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171 |
---|---|
한자 | 宋斗玉 |
영어음역 | Song Duok |
이칭/별칭 | 귤헌(橘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나영 |
[정의]
조선 말기 제주판관을 역임한 무신.
[가계]
호는 귤헌(橘軒). 제주목 성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송신(宋藎), 형은 위죽당(爲竹堂) 송지옥(宋之玉)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구한말 당대의 부호이다.
[활동사항]
1892년(고종 29) 7월, 안승관(安承觀)의 후임으로 제주판관에 부임했다가 같은 해 9월에 떠났다. 짧은 기간 재임하면서 자신이 받은 급료를 내어놓고 낡은 폐단을 개혁하여 주민들이 그의 송덕비를 세웠다.
1893년 5월부터 1894년 2월까지 하흥도(河興道)의 후임으로 대정군수로 재임하였다. 재임 중인 1893년 가을 기근이 심해 주민들이 기아 상태에 빠지자 1894년 봄에 쌀 100석을 내놓아 굶주린 주민들을 진휼하였다. 또한 대정향교를 보수하였다. 그 뒤 마종문(馬鐘文)의 후임으로 정의군수로 부임하였는데, 부임과 퇴임 시기는 알 수 없다.
1898년(광무 2) 1월 방성칠이 민란을 일으키자 전 현감 홍재진과 함께 창의소(倡義所)를 설치하고 의병을 모아 주모자 방성칠 및 모사 강벽곡(姜辟穀)을 체포·주살하고 민란을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홍재진(洪在晋)·김남윤(金南胤) 두 명과 함께 가자(加資)되어 품계가 올라갔고 제주목사 이병휘(李秉輝)는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다. 1901년 다시 신축민란이 일어나 제주성이 함락되자 홍재진과 함께 목포로 피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