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1604 |
---|---|
한자 | 金淨 |
영어음역 | Kim Jeong |
이칭/별칭 | 원충,충암,문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북제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동전 |
[정의]
조선 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개설]
충암 김정은 중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형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조광조와 함께 미신타파·향약시행 등에 힘썼으나 기묘사화 때 제주에 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 시호는 문간(文簡).
[활동사항]
김정은 1504년(연산군 1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었다. 이어 수찬(修撰)·정언(正言)·병조정랑·부교리(副校理) 등을 두루 거쳐 순창군수를 지냈다.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를 복위시키고자 상소하였으나 각하되고 유배당했다. 1516년(중종 11) 다시 등용되어 부제학(副提學)·동부승지(同副承旨)·도승지(都承旨)·이조참판(吏曹參判)·대사헌(大司憲)·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 유배되었다. 유배 도중에 금산군수에게 부탁해 허락을 받고, 고향 충청북도 보은군에 두고 온 노모를 만나고 오는 날 다시 소환되어 망명죄의 누명을 쓰고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때 또 다시 정광필의 구원으로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1520년(중종 15) 8월에 제주목으로 유배당하였다. 그의 적거지는 제주읍성 동문 밖 금강사지(金剛寺址)였는데, 결국 그는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1521년(중종 16)에 사약을 받고 제주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제주 유배 기간에 제주향교 교수 김양필, 우생 문세걸 등 제주 유생들과 교유하였다. 제주에 있으면서 「한라산기우제문」·「수정사중수권문」을 지어 제주도민의 교화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적거지 주변에 우물을 파서 그 물을 직접 이용하였다. 그가 지은 『제주풍토록』은 그의 조카에게 제주의 풍물을 적어 보낸 것이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에 『충암문집』, 저서에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그의 시신은 1522년(중종 17)에 충청북도 충주로 옮겨졌으며, 1545년(인종 원년)에 복관되어 1646년(인조 24)에는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1578년(선조 11)에 조인후 제주판관에 의해 충암묘가 건립되었으며, 1665년(현종 6)에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