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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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鷄林同志會 |
영어음역 | Gyerim Dongjihoe |
영어의미역 | Gyerim Companion Associ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창후 |
[정의]
일제 강점기 제주 지역 출신 김봉각이 일본에서 설립했던 비밀결사.
[개설]
김봉각은 조천면 신흥리 출신으로 계림 동지회를 조직하여 동지들을 규합하다가 검거되어 실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조국에 잠시 돌아왔다가 1946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총련의 주요 간부직을 맡아 활동했으며 사업가로도 성공하였다. 1991년 조천만세동산에 3·1 만세 운동 기념탑을 새롭게 조성할 때 5억 원의 사재를 기부하기도 하였다. 1999년에 도쿄에서 생을 마쳤다.
[설립 목적]
조선 독립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독서회적 성격의 비밀 결사 단체인 계림 동지회를 결성하였다.
[변천]
1940년에 김봉각은 일본 도쿄에서 공부하며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졸업 후 오사카의 자물쇠 공장 사무원으로 일하던 김봉각은 일본에 있던 오사카 전문학교 야간부생으로 재학 중이던 강금종(姜金鍾)·한만숙(韓滿淑)·고봉조(高奉朝)·김병목(金丙穆)·부림전(夫林佺) 등을 알게 되었다. 김봉각은 이들과 여러 차례 비밀리 모여 “조선 청년의 나아갈 길은 오직 민족 해방을 위해 헌신하는 길이다”라고 역설하면서 조선 독립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였다.
1940년 5월 초에는 흥아 연구회(興亞硏究會)라는 독서회를 통해 서로 수양하며 실력 향상에 힘쓸 것을 결의하였다. 같은 해 5월 26일에 행동 방침으로 조선 독립 탈환에 매진할 것, 인텔리층을 확보해 지도 체제를 강화할 것, 마르크시즘과 삼민주의를 중심 과제로 연구할 것 등을 결의하고 흥아 연구회를 계림 동지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활동 사항]
계림 동지회 회원들은 오사카 전문학교의 교포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발전시켜 나가기로 하고 조직의 당면 과제를 추진하기 위해 조직 부서를 나누어 맡았다. 조직 및 자금책은 김봉각, 교육책은 강금종, 연락책은 김병목이 각각 담당하였다. 아울러 정치 이론은 김봉각, 사상 이론은 강금종, 문예 종교는 김병목, 세계 동향은 고봉조가 각각 맡아 연구하기로 하였다.
결의 사항으로는 조직에 대해 절대 비밀로 할 것, 회합 시는 조선말만 쓸 것, 각자의 연구 과목은 차기 회합에서 순차적으로 발표할 것, 조선 부녀자들에게도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도록 노력할 것, 회합은 매월 첫째 주 일요일로 할 것 등을 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1941년 2월 25일에 회원 6명 전원이 일제에 검거되고 김봉각이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음으로써 계림 동지회는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