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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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四一九革命 |
영어공식명칭 | 4·19 Revolu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형미 |
[정의]
1960년 제1공화국의 독재와 부패정치를 저지하기 위해 발발한 4·19혁명의 익산 지역 활동.
[개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부의 언론 자유 탄압 및 부정선거에 대한 반민주주의적 태도에 대항하여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발전한 혁명으로, 당시 지방 대학에서는 익산 지역 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가장 먼저 일어나 민주화 수호를 앞당기는 역할을 한다.
[역사적 배경]
‘4·19혁명’ 또는 ‘4월혁명’은, 자유를 열망하고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값진 희생과 헌신을 함으로써 이룬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이다. 6.25전쟁 이후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장기 집권을 위해 야당 및 민주 세력을 탄압하는 데만 급급하였다.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개표 조작을 하였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대하여 반대하고 규탄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가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일 당일 3.15마산시위가 이어졌다. 3.15마산시위 당시 김주열의 눈에 최루탄 파편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시체로 떠오른 것이 『부산일보』에 보도되면서 투쟁은 더욱 격화된다. 해당 종류의 최루탄은 “군중을 향해 쏘지 말 것”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는, 벽을 뚫고 들어가는 고성능 최루탄이었다. 시위대를 분산시키려는 용도에서 경찰이 직격으로 시위 현장에 최루탄을 발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4월 18일 고려대생시위를 거쳐 4월 19일 전국의 대규모 시민 투쟁으로 확대되고 4월 25일 대학교수단시위까지 이어지면서 반독재투쟁이자 혁명이 된다.
[경과]
1960년 2월 28일 대구학생시위에서부터 시작된 4·19혁명은 3월 15일 마산시위, 그리고 4월 18일 고려대생시위에 이어 대규모 시위로 전개된다.
익산에서는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중앙대학교, 원광대학교 등 약 3,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지방 대학 가운데서는 가장 먼저 4·19혁명에 앞장선 것이다. 이때 이리상업고등학교, 이리농림고등학교, 원광여자상업고등학교, 남성중·고등학교, 이리공업고등학교, 원광중·고등학교 등 익산 지역 중고교생들도 상당수 있었다.
시위의 규모 또한 익산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컸다. 구 경찰서에서 익산역에 이르는 도로는 자유당 독재정권 폭거에 대항하는 학생들의 열망과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중무장한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집회를 주도하여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나아간 건 대학생들이었지만, 이리경찰서로 향하던 참가자들의 상당수는 중고교생들이었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이 시위대에 물을 뿌리며 해산을 유도하였으나, 익산 지역 학생들과 삽시간에 불어난 시민들의 총궐기가 이어졌다.
[결과]
1960년 4월 19일, 시위대는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무장한 경찰들이 시위대를 향해 먼저 발포를 하자, 시위대는 총격전을 벌이며 맞서야 했다. 이승만 정부의 비상계엄령 선포로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피의 화요일’이었다. 그러나 전국민적 강한 저항과 군 지휘부의 무력 동원 거부에 봉착한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한다. 그와 함께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이 몰락하면서 6월 15일, 즉 6.15개헌으로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의의와 평가]
4·19혁명은 광복 이후에 일어난 최초의 자발적 학생 반정부 시위이다. 동원형 강제 궐기대회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독재정권에 항거한 자발적 혁명인 것이다. 현재 익산역 광장에 건립된 익산시 4·19혁명 기념탑은 2002년 작고한 원광대 배형식 교수가 제작하여 익산 출신 서예가 석당 고재봉[1913~1966]이 썼다.
매년 익산역 광장에서는 익산시 4·19기념탑을 중심으로 4·19혁명기념식을 개최한다. ‘4·19의거’로 불리다가 2004년 비로소 ‘4·19혁명’으로 명칭이 변경된 취지를 새기고 있다. 더불어 전국 최초로 세워진 익산 4·19혁명 기념탑의 긍지를 세우고, 3,000여 명에 이르는 익산 지역 대학생·중고등학생을 비롯한 시민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함성의 행진을 하던 그날을 잊지 말자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