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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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允愛- |
영어음역 | Hong Yunae Mudeomteo |
영어의미역 | Hong Yunae's Grave Sit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1동 300-6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동전 |
성격 | 무덤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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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1동 300-64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유배된 선비 조정철(趙貞喆)을 위하여 순절한 홍윤애의 무덤 터.
[개설]
조정철을 극진히 사랑했던 홍윤애는 연인의 죄를 추궁하는 제주목사의 가혹한 고문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연인의 생명을 구해냈다. 그로부터 30년 뒤(1811) 조정철은 제주목사로 도임하여 손수 이 무덤을 단장하고 애절한 시비를 세웠다.
1940년 무덤 터 일대에 제주공립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북제주군 애월읍 유수암으로 이장하였다.
[변천]
1775년(영조 51) 스물다섯 살에 과거에 합격한 조정철은 1777년(정조 1)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그 해 9월 제주도로 유배돼 27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러다 1781년(정조 5)에 제주목사로 김시구가 도임했다.
김시구는 신임사화 때 처형된 김일경의 일파로 조정철 일가와는 깊은 원한을 가진 집안이었기 때문에 부임 초부터 조정철을 죽일 궁리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조정철의 귀양살이를 거들며 연모의 정을 품고 있었던 홍윤애는 김시구에게 붙들려 고문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녀가 불복하자 큰 곤장을 만들어 70대를 치는 바람에 뼈가 부서졌고, 결국 김시구의 부당한 처사를 원망, 저주하면서 목매달아 죽었다.
이 사건이 조정에 알려지자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박천영 어사가 파견되었다. 결국 김시구는 부임 4개월 만에 잡혀가고, 공모했던 판관도 파직되었다. 조정철은 투옥되어 여러 달 문초를 겪은 뒤 풀려나 정의현으로 이배되었고, 홍윤애는 죽은 지 17일 만에 이곳에 묻혔다.
조정철은 그로부터 22년 뒤인 1811년(순조 11)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 교리로 제수되었고, 8년 뒤인 1819(순조 19년)에는 제주목사로 도임하게 되었다.
그는 목사로 부임하자마자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 손수 글을 지어 비를 세우고 무덤을 단장했다. 그는 묘비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홍의녀(洪義女)는 아전 홍처훈(洪處勳)의 딸이다. 1777년에 내가 죄인으로서 이곳에 안치되었을 때, 의녀는 나의 적소를 출입하였다. 1781년에 제주목사가 의녀를 미끼삼아 내 죄를 꾸미고자 의녀를 문초하였다.
혈육이 낭자하여 죽게 되었지만, 의녀는 ‘공의 목숨이 나의 죽음에 있다’고 하여 불복하고, 형틀에 매달려 순절한 것이 그 해 윤 5월 15일이다. 그 뒤 31년이 흘러 내가 임금이 은총을 입어 이곳에 방어사로 오게 되었다. 여기에 묘비문을 지어 기리노라.
옥을 묻고 향을 묻은 지 문득 몇 해이런가? 瘞玉埋香奄幾年
네 억울함을 누가 저 하늘에다 호소하리오? 誰將爾怨訴蒼旻
황천길은 멀고 먼데 돌아가면 누굴 의지할꼬? 黃泉路邃歸何賴
충직함을 깊이 새기었으니 죽음 또한 인연일까? 碧血藏深死亦綠
꽃다운 이름은 천고에 아욱처럼 맵게 기리우리니 千古芳名蘅杜烈
온 집안의 높은 절개 아우 언니 모두 어질었다오. 一門雙節弟兄賢
열녀문을 높게 짓기는 이제 어려우나 烏頭雙闕今難作
마땅히 무덤 앞엔 푸른 풀이 돋아나리라. 靑草應生馬鬣前
덧붙이기를, 홍낭은 나의 화를 늦추기 위하여 목을 매어 죽었다. 또 그 언니는 참판 이형규(李亨逵)의 부실(副室)이었는데, 이공이 죽자 역시 독약을 먹고 순절하였다”라고 썼다.
[현황]
조정철은 귀양살이 중 은혜를 입은 적소의 주인과 제주도민들에게 보답하였는데, 제주 청년을 외손녀 사위로 맞이하기도 했다. 그는 재임 중 동서성 외곽을 개축하여 왜적에 대비하고, 감귤 재배를 권장하기도 했다.
그는 『정헌영해처감록』을 남겼는데 제주 귀양살이의 심회를 적은 시문집으로 역사적·문학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정철이 세운 홍윤애의 비는 북제주군 애월읍에 옮겨져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