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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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世勳 |
영어음역 | An Sehun |
이칭/별칭 | 죽산(竹山),근해(槿海),안요검(安堯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허호준 |
성격 | 항일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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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
성별 | 남 |
생년 | 1893년(고종 30) |
몰년 | 1953년 |
본관 | 죽산 |
대표경력 | 제주도 인민위원회 위원장|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위원장 |
[정의]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개설]
본관은 죽산. 호는 근해(槿海). 일명 안요검(安堯儉)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안태환(安台煥)이다.
[활동사항]
유년기에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을 익힌 후, 전라남도 광산군 하남면 장덕리로 가서 다시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에게 한학을 배웠다. 1914년 조천리에 근대식 서당인 신명사숙(新明私塾)이 개설되자 김순탁(金淳鐸)과 함께 사장(師丈)이 되어 후학을 가르쳤다. 1919년 일어난 조천 만세 운동을 보면서 민족 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26년 6월 만주 간도로 가서 간도간민교육연구회 상임서기가 되어 계몽 운동을 하였다. 1930년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35년경부터 김시용(金時容)과 김유환 등을 만나면서 공산주의 운동을 접하게 되었다.
1937년 10월 하순 오사카에서 노동 운동에 종사하다가 숨진 김문준(金文準)의 유골이 돌아오자, 김시용·김유환 등과 의논해 조천리 구(舊) 면사무소에서 추도식을 거행하면서 식사(式辭)를 통해 고인의 활동을 주민들에게 알렸다.
일제는 1932년 제주에서 좌익적 색채를 띤 조합, 단체들에 대해 자발적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신좌소비조합만은 해산하지 않은 채 안세훈을 비롯하여 김시용·김유환 등이 조합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신좌소비조합은 상품을 싼값으로 판매하여 다른 상점의 폭리를 막고, 이익은 대중을 위하여 유효하게 사용함으로써 장래의 항일 운동을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42년 일제는 신좌소비조합이 대중에게 좌익 사상과 반전 사상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안세훈·김시용·김유환·현사선(玄巳善)·김평원(金平遠) 등을 검거하였다. 이 사건으로 안세훈은 1942년 8월 1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광복 후에는 오대진(吳大進)을 이어 제주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2월 23일에 결성된 좌익 세력의 통일 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지부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1947년 2월 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조선공산당의 3당 합당으로 결성된 남로당의 제주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3·1절 기념 시위 사건에 참여하여 1947년 10월 미군정 포고령 제2호 및 법령 제19호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출옥 후 1948년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김달삼(金達三)·강규찬·고진희·강문석(姜文錫)·송성철·고경흠(高景欽) 등과 함께 월북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던 전라남도 광산군 하남면 장덕리에 있는 안병택의 손자의 집에 2년 가까이 지하 생활을 하다 1953년 4월 15일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