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7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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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明道菴先生遺墟碑 |
영어음역 | Myeongdoam Seonsaeng Yuheobi |
영어의미역 | Memorial Stone for Master Myeongdoam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봉개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홍순만 |
성격 | 유허비(遺墟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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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965년 |
관련인물 | 명도암(明道菴) 김진용(金晋龍) |
높이 | 200㎝ |
너비 | 71㎝ |
소재지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봉개동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조선 중기 김진용(金晋鎔)의 교육 진흥의 공덕을 기리는 비.
[개설]
김진용은 이익(李瀷)[1579~1624]에게 수학하여 과거에 급제한 뒤 성균관에 유학, 경학과 전강에 합격하였다. 이후 숙녕전(肅寧殿) 참봉(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제주에 머물렀다.
[건립경위]
김진용이 제주에 은거하면서 훈학에 힘쓰는 한편 1659년에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회(李禬)에게 건의하여 제주 교육 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장수당(藏修堂)을 세워 육영에 평생을 바쳤다. 이러한 김진용의 공을 기리기 위해 명도암 선생 유허비가 세워졌다.
[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봉개동 명도암 안세미오름 북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형태]
비신(碑身)의 너비는 71㎝, 두께는 39㎝, 전체 높이는 200㎝이다.
[금석문]
앞쪽에는 “명도암선생유허비(明道菴先生遺墟碑)”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남명(南溟)의 영봉(靈峰)인 한라산의 저정(儲精)이 뻗어 그 동북 기슭 육십여리(六十餘里)에 명도암오름[明道菴兀音]을 이루었으니 수석(水石)이 유수(幽邃)하고 수기(秀氣) 감도는데 열천(冽泉)을 사이에 둔 이곳 안태전(安胎田)은 바로 선생(先生)이 거처(居處)를 복(卜)하여 양덕상지(養德尙志)하신 유허(遺墟)이니라.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휘(諱)는 진용(晉鎔)이요, 자(字)는 진숙(晉叔)이며, 선생(先生)이 명도암(明道菴)에 은거 수도(隱居脩道)하시매 세인(世人)이 경모(敬慕)하여 명도암 선생(明道菴先生)이라 일커렀다.
선생(先生)은 광산김씨(光山金氏)로서 여조(麗朝) 문하시중(門下侍中) 휘(諱) 태현(台鉉)을 중시조(中始祖)로 도염령동정(都染領同正) 휘(諱) 일(逸)을 입해시조(入海始祖)로 모시니 이로써 탐라(耽羅)의 문물교화(文物敎化) 자못 쇄신(刷新)된 바 있더니, 선생(先生)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유가(儒家)로서 일찌기 뜻을 성현(聖賢)의 학(學)을 두고 연학상지(硏學尙志)로 능(能)히 황무(荒蕪)를 기제(旣除)하니 남방(南方)의 교화(敎化) 울연(蔚然)히 이룩되어 드디어 만인숭앙(崇仰)의 유종(儒宗)이 되시니라.
선생(先生)은 이씨조선(李氏朝鮮) 선조(宣祖) 을사(乙巳)에 강생(降生)하시니 천성(天性)이 고명(高明)하고 재질(才質)이 특출(特出)하여 유시(幼時)에 적거중(謫居中)인 간옹(艮翁) 이익 선생(李瀷先生)에게 수학(受學)하시다 인조(仁祖) 을해(乙亥)에 사마(司馬)에 오르셔 반궁(泮宮)에 출유(出遊)하시고 숙녕전참봉(肅寧殿參奉)에 서(敍)함을 입자 사(辭)하고 귀향(歸鄕)하니 본지(本志) 사환(仕宦)에 있음이 아니러라.
이래(爾來) 준재(俊才)를 모아 성현(聖賢)의 길을 강(講)하며 육영(育英)에 힘써 오시더니 효종(孝宗) 무술(戊戌)에 만오(晩悟) 이공(李公) 괴(襘) 목사로 도임(到任)하자 우선(于先) 흥학(興學)을 첫 사업(事業)으로 삼고저 선생(先生)께 조규방략(條規方略)을 자방(諮訪)하매 선생(先生)이 더불어 경륜(經綸)하여 학사창건(學舍創建)에 이르니 이것이 장수당(藏修堂)으로 오늘의 오현단(五賢壇)이 바로 그 유서지(由緖地)요 탐라상교(耽羅庠校)의 효시(嚆矢)라.
이로 말미암아 교학(敎學)이 흥륭(興隆)하고 인재배출(人才輩出)이 이루 헤아릴 바 아니니 선생(先生)의 공(功)은 청사(靑史)에 길이 전(傳)할지어다. 계묘(癸卯)에 서거(逝去)하시니 향년오십구(享年五十九)라.
순조(純祖) 임진(壬辰)에 목사(牧使) 이공(李公) 예연(禮延)이 선생(先生)의 유덕(遺德)을 흠앙(欽仰)하고 사림(士林)의 요망(要望)도 있어 영혜사(永惠祠)에 종향(從享)하고 헌종(憲宗) 계묘(癸卯)에 지주(知州) 이공(李公) 원조(源祚)가 따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고영곡득종(高靈谷得宗)과 병향(幷享)하여 왔으나 고종(高宗)의 신미(辛未)에 대동철향(大同撤享)되더니 계사(癸巳)에 사림(士林)이 모여 향현사유허비(鄕賢祠遺墟碑)를 건립(建立)하였도다.
이제 또 선생(先生)의 후손(後孫)들이 모여서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선조(先祖)의 유덕(遺德)을 현양(顯揚)코자 하니 참으로 감격(感激)할지어다 희(噫)라. 선생(先生)은 일찍기 산림(山林)에 은거(隱居)하면서 연학(硏學)과 육영(育英)으로 생애(生涯)를 마치신 분으로 탐라(耽羅)의 해황(海荒)을 깨치시고 향토(鄕土)에 헌신(獻身)하여 그 교화(敎化)는 부유(婦孺)에게까지 미치게 되니 참으로 거룩하시도다.
길이 그 유지(遺志)를 계승(繼承)하여 선생(先生)의 위업(偉業)을 보람 있게 할지니라. 문학박사(文學博士) 연안(延安) 이숭녕(李崇寧) 찬(譔) 안동(安東) 김충현(金忠顯) 서(書) 선생악강지육주(先生嶽降之六周) 을사시월일립[乙巳十月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