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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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苦難-克復-三多三無 |
영어의미역 | Strong Will of Jeju People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집필자 | 김동윤 |
[개설]
삼다(三多)는 돌 많고[石多], 바람 많고[風多], 여자 많다[女多]는 것을 의미하고, 삼무(三無)는 도둑 없고[盜無], 거지 없고[乞無], 대문 없다[大門無]는 것을 의미한다. 삼다가 유달리 어려웠던 제주인의 환경을 집약하고 있다면, 삼무는 갖은 고난에 대처하고 이를 극복한 제주인의 강인한 의지가 성취한 표상이다.
누구보다 제주를 사랑했던 곤충학자 석주명이 제주도의 지역적 특성을 ‘삼다삼무의 섬’으로 함축한 이래 삼다삼무는 제주도의 상징어가 되었고, 제주도는 삼다도 혹은 삼무도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의 제주특별자치도기(濟州特別自治道旗)도 삼다삼무기로 제작되었다.
[고난의 상징 삼다]
제주도에는 돌이 많다. 검은 돌, 빨간 돌, 흰 돌 등이 즐비하고, 집의 담장도 돌로 쌓고, 농토의 경계도 돌을 쌓아 구분한다. 이렇게 제주인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돌과 인연을 갖기에 ‘돌에서 왔다가 돌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비유할 수 있다. 제주인은 길돌 구들 위에서 태어나서 산담에 둘러싸인 작지왓(자갈밭)의 묘 속에 묻힌다.
사는 집의 벽체가 돌이며, 또 울타리와 올레 그리고 수시로 밟고 다니는 잇돌(디딤돌)이 모두 돌이다. 생산 활동의 터인 밭들이 돌밭(자갈밭)이요, 밭담도 모두 돌이요, 어장도 온통 돌이다.
이처럼 돌이 많아 기름진 땅이 귀하고 물이 귀한 섬이 되었다. 제주도는 우리나라 최다우지이지만 화산재와 화산 쇄설물로서의 자갈과 암괴로 덮여 있는 섬이기에 지표수가 존재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지하수를 개발하여 물 걱정에서 벗어났지만, 과거에는 물을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주도의 바람은 그 종류가 많기도 하고 그 이름도 다양하여 샛바람(남동풍), 마파람(남풍), 갈바람(서풍)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제주도의 연평균 풍속은 4.7m로서 서울 2.5m, 중강진 1.3m에 비해 훨씬 강하다. 태풍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통과하는 곳이 제주도이다.
제주도가 이처럼 강풍과 다풍 지역이 된 것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단이라는 위치, 그리고 낙도인 도서라는 조건에 기인한다. 바람은 한여름의 가뭄을 해갈시키기도 하고, 수중의 해초류를 뜯어 올려 거름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등 생존에 유리함도 주었지만, 불리한 조건을 더 많이 주었다. 영등 달의 영등 바람이나 태풍으로 인해 재난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바다에 나가 일을 할 때 힘들게 했으며, 외부와의 교통에도 장애가 되었다.
바람은 제주인의 의·식·주 등 모든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미끈한 ‘상모루’를 하고 지붕을 단단하게 얽어매고 다동분립형(多棟分立型)의 살림집을 갖게 된 것, 수건이나 정동모를 착용하는 것, 해조류를 퇴비로 이용하는 것, 등짐으로 운반하는 것, 큰 목소리를 지르게 되는 것 등 모두가 바람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제주도는 자연지리적으로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이어서 누구나 자기 몫을 맡아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노인들도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자식의 봉양을 받지 않고 생활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아이들도 밭 일과 집안 일을 함께 해야 하는 노동력의 개체였다.
여성들은 고된 물질이나 밭 일 또는 집안 일을 담당해 내며 격랑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해녀들은 동북아시아 일대의 바다 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물속 20m까지 오락가락하면서 주어진 삶을 다져왔다. 여성들이 집안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밭 일이나 바다 일을 가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해냈기에 여자가 많은 섬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인구 통계를 분석, 인지한 결과가 아니라 직관에 의한 인식이었다.
[극복의 상징 삼무]
‘도둑이 없다’라 함은 노동의 대가 없이 함부로 남의 물건을 취하지 않으며, 범죄가 없는 정의 사회, 곧 정의가 실현되는 밝은 사회를 뜻한다. 이는 제주인들이 한결같이 정직하고 순박하여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능력껏 처리하였으며 남에게 기대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주인들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정직함과 순박함을 생명으로 삼았고 인간 본연의 질서를 목숨보다 더 존중하였다. 이러한 제주인들의 생활 의지의 바탕에는 박대 속에서도 자아를 굽히지 않는 자강(自彊)의 의지와 굶주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부정과 불의는 저지르지 않는다는 기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거지가 없다’ 라 함은 근검·자주·자립·자조·자족의 생활 원리가 도민들의 일상에 뿌리 깊이 내려졌다는 말이 된다. 제주의 땅은 척박하고 오랜 세월 도민들은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번번이 몰아치는 갖은 재난이 힘들게 하는 데도 제주인들은 참고 견디며 살아왔다.
최선을 다하여 부지런히 일을 했으며 물건을 철저히 아껴 썼다. 자신의 생활은 하나에서 열까지 혼자 짊어지고 감당하였으니, 노동을 외면한 수익을 바라거나 남을 의지하고 빌어먹는 일이란 사람의 삶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이는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당시의 거지는 숫자로 헤아릴 수 있는 정도였다. 이들이 섬을 돌며 1년에 한 번쯤 나타나면 오히려 빈객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동녕바치’로 불리던 이들 걸인은 어쩌면 기다려지기도 했던 존재로, 엄격한 의미에서 일반 거지와는 달랐다.
도둑이 없고 거지 없는 조건은 ‘대문이 없다’는 풍속을 낳았다. 재래의 제주 가옥에는 대문이 없었고, 대신 길에서 마당까지 연결된 골목인 올레에 양편으로 정주목을 세우고 거기에 정낭을 걸쳐 두었다. 정낭을 내리거나 걸쳐 두어 주인이 있고 없음을 나타내었고, 마소의 침입을 방지하는 역할도 했다. 올레와 정낭의 존재야말로 심적 여유와 수분지족(守分知足)의 마음가짐, 상호 신뢰의 태도를 함축하는 것이다.
요컨대 도둑 없음은 정직하고 순박하게 살면서 질서를 지켜 나가는 제주인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으니, 여기에는 자존(自尊)·자강(自彊) 의식이 깔려 있다. 거지 없음은 어떤 가난과 곤경에 부닥치더라도 자주(自主)·자조(自助)·자강하면서 부지런히 아껴 살아 나가려는 자력적인 요소가 강하다. 대문 없음은 서로 믿고 도우며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이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