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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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頭流記-宋光淵- |
영어의미역 | Record of Duryusan Mountai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강정화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6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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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95년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80년 |
성격 | 한문학|유람록 |
작가 | 송광연(宋光淵)[1638~1695] |
[정의]
1680년 범허정 송광연이 경상남도지리산 천왕봉과 하동군의 청학동을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
[개설]
「두류기(頭流記)」는 송광연(宋光淵)[1638~1695]의 『범허정집(泛虛亭集)』 권7에 수록되어 있다. 송광연은 옥천군수(玉川郡守)로 재직하던 1680년(숙종 6) 윤8월 20일부터 27일까지 8일 동안 지리산[1,915m]을 유람하였다. 옥천은 전라북도 순창의 고호(古號)이다. 구체적인 일정을 살펴보면, 순창을 출발하여 곡성→구례를 거쳐 화개에 도착해 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신흥사→칠불암을 구경하고, 영신사→제석단을 지나 천왕봉에 올랐다가, 백무동을 거쳐 함양 군자사→운봉 인월로 하산하여 귀가하였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 가운데 하동 청학동을 구경하고 천왕봉에 오른 경우에 해당된다. 동행은 당시 순천부사로 있던 이익태(李益泰)와 곡성현감 이만징(李萬徵)이다.
송광연의 자는 도심(道深), 호는 범허정(泛虛亭),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한양 사람이다. 1666년(현종 7)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집의·황해도관찰사·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강릉 학담(鶴潭)에 은거하여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하였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상경하여 고양(高陽) 행호(杏湖)에 정착하였다. 송광연은 성품이 강개하고 벼슬을 좋아하지 않으며 오로지 학문을 좋아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술로 『범허정집』이 있다.
[구성]
유람록의 구성 형식인 유람의 동기와 일정별 유람 상황을 산문 형식으로 기록하였으며, 유람록 말미에 유람을 총평하는 후기(後記)는 별도로 기록하지 않고 순창 관아로 돌아오는 것에서 끝맺고 있다. 유람 도중 접하는 새로운 유적이나 자연 경관에 대해 매순간 소상히 적고 있으며, 특히 한양에 거주하였던 작자는 남쪽 지방에서 처음 접하는 경관이나 물건 등 소소한 것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감회를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내용]
하동 청학동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다. 송광연은 순창에 부임한 이듬해에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지리산 유람을 기획하였고, 특히 인근 지역의 두 수령이 합류함으로써 이들의 유람은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런 여행이 되었다.
8월 21~8월 22일: 구례에 도착하자 현감이 마중하여 향연을 베풀고 유람의 노고를 위로하였으며, 하동군 화개에 이르자 쌍계사 승려들이 남여(藍輿)를 갖추고서 멀리까지 나와 맞이하였다. 쌍계사 입구의 ‘쌍계석문(雙磎石門)’ 석각에 대해서는,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이를 두고 ‘아이들이 습자한 글씨와 같다’고 언급하였던 것을 기억하면서 김일손의 속내를 모르겠다고 평하였다. 또한 쌍계사 경내에 있는 노란 유자나무를 보고서 남쪽 지방에 내려와 처음 보는 것이라며 신기해하였다.
8월 23일: 청학동을 올랐다. 남여를 타고 갈 수 없어 넝쿨을 부여잡고 힘겹게 올랐다. 송광연은 청학동의 경관을 둘러본 후 ‘물외의 전원을 이미수(李眉叟)가 찾지 못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미수는 고려 시대 때 청학동을 찾아 하동 쌍계동으로 왔다가 찾지 못한 채 시만 남기고 돌아간 이인로(李仁老)[1152~1220]를 가리킨다. 청학동 관련 글에서 최치원(崔致遠)[857~?]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송광연 또한 불일암 너머 내원암(內院庵)을 찾았다.
8월 24일: 삼신동(三神洞)에 도착하였다. 삼신동 관련 여러 선현들의 기록을 언급하고 있다. ‘삼신동’ 석각이 최치원의 작품이라는 설에 대해서는 “세속에서 귀신 숭상함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고 한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언급을, 홍류교(紅流橋)의 ‘홍류’에 대해서는 사령운(謝靈運)[385~433]의 말을 언급하였다.
특히 신흥사 옛 터에 들러 주변의 경관을 둘러보고는, 김일손이 “이 절은 시냇가에 세워져 있어 여러 사찰 중에서 그 경치가 가장 빼어나다. 그래서 유람 온 사람들로 하여금 돌아가기를 잊게 한다”고 한 말을 언급하며 안타까워하였다. 이들은 이날 칠불사까지 유람하고 이튿날 천왕봉을 향해 출발하였다.
[특징]
조선 시대 선비들이 지리산 유람을 기획할 때 준비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이드를 해 줄 향도자(嚮導者)와 짐꾼을 구함은 물론, 무엇보다 앞 시대 선현들의 지리산 유람록을 구해 읽었다. 선현들의 유람록은 유람자들의 산행에 있어 주요한 가이드 역할을 하였으며, 선현과 공감하려는 후학들의 산행에 전범이 되었다. 송광연 또한 산행에 앞서 여러 유람록을 숙독하였고, 이는 유람 도중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이는 지리산 유람록에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이다.
[의의와 평가]
「두류기」는 선현들의 지리산 유람 연구에 있어 유람자의 현실적 기반과 유람과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데 주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현직 관료들만의 호사스런 유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의 신진 사림이나 중기의 재야 학자의 유람록과는 차별성이 보인다. 곧 이들의 유람록에는 유람 도중 접하는 곳의 민생이나 시정(時政)의 폐단 등을 고발하듯 기록하고 있는데, 송광연의 유람록에는 이러한 내용이 전연 나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