이고 형이상학에 머물러있는 성리학을 비판하였다.
이후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성쇠를 거듭하던 덕천서원은 1870년(고종 7)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는데, 그 원인은 배향된 조식이 문묘에 모셔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후 1920년대에 이르러 덕천서원은 지방의 유림에 의해 복구되었으며, 광복 후 당대 이황과 쌍벽을 이루던 인물로 추대되어 1954년 지방유형문화재 89호로 지정되었고, 1974년 사적 305호로 지정되었다.
덕천서원은 강당이 사당보다 전면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배치이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전면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강당이 있고 좌우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동·서재가 배열되어 있다. 강당 뒤편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이 있다.
소 재 지 : 수곡면 사곡리
배향인물 : 각재 하항, 무송 손천우, 백암 김대명, 영무성 하응도, 모촌 이정, 조계 유종지, 송정 하수일
연 혁: 1610년(광해군 2) 창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1918년 복원
수곡면 대각마을을 지나 나지막한 야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서원은 마을에 있던 서원을 옮겨 지은 것이라 전해오는데, 현재 사당은 없고 강당과 동·서재,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퇴락되어가던 것을 근래에 보수하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344호로 지정되었다. 이 서원은 진주지역에서는 두번째로 오래된 서원으로 광해군 등극으로 실세를 잡은 정인홍의 도움을 받아 덕천서원을 건립하였던 남명의 문도들과 유림들이 힘을 합쳐 건립하였다.
전체적인 배치는 口자 형태로 강당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동·서재를 배치하고 앞에 대문채를 두었다. 1918년 이건할 당시 사당을 짓지 않고 건립했지만, 높다랗게 둘러친 외부 막돌담장은 현재도 원형대로 보존이 잘되어 있다.
서원의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익공계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을 마루로 하고 좌측 2칸과 우측 1칸은 방으로 구성하였는데, 대청을 향해 들어열개분합문을 짜 넣어 공간의 활용도를 높였다. 일반적인 규모로 보면 5량 구조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 3량으로 가구를 하였고, 대청의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를 올리고 보아지를 틀어 종도리를 받고 있다. 정면의 초석은 모두 팔각형으로 사다리꼴로 입면을 줄였다.
동재는 정면 2칸, 측면 1칸에 앞뒤 퇴를 가진 평면으로, 방 2칸과 정지 한칸을 두었다. 이에 반해 서재는 사대부가의 사랑채처럼 화려한 구조를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1칸에 양퇴를 가진 것은 동재와 유사하지만, 한쪽 칸에 누마루를 마련하고 팔각의 장주초석(長柱礎石)으로 그 아래를 받쳤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우진각집으로, 벽체를 토석으로 보강하였다. 대문채의 바깥 담에 기대어 창고 2동이 좌우로 배치되었는데, 그 사이 벽체를 이용하여 통로로 활용한 점이 돋보인다.
소 재 지 : 금산면 가방리 관방
배향인물 : 이준민(李俊民), 성여신(成汝信), 하증(河憕), 한몽삼(韓夢參)
연 혁 : 1702년(숙종 28)에 창건하였다가 훼철되었던 것을 1935년에 복원
금산면 가방리 관방마을 산 중턱 평지에 자리잡은 임천서원은 현재 강당과 대문채만 있고 동·서재와 사당은 소실되고 없다. 대문채와 강당을 마주보게 배치하고 돌담을 두른 간단한 배치를 하고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면에만 퇴를 둔 전퇴집이며, 실의 배열은 방, 대청 2칸, 방의 순으로 배열하였고,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시설하였다. 방형으로 다듬은 자연석을 2단 쌓고 갑석을 둘러 마감한 기단에 1단의 계단을 중앙에 시설하였다. 초석과 기둥은 전면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원형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사다리형 초석을 놓고 방형기둥을 사용하였다. 가구는 3량가로 대들보 위에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한 구조로 홑처마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양쪽 칸에 창고를 들이고 중앙을 통해 출입하도록 되어 있는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 운강서원(雲岡書院)
소 재 지 : 금곡면 검암리 운문
연 혁 : 1981년에 건립
운강서원은 시랑공 하공진과 운수당 하윤을 모신 서원이다. 산이 평지와 만나는 끝자락의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경인사(景仁祠), 강당, 외삼문을 남북 축선상에 일렬로 배치하고, 강당 오른쪽 뒤편에 경충문(景忠門)을 배치하였다. 앞쪽에 교육시설인 강당을, 뒤쪽에 제향시설인 사당을 마련한 전학후묘의 배치 형태를 하였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면에만 퇴를 둔 전퇴집이다. 실의 배열은 전면 반칸을 뒤로 물려 내루(內樓)를 마련한 방-방-방으로 배열되어 있다. 외벌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놓고 전면에만 원형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방형기둥을 사용한 홑처마 팔작 민도리집으로 슬레이트로 지붕을 마감하였다. 각각의 방에는 문틀 아래에 머름이 있는 두짝 세살창을 달았다.
경인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측면으로 보아 앞쪽 한 칸은 개방된 툇간을 이루었다. 기단은 시멘트로 덮어버려 볼 수 없으나 대략 자연석을 4~5단 정도 쌓아 다소 높게 조성하였고, 전면에 4단의 계단을 2개소에 시설하였다. 초석은 원형초석을 사용하였고 기둥은 원형기둥을 사용하였다. 각각의 칸에는 두짝 판장문을 시설하였다.
소 재 지 : 집현면 신당리 죽산
배향인물 : 조지서(趙之瑞)
연 혁 : 1710년(숙종 36)에 창건하여 1718년(숙종 44)에 사액
조지서는 세자시강원보덕으로 연산군이 세자시절에 학문을 진강하였다 뒤에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1868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현재는 사제문비와 비각만 남아 있다.
○ 도동서원(道東書院)
소 재 지 : 하대동 443-1
배향인물 : 정분(鄭苯),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김문기(金文起), 정이오, 하락
연 혁 : 1838년(헌종 4)에 창건하여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1838년에 창건되어 황보인·김종서·정분·김문기 등 네 분을 모시고, 뒤에 정이오·하락 두분을 추배하였다. 1868년 서원이 철폐되어 없어지고 현재는 유허비만 남아 있다.
소 재 지 : 명석면 계원리 홍지
연 혁 : 1897년에 건립
기문에 의하면, 처음에 홍복사(洪福寺)이던 것이 홍지암(洪池庵)으로 개칭(1747년) 되었다고 한다. 홍지암 상량문에 의하면, 1891년 중수한 기록과 함께 모원재(慕遠齋)로 개칭되면서 남양홍씨 문중에서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가 1976년 영남유림에서 광제서원으로 격상시켜 매년 음력 3월 10일에 고려 은청광록대부상서(銀靑光祿大夫尙書) 홍의와 고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사공상서(守司空尙書) 보문각 태학사 홍관 양위(兩位)에게 춘향(春享)을 올리고 있다.
앞쪽에 교육시설인 강당과 동·서재를, 뒤쪽에 제향시설인 사당을 마련한 전학후묘의 배치를 나타낸다. 강당은 정면 5칸의 맞배지붕이고 사당인 경충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아름다운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건물 6동 모두가 각각 특색 있는 건축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고려 초기 건축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건축물로 보여지며 보존 가치가 높다.
소 재 지 : 지수면 압사리 압현
배향인물 : 김우옹(金宇顒)
연 혁 : 1902년에 건립
이 서당은 조선 명종·선조 양대에 이조판서와 대제학 및 경연관을 역임하여 문정공(文貞公)의 시호를 받은 동강(東岡) 김우옹의 학업을 기리기 위하여 1902년 건립하였다. 이 서당은 향촌 유림들이 주체가 되어 건립한 서원과 달리 문중이 주체가 되어 건립한 문중서원의 성격을 지닌다.
동강선생은 이황과 조식에게 수학하여 문장과 도학으로 명망이 높았고 20권의 문집과 『속자치통감강목(續自治通鑑綱目)』 15권을 찬하였다. 특히 『속자치통감강목』은 동양사에 대한 저술로, 후세 사학도에게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문정공의 문집 판각 600여 매가 경상북도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1922년 이곳에 굉정각이란 서각을 건립하여 보관하고 있다.
전체 배치는 크게 강학공간·사당·판각을 보관한 전각(殿閣)의 세 부분으로 토석담장을 둘러 구획되어 있다. 일반적인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으로 강학공간은 제일 앞에 놓여지고, 서당을 중심으로 동재가 놓여지는 口자형 배치를 보이는데, 여기서는 동재만 있고 서재가 생략된 형태이다. 그 뒤로 사당과 전각이 나란히 옆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면에만 퇴를 둔 전퇴집이다. 이벌대 기단에 전면과 측면에 3단의 계단을 시설하고, 전면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원형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자연석 덤벙주초에 방형기둥을 사용하였다. 실의 배열은 좌측에 내루가 있는 방 1칸과 방, 대청 2칸, 방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 대청의 정면에 들어열개분합문을, 대청의 뒷벽에는 판장문을 달았으며, 나머지 방에는 문틀 아래 머름이 있는 두짝 세살창을 달았다.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시설하였다. 가구는 5량구조로, 종보 위에 원형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한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집 건물로 측면으로 보아 앞쪽 한 칸은 개방된 퇴칸을 이루었다. 어칸에는 3짝 세살문을 달았고, 협칸에는 두짝 세살문을 시설하였다.
동재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전면에 퇴가 있는 전퇴집 건물로 강당보다 다소 왜소해 보인다. 외벌대 기단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전면에 원형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방형기둥을 사용하였다. 실의 배열은 방-방-대청 2칸-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시설하고 뒷벽에는 판장문을 달았으며, 나머지 방에는 문틀 아래에 머름이 있는 두짝 세살창을 시설하였다.
소 재 지 : 금곡면 죽곡리
연 혁 : 680년경에 건립
서원의 터는 신라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전략상의 요지를 찾아다니다가 이곳 금산 아래에서 진을 치고 휴식하던 중 비몽사몽간에 신령이 나타나 삼국통일 위업의 가르침을 받아 높은 공을 세웠다고 전하는 곳이다. 서원 건립은 680년경에 세워진 김유신의 사당에서 창건연대를 잡고 있으며, 서원으로 완성된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다. 이후 1919년 지방 유림들이 중건하고 경주 서악서원(西岳書院)의 이름을 본떠 남악서원이라고 이름 지었다. 사당에는 김유신과 최치원의 영정, 설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사당·서원·솟을삼문이 남북의 축상에 놓여 있고, 서원 좌우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동·서재가 각각 마주보고 있는 口자형 좌우대칭 배치의 전학후묘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오량가구(五樑架構) 팔작지붕으로 대청이 없고 툇마루가 확장되어 대청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사당은 서원 바로 뒤에 높게 자리하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3량구조 팔작지붕이며 전퇴간(前退間)이 없다.
배향인물 : 정신열(鄭臣烈), 정천익(鄭天益)
연 혁 : 1961년에 재건
이 서원은 문중서원의 성격을 지니며, 고려 병부상서로 거란의 난을 물리친 진양부원군 은열공(殷烈公) 관정(官亭) 정신열과 고려 공민왕 13년(1364) 봄 이 땅에 목면종(木棉種)을 처음 심어 백성에게 따뜻한 목면 베옷을 입힌 고려 공민조 전객령(典客令) 판부사(判府事) 진양군 문충공(文忠公) 퇴헌(退軒) 정천익을 모신 곳으로 진주성 북장대 앞 경절사(擎節祠)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61년 후손들이 이곳에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경덕사(景德祠)와 정교당(正敎堂)을 건립하고 봉남서당(鳳南書堂)이란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숭은사(崇恩祠)와 전사청(典祀廳)을 재건, 청계서원으로 복원하여 매년 음력 3월 15일 사당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서원은 사당·강당·고직사 영역으로 크게 구분되며,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태를 지닌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 6칸의 청계서원 강당이 정면에 나타나는데, 이 마당의 좌우측에는 비석을 2개 배치하였다. 강당의 좌측은 경덕사(景德祠)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강당의 우측은 정면 3칸의 고직사가 있고, 그 뒤로 다시 정면 3칸의 숭은사(崇恩祠)라는 사당을 배치하였다.
○ 옥산서원(玉山書院)
소 재 지 : 미천면 어옥리 어옥
배향인물 : 임탁(林卓), 임억(林億)
연 혁 : 1945년에 건립
배치구성은 사당·서당으로 구성된 영역과 강당·장서각(藏書閣)·재(齋)로 구성된 두 개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두 영역은 돌담을 둘러 구획하고 중문을 내어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두 영역은 완만한 경사지에 남북으로 긴 축선상에 놓여 있으며, 각각의 영역으로 출입할 수 있는 개별 대문을 설치한 특이한 배치를 보이고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전면의 반칸을 퇴칸으로 한 전퇴집이다. 방형으로 다듬은 자연석을 5단 쌓고 갑석을 둘러 마감한 다소 높게 조성한 기단에 8단의 계단을 중앙에 시설하였다. 초석은 원형 초석을 사용하였고, 기둥은 전면과 일부에만 원형 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방형 기둥을 사용하였다. 실의 구성은 방-대청-방-방으로, 오른쪽 방 툇마루에 계자난간을 시설하였다. 대청의 정면에 들어열개분합문을 대청의 뒷벽에는 중앙에 두짝 판장문을 달았으며, 나머지 방에는 두짝 세살문을 달았다. 가구구조는 1고주 5량가로, 중보 위에 동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한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일반적으로 장서각은 전적과 목판 등을 보관, 관리하고 서적을 간행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로, 습기를 멀리하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바닥을 마루구조로 하여 벽은 판자로 막고, 창문은 처마 밑에 조그만 살로만 된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옥산서원의 장서각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면에 퇴칸을 만들고 문틀 아래에 머름을 설치한 두 짝 세살창을 전면에 각각 시설하고 나머지 벽면은 회벽으로 마감하였다. 따라서 전적과 목판을 보관하기에는 불합리한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소 재 지 : 문산읍 옥산리 정동
배향인물 : 정온, 강숙경, 하윤, 유백온, 이제신, 이담, 하천수, 진극경, 박민, 박지서(추향)
연 혁 : 1694년(숙종 20)에 창건하였으나 현재는 유허비만 남아 있음
옛날 이천학사이던 것을 유선생이 돌아가시고 사우를 세워 모시다가 유림이 의논하여 8현을 더하여 9현을 모셨다.
○ 창렬사(彰烈祠)
소 재 지 : 남성동 212-8
배향인물 : 김시민(金時敏),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 등 39분
연 혁 : 조선 선조 때 건립, 1607년(선조 40) 사액
진주성 내에 위치한 이 사당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여 선조 40년(1607)에 사액되었다. 그 후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대승리를 거둔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장군의 신위를 이곳에 함께 모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지금 충무공(忠武公)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시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충청병사(忠淸兵使) 황진,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 등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배치는 사당 영역과 고직사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형식의 사당 3동이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삼문 옆으로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고직사 영역은 사당 영역 한 단 아래에 배치되었으며, 재실과 관리사 1동이 있다.
[재실(齋室)]
『예기(禮記)』의 제통(祭統)편에 “제사라는 것은 봉양이 따라야 하고 효도를 계속하는 것이다. 효는 기르는 것이다. 도리에 순응하며 인륜에 거스르지 않는 것을 기르는 것이다(祭者 所以追養繼孝世 孝子 畜也 順於道 不逆於倫 是之謂畜)”라는 구절이 있다. 제사란 효의 근본으로서 생전에 못 다한 효도와 봉양을 제사를 통해 계속할 수 있다는 뜻이다.
조상숭배는 아직까지 우리의 미풍양속으로 생생히 남아 있다. 문중에서 재실을 신축한다든가, 또는 비석을 크고 화려하게 세우는 일 등이 조상을 신앙의 대상이 아니고 효의 대상일 뿐이며 제사는 죽은 자를 산사람 모시듯 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상숭배라는 것은 부모에 대한 경배이지 신앙은 아니다. 죽은 사람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로 종교의 범위에 들기는 하지만, 관념적으로 죽은 자에 대한 추모이지 신앙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재실 건물에는‘추모(追慕)’,‘원모(遠慕)’,‘경모(敬慕)’ 등의 상징적 현판을 건다.
『예서(禮書)』에 따른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제례는 사당제(祠堂祭)·시제(時祭)·이제(禰祭)·기일제(忌日祭)·묘제(墓祭)의 다섯 가지가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다례(茶禮)·기제(忌祭)·시제(時祭)를 모신다. 그 가운데 시제는 묘사(墓祀)로 불리고 음력 10월 중에 5대조 이상의 선조의 묘소에 가서 지내는 제사를 말하며, 또 시사(時祀) 혹은 시향(時享)이라고도 한다. 이때는 먼 곳에 사는 후손들까지도 참석하는데, 특히 이름난 선조의 시제에는 많은 후손들이 모여 성대하게 의식을 치른다. 이때 제수를 장만하고 제례절차를 의논하고 또한 여러 후손들의 숙박할 곳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것을 위해 재실을 짓게 된다. 집안에 따라서는 수시로 문중들이 모이거나 공부하는 장소로 이용하기도 한다.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널리 퍼지게 된 때는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 이후이며, 조선 초기 “왕릉 주위에 능을 보호하고 제사에 필요한 건물인 정자각(丁字閣)과 재소(齋所)를 두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이, 이러한 건물 형식이 일반 사대부 집안에 제례 관습에도 영향을 끼쳐 재실건축이 나타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예제(禮制)인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앞 다투어 종가에는 가묘가 세워지고 문중마다 재실이 건립되었다. 이 같은 문중 재실은 조선 후기인 17~18세기에 건립이 두드러지는데, 문사(門祠)의 건립 경향, 장자 중심의 제사상속과 재산상속, 중시조의 강조, 동성종족관념의 강화 등과 관련되어 나타난다고 보인다.
일반적으로 재실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재소 형태로 구성되나 묘소 가까이에 위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선현의 사당을 따로 갖추고 재소를 갖는 형식으로 건립하기도 한다. 또 재실에서는 강학의 기능도 겸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재실과 서당, 사우의 구분은 사실상 애매하며, ○○재, ○○사, ○○당, ○○정, ○○정사로 불리어진다.
현재 전국적으로 재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으며, 진주지역에도 『진주누정지』에 의하면 약 500여개가 분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도 문중에 따라 새로 건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 봉산사(鳳山祠)
소 재 지 : 상봉동 879[의병로 149]
배향인물 : 강이식(姜以式)
연 혁 : 1570년(선조 3) 창건, 1976년 재건
고구려 영양왕 9년(598) 임유관전투와 영양왕 23년(612)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30여만명을 무찔러 국운을 바로잡은 고구려 병마도원수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고려 광종1년(950) 장군의 구국충절을 기려 봉산사를 건립하고 매년 한식날을 기해 제사를 모시게 했으며, 조선 선조 3년(1570) 사당을 창건하고 재호를 봉강이라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숙종 40년(1714)에 사당이 중건되었다가 1976년 재건하였다.
비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봉산사는 경사진 대지를 크게 2개의 단으로 나누어 건물을 배치하였다. 상단에는 사당을 배치시키고, 하단에는 강당과 관리사를 배치하였다. 봉산문 아래로 난 높은 계단을 올라 하단에 올라서면, 좌측으로 정면 8칸, 측면 3칸에 문무관(文武館)이라 불리는 철근콘크리트조의 한식 건물이 관리사와 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이며, 그 맞은편으로는 비석 3기가 배치되어 있다.
봉산문과 같은 축상에 있는 대의문(大義門)에 이르면 정면 5칸, 측면 3칸의 평면에 외2출목내3출목의 포작을 한 봉산사(鳳山祠)가 나타난다. 철근콘크리트조에 전통한옥양식을 지닌 이 건물은 층고가 높고 정면의 1칸을 회랑처럼 사용하여 웅장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회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진주시 서부지역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 경절사(擎節祠)
배향인물 : 하공진(河拱辰)
연 혁 : 1990년경 재축
이곳은 고려조 충절신 하공진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향례를 받드는 사당으로 진주성 북장대 근처에 있다. 공은 현종 원년(1010) 왕실의 난을 수호하였고 협상으로 거란의 침략을 막아냈다. 그러므로 나라에서는 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를 추증하고 영정을 기린각(麒麟閣)에 모셨다.
정면 3칸의 경앙문(敬仰門)을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3칸의 충의당(忠義堂)과 수덕재(修德齋)가 거의 같은 평면을 하고 좌우로 마주보고 배치되었다. 대문과 같은 축선상에 난 내삼문을 들어서면 ‘경절사(擎節祠)’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과 그 옆으로 제기고가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2출목3이공의 맞배집으로 포작을 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이 터는 진양하씨 태실지였다고 전해지며 건물이 쇄락하여 1990년경에 재축하였다.
○ 세덕사(世德祠)
소 재 지 : 대곡면 단목리 단목
배향인물 : 하공진(河拱辰), 하식(河湜), 하거원(河巨源), 하을숙(河乙淑), 하렴(河濂), 하순경(河淳敬)
연 혁 : 1974년에 건립
이곳은 고려조 충절신 하공진의 신위와 하식·하신원·하을숙·하렴·하순경을 모신 사당이다. 남북으로 긴 완만한 경사지를 3단으로 구획하고, 외삼문·경모재(景慕齋)를 첫번째 단에 배치하고, 두번째 단에 염수당(念修堂)을, 그리고 가장 높은 마지막 단에 내삼문·계원사(啓源祠)·동서무를 □자형으로 배치하였다.
경모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면의 반칸을 퇴칸으로 한 전퇴집이다. 방형으로 다듬은 자연석을 3단 쌓은 후 갑석을 둘러 조성하고 계단은 중앙에만 시설하였다. 초석과 기둥은 전면에 원형초석과 원형기둥을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사다리형 초석을 놓고 방형기둥을 사용하였다. 실의 구성은 방-방-대청-방의 순으로 배열하였는데, 좌측 방은 뒤로 반칸 물러 앉히고 마루바닥을 다소 높인 내루(內樓)를 만들어 다른 하나의 영역을 만들었다. 가구는 1고주 5량가로 중보 위에 동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한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계원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익공계 건물인데, 장대석을 3단 쌓은 후 갑석으로 마무리한 기단에 좌우로 4단의 계단을 시설하였다. 측면으로 보아 앞쪽 한 칸은 개방된 퇴칸을 이루었다. 전면 3칸 각각에 두짝 판장문을 설치하고 나머지 벽면은 회벽처리하였다.
염수당은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외벌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놓고 콘크리트 원형기둥을 세웠다. 전면 각 칸에 유리를 끼운 두짝 미서기문을 설치하였다.
소 재 지 : 금산면 가방리 가방 659[금산순환로279번길 17-1]
배향인물 : 성여신(成汝信)
연 혁 : 1600년(선조 33)에 건립
진주 부사정은 1600년 경자년에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1546~1632]의 제자와 유림이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부사정사의 여러 건물 중 하나이다. 성여신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창녕이며, 남명 조식의 문인이다. 부사정사는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의 유림들의 강론장으로 사용되었으나 정조 9년(1785) 반구정(伴鷗亭)을 포함하여 18동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이 중 진주 부사정은 곧 중건하였으며, 1995년에는 반구정을, 1997년에는 지은사(知恩舍)·양몽재(養蒙齋)·지학재(志學齋)를 복원하였다.
진주 부사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와가로 어칸 2칸에는 툇마루를 둔 방을 두고 측면칸에는 계자난간을 돌린 마루를 설치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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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7 | 세덕사(世德祠) 배향인물 수정 | 오 : 하신원(河臣源) 정 : 하거원(河巨源) |
2011.08.09 |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 1) 전사청(典祠廳)이라고도 한다 ->전사청(典祀廳)이라고도 한다 2) 서원 연구에서 활용되는 관찬사료, 예를 들면,『조두록』(규장각, NO.1134) ->서원 연구에서 활용되는 관찬사료, 예를 들면,『조두록(俎豆錄)』 3) 배향인물 : 이준민(李俊民), 성여신(成汝信), 하증(河橧), 한몽삼(韓夢參) ->배향인물 : 이준민(李俊民), 성여신(成汝信), 하증(河憕), 한몽삼(韓夢參) 4) 김유신, 최치원, 홍유후, 설총, 문창후 ->김유신, 최치원, 설총 5) 사당에는 김유신과 최치원의 영정, 홍유후·설총·문창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사당에는 김유신과 최치원의 영정, 설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