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15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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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瑪瑟 |
영어음역 | Gumaseul |
영어의미역 | Marcel Lacrouts |
이칭/별칭 | 마르셀 라크루,마르첼리노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이정자 |
[정의]
1900년대 제주도에서 활동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개설]
본명은 마르셀 라크루(Marcel Lacrouts), 세례명은 마르첼리노이다. 1871년 5월 1일 프랑스 아키텐주 지롱드 데파르트망의 주도인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1890년 9월 15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94년 7월 1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94년 8월 29일 프랑스를 출발하여 2개월 후인 10월 2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입국 후 1900년 6월 5일 제주도로 부임하였다.
[활동사항]
부임 당시 제주도는 외국인을 불신하는 토착민, 선교사들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지방관리들, 그리고 선교사들의 환심을 사려는 유배인들로 이루어진 다층적인 주민구성으로 전교의 어려움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구마슬은 제주 성내와 서흥리에 교회당을 세우고 마을에는 공소(公所)를 두어 포교를 시작하는 등 교회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그러나 1901년 이른바 이재수의 난으로 불리는 제주도신축교난(濟州島辛丑敎難)이 일어나 제주도민과 가톨릭교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자 교도들을 이끌고 제주읍성을 방어하였다. 이어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프랑스 함대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9일 제주읍성이 함락되고 300여 명의 교인이 학살되었다. 구마슬은 교난이 진정된 후 학살된 교인들을 매장할 공동 안장지를 제공해 줄 것을 제주 목사에게 요청하고, 1903년 4월 황사평(黃蛇坪)을 매장지로 양도받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09년(융희 3년) 10월에는 여성교육기관으로 신성여학교(晨星女學敎, 현 신성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 힘썼다. 1918년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고국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1920년 다시 한국에 돌아와 전교활동을 하던 중 1929년 8월 11일 폐결핵이 악화되어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