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1557 |
---|---|
한자 | 金海金氏 |
영어음역 | Gimhae Kimssi |
영어의미역 | Gimhae K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집필자 | 김동전 |
입향시기/연도 | 1392년|1404년(태종 4)|1550년(명종 5)|1593년(선조 26)|1621년(광해군 13)|1632년(인조 10)|1646년(인조 24)|1689년(숙종 15) |
---|---|
성씨시조 | 김수로왕(金首露王) |
입향시조 | 김만희(金萬希)|김영선(金永善)|김신명(金信明)|김기손(金冀孫)|김근한(金近漢)|김돈(金敦)|김응주(金膺珠)|김여선(金汝善)|김용남(金龍南)|김관(金寬)|김논서(金論瑞)|김예보(金禮寶) |
[정의]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고 김만희·김돈·김응주 등을 입도조로 하는 제주의 세거 성씨.
[연원]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제12세손 김유신(金庾信)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대소 98파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김유신의 직계종파(直系宗派)는 고려의 김목경(金牧卿)을 중시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김목경(金牧卿)의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중시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 김관(金管)을 중시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이다.
[입향경위]
김해김씨의 제주도 입도는 오랜 기간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명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만희(金萬希)는 중시조 김유신의 38세손으로 고려 유신으로 조선왕조 등극 후 출사를 거부하고 태조 원년(1392) 제주에 유배 입조되었으며, 애월읍 곽지리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 자가 여운(汝雲), 호가 창재(暢齋)였으며,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찬성사(左贊成事)를 거쳐 삼중대광 도첨의 좌정승(三重大匡都僉議左政丞)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김영선(金永善)은 시조 김수로왕의 62세손 중조 김녕군목향경파(金寧君牧鄕京派) 12세손이다. 김영선(金永善)은 1404년(태종 4)에 내란으로 인한 피란으로 제주에 입도하였다.
김복모(金福模)는 고려 충정왕 때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역임한 중조 김관(金管)의 10세손이며 1540년대에 제주목에 정착하였다. 세칭 ‘조천김씨(朝天金氏)’라 불릴만큼 이 일대의 후손들이 퍼졌으며 김응빈(金膺斌)·김명식(金明植) 등 명사들이 배출되는 터전을 닦았다.
김신명(金信明)은 중시조 김탁(金琢)[文敬公으로 고려 충혜왕 때 보문각 대제학]의 8세손이다. 김신명(金信明)은 1514년(중종 9)에 김효충(金孝忠)의 3남으로 태어나 성균관진사에 오르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1550년(명종 5)에 사화를 피해 제주에 낙향하여 대정현 신도리에 정착하였다. 낙향 후에는 제주목사를 역임한 증조 김수연(金壽延)의 선정을 기리며 유유자적하였다.
김기손(金起孫)은 시조 김수로왕의 60세손이며 중조 김관(金管)의 12세손이다. 경상도 하동에서 출생하여 통정대부로 훈련판관을 역임하였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의 전란을 피해 가족을 제주목 외도에 정착시킨 후 다시 출륙하여 지리산 일대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김근한(金近漢)은 시조 김수로왕의 60세손이며 중조 김관(金管)의 12세손이다. 1578년(선조 11) 한양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문과에 급제한 후 검교(檢校)를 거쳐 1620년(광해군 12)에 한성부윤으로 있다가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벼슬에서 물러나고 명리(名利)를 떠나 제주에 낙향하여 한경면 판포리에 정착하였다.
김돈(金敦)은 중시조 김유신의 37세손이며 중조 김목경(金牧卿)의 9세손으로 1620년대에 정의현감으로 제주에 도임했다가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출륙하지 않고 제주에 눌러 살게 되었다.
김응주(金膺珠)는 고려 충혜왕 때의 중신(重臣) 중조(中祖) 김익경(金益卿)의 9세손으로 1621년(광해군 13)에 직제학 수찬관으로 재직하다가 김직재(金直哉)의 무고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되었으며, 조천읍 함덕리에 정착하여 후학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였다.
김여선(金汝善)은 중조(中祖) 김익경(金益卿)의 후손으로 1632년(인조 10)에 제주목에 정착하였다. 김용남(金龍南)은 시조 김수로왕의 64세손 중시조 김경신(金敬臣)의 15세손으로 1646년(인조 24) 선략장군(宣略將軍) 훈련원주부로 제주판관으로 도임하여 제주목 신촌리에 정착하였다.
김관(金寬)은 중조(中祖) 김익경(金益卿)의 9세손으로 1647년(인조 25)에 제주목사로 도임하는 조카 김여수(金汝水)를 따라와 제주목 화북리에 정착하였다. 김논서(金論瑞)는 중조(中祖) 김익경(金益卿)의 후손으로 인조 때에 병조의 일을 맡고 있다가 휘하 병졸이 큰불을 내어 화가 미치자 사직하고 노모를 모시고 제주로 낙향하였다. 제주고씨를 배우자로 맞아 입도조로서의 터전을 닦았다.
김예보(金禮寶)는 양의공(襄義公) 김경서(金景瑞)의 현손이다. 숙종 때에 장희빈 소생의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 등 서인의 중신들이 반대 상소를 올리는 등 세론(世論)이 들끓고 마침내 기사환국(己巳換局)에 연루되어 1689년(숙종 15) 제주에 유배되었다. 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벼슬길이 트였으나 나가지 않고 후학을 가르쳤다.
[현황]
제주에 거주하는 김해김씨는 대성으로 경파(京派), 사군파(四君派), 삼현파(三賢派),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 문경공파(文敬公派), 양의공파(襄義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등이 고루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