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0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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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鶴洞-李仁老- |
영어의미역 | Cheonghakdong Villag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최석기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15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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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220년 |
성격 | 한시|기행시|유선시|칠언 율시 |
작가 | 이인로(李仁老)[1152~1220] |
[정의]
고려 후기 쌍명재 이인로가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을 찾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지은 한시.
[개설]
「청학동(靑鶴洞)」은 이인로(李仁老)[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에 수록되어 있다. 이인로가 말로만 듣던 청학동을 찾아 지리산[1,915m]으로 왔으나 찾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지은 시이다.
이인로의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 호는 쌍명재(雙明齋), 본관은 경원(慶源)이다. 고려 전기 벌열이었던 경원 이씨(慶源李氏) 가문에서 태어나 여러 대에 걸친 외척으로서 성대한 문벌을 형성해 왔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는데, 화엄승통(華嚴僧統) 요일(寥一)이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시켜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19살 때 정중부(鄭仲夫)[1106~1179]가 무신란을 일으키자 불문에 귀의하였다가 환속하였다. 25살에 태학에 들어갔고, 1180년(명종 10)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였다. 1182년(명종 12) 서장관(書狀官)으로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한림원에서 국가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주로 하였다. 벼슬이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이르렀다. 임춘(林椿), 오세재(吳世才)[1133~?] 등과 어울려 죽림고회(竹林高會)를 결성하여 시와 술로 즐겼다.
[구성]
칠언 율시의 구성법에 맞추어 지은 시이다.
[내용]
내용상 이인로는 불일폭포에까지는 가 보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아마도 쌍계의 시내에서 떠내려 오는 꽃잎을 보면서 그 상류에 무릉도원 같은 신선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 듯하다.
두류산형모운저(頭流山逈暮雲低)[두류산은 아득하고 저녁 구름 낮게 깔려]
만학천암사회계(萬壑千岩似會稽)[천만 봉우리와 골짜기 회계산과 흡사하네]
책장욕심청학동(策杖欲尋靑鶴洞)[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을 찾아가려 하니]
격림공청백원제(隔林空聽白猿啼)[저편 숲 속에선 부질없이 원숭이 울음소리뿐]
누대표묘삼산원(樓臺縹緲三山遠)[누대는 가물가물 삼신산은 저 멀리 보이고]
태선미망사자제(苔蘚微茫四字題)[이끼 낀 바위에는 ‘쌍계석문’ 넉 자 희미하네]
시문선원하처시(試問仙源何處是)[시험 삼아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 그 어딘가]
낙화류수사인미(落花流水使人迷)[꽃잎 떠내려 오는 시내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
[특징]
운자는 평성 ‘제(齊)’ 자 운에 속한 ‘저(低)’, ‘계(稽)’, ‘제(啼)’, ‘제(題)’, ‘미(迷)’이다.
[의의와 평가]
이인로가 쌍계사(雙磎寺) 입구의 최치원(崔致遠)[857~?] 글씨인 ‘쌍계석문(雙磎石門)’ 네 자를 보았으니, 쌍계사에 당도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체로 조선 시대에는 지리산 청학동을 쌍계사 위쪽 불일폭포 근처라고 생각하였다.
구한말에 이르러 청학동이 여러 곳으로 분화되었지만, 19세기 중반 이전까지 청학동은 쌍계사 주위였다. 좀 더 범위를 크게 잡으면 영신사, 의신사, 신흥사가 있던 곳을 삼신동이라 하였으니, 그곳도 모두 신선이 사는 곳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청학동, 즉 신선 세계는 화개동의 쌍계사 안쪽 지역을 지칭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청학동」은 고려 후기의 유학자 이인로가 신선 세계로 알려진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 노래한 시라는 점에서 쌍계사 일대가 고려 시대에 청학동으로 일컬어졌음을 알게 해 준다. 신선 세계 청학동을 희구하는 고려 시대 학자들의 정신세계를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