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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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gudeul |
영어의미역 | hypocaust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집필자 | 김태일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에서 흔히 방(房)이라고 부르는 생활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온돌 설비가 없는 상방과 구별되는 공간.
[개설]
수면, 휴식, 학습 등 사적 공간으로 온돌 설비가 된 곳을 구들이라 부른다. 바닥은 유지 바름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구들의 크기는 2.0~2.2m이며 높이는 1.9~2.0m로 낮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고팡(곡식을 보관하는 공간)에 접한 구들을 큰 구들이라 하고, 이외의 구들을 작은 구들(혹은 조근 구들)이라 한다. 큰 구들은 부부, 유아, 내객의 침실로 쓰이며, 조상신의 제사 등이 이루어지는 주요 공간이다. 상방에는 온돌 설비가 없으나 구들방의 일종인 난방 공간으로 굴묵이 있다. 이 굴묵을 통해 솔잎, 혹은 보리 고스락 등을 태워 난방을 하였다.
구들에서 상방으로 통하는 문은 출입용이고, 마당 쪽으로 한지를 바른 채광 및 조망용으로 만들어진 문은 창문이라 한다. 이 창문에는 비바람에 대비하여 세살문이나 반문으로 된 덧문이 붙여졌다.
[역사]
우리나라에서 구들이 언제부터 설치되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중국 문헌에 기록된 고구려의 살림집에 관한 내용에는 구들 시설이 있어 겨울철에 따뜻하게 지낸다고 되어 있으며, 구들을 중국에는 없는 고구려적 특색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조령원구기(鳥嶺院舊基)의 발굴 조사 때 고려 시대의 건물터에서 구들고래의 시설이 발견되어, 고려 시대에는 이미 구들이 소백산맥의 남쪽 지역에까지 설치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는 구들이 조령을 넘어 남부 지방으로 남하하고 있는 사실을 여러 기록에서 밝혀주고 있다. 즉 선산·상주·안동 등지의 관아와 궁실에 관계되는 건축물들이 보수되거나 신축된 사실을 기록한 「초중창 중수기」에 따르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시설을 구비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이러한 구들 전파의 예는 제주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15세기 말엽에 벼슬한 제주 출신의 고득종(高得宗)이 기록한 「홍화각 중수기(弘化閣重修記)」에는 구들을 서쪽 방에 설치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의 사항을 기록한 『동국여지승람』에는 “백성들의 집에는 아궁이와 구들이 없어 땅바닥에서 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7세기 후반에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형상(李衡祥)의 『남환박물지』에도 제주도 민가에는 구들이 없다고 되어 있다.
같은 기록을 남긴 이익(李瀷)도 자신이 살고 있었던 시절에 제주 지역 민가에 비로소 방 하나 정도에 구들 시설이 존재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백성들의 집에 구들이 보급되기 1, 2세기 전에 관리들의 집에는 구들이 시설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선산 지방 일대의 경우 역시 관료들에 의하여 선도되고 백성들에게 보급된 것은 그보다 뒤졌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중앙 관리가 향리에 돌아와 사는 집이나 궁실에 연관된 사찰 등에는 구들 놓은 방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구들은 병을 치료하는 시설로 활용되기도 하고 노인들을 위한 시설로 이용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