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6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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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濟鎬 |
영어공식명칭 | Jung Jeho |
이칭/별칭 | 만포(晩圃),시순(時舜)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성미 |
출생 시기/일시 | 1821년 - 정제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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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7년 - 정제호 알성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89년 - 정제호 가주서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91년 - 정제호 부사과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92년 2월 - 정제호 성균관전적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92년 5월 - 정제호 성균관지평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95년 - 정제호 을미사변 발발 후 사직하고 낙향 |
몰년 시기/일시 | 1897년 - 정제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04년 - 정제호의 효행을 기려 조정에서 정려 하사 |
출생지 | 익산 - 전라북도 익산시 |
거주|이주지 | 익산 - 전라북도 익산시 |
사당|배향지 | 백산서원 - 전라북도 익산시 동서로3길 15[모현동2가] |
성격 | 문신|효자 |
성별 | 남 |
본관 | 연일(延日) |
[정의]
개항기 익산 출신의 효자이자 문신.
[가계]
정제호(鄭濟鎬)[1821~1897]의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자는 시순(時舜), 호는 만포(滿圃)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유증(鄭有曾)이고, 할아버지는 정택응(鄭宅膺)이다. 아버지는 북촌(北村) 정석행(鄭碩行)이며, 어머니는 교관 이의술(李宜述)의 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훈련원첨정을 지내고 경술국치 때 자결한 애국지사 정동식(鄭東植)이 아들이다.
[활동 사항]
정제호는 1821년(순조 21) 익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자 홀로 남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1889년(고종 26)에 69세의 나이로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뒤늦게 관직에 진출한 뒤 1889년 12월 가주서, 1891년 10월 부사과, 1892년 2월 성균관전적, 1892년 5월 사헌부정언을 거쳐 12월에 지평이 되었다. 1893년 상소를 올려 당시의 시국을 논하였는데,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정으로 가득하였으나 내용이 과격하여 당시 권력자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관직을 버리고 익산으로 낙향하였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정제호는 “이제 우리들은 어육(魚肉)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라며 눈물을 흘리면서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 무렵 삼례역(參禮驛)을 동학농민군이 점령하고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노닐며 현판까지 직접 썼던 비비정(飛飛亭)을 훼손하여 그 목재로 역의 관문을 삼자 정제호는 진시황 때의 분서갱유와 같은 환난이 다시 일어났다면서 개탄하였다고 한다. 1897년 사망하였다.
[묘소]
정제호의 묘소는 전라북도 완주군 상정리에 있다. 송병순(宋秉珣)의 문집 『심석재집(心石齋集)』에 정제호의 묘표가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1904년(고종 41) 조정에서 정제호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旌閭)를 내렸으며, 비서원승으로 증직하였다. 정제호는 전라북도 익산시 모현동2가 85-7에 있는 백산서원(柏山書院)에 송병선(宋秉璿), 정동식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백산서원 근처에 정제호 효자비(鄭濟鎬孝子碑)가 세워져 있다. 1898년에 아들 정동식의 시문을 정리하여 『만포유고(晩圃遺稿)』를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