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354 |
---|---|
한자 | 仙岩洞-仙岩-堂山祭 |
이칭/별칭 | 선암동 원선암마을 동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암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부유진 |
중단 시기/일시 | 1950년 6.25전쟁 무렵 - 선암동 원선암마을 당산제 중단 |
---|---|
중단 시기/일시 | 2000년대 이후 - 선암동 원선암마을 당산제 중단 |
재개 시기/일시 | 1990년 - 선암동 원선암마을 당산제 재개 |
의례 장소 | 큰당산[원당산] -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암동 원선암마을 북쪽 |
성격 | 마을 공동 제사 |
의례 시기/일시 | 정월 열나흗날 밤부터 대보름날 아침까지 |
신당/신체 | 큰당산[느티나무]|속당산[소나무]|솟대당산[솟대]|둑당산[느티나무]|독당산[입석]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암동 원선암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 밤부터 대보름날 아침까지 지내는 마을 공동 제사.
[개설]
선암동 원선암마을 당산제는 정월 열나흗날 밤부터 대보름날 아침까지 원선암마을의 큰당산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농를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원선암마을은 조선 초기에 연안차씨(延安車氏)가 충청남도 체산에서 옮겨와 터를 잡고, 이후 충주박씨(忠州朴氏)가 이주해 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당산제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지낸 것으로 보이며, 6.25전쟁 무렵 중단되었다가, 1990년대에 마을의 사고가 끊이지 않자 큰당산에만 다시 제를 올렸다. 현재는 전승이 단절되어 진행되지 않고 있다.
[신당/신체의 형태]
원선암마을의 당산은 모두 7곳으로 큰당산, 속당산, 솟대당산, 둑당산, 독당산 등 5곳과 장소 미상의 2곳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북쪽에 있는 큰당산은 원당산이라고도 하는데, 수령이 350년이 넘은 느티나무이며 광주광역시 지정 보호수이다. 속당산은 마을 위쪽 구릉의 소나무였는데 지금은 없다. 솟대당산도 마을의 천변에 있었으나 현재 흔적이 없다. 둑당산은 마을 중앙의 작은 둑에 있는 느티나무가 신체이다. 독당산은 도로 아래에 있는 입석으로 높이가 130㎝이다.
[절차]
선암동 원선암마을 당산제는 도촌방에서 주관하는데, 섣달 그믐날 도촌방 회의를 열어 유사를 결정한다. 유사는 선정된 날부터 상가 등 궂은 곳을 출입해서는 안 되며, 매일 저녁 찬물로 목욕을 해야 한다. 제가 끝날 때까지 부부가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도 안 된다. 제관과 축관은 마을 어른 중 정결한 분이 담당한다. 제비(祭費)는 도촌방의 마을답 수입과 걸궁(乞窮)[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마을 집집을 돌아다니며 악기를 연주하거나 축원의 노래를 불러주는 일]으로 모은 자금으로 충당한다. 제기(祭器)는 도촌방에 보관하였던 것을 사용하고 부족한 것은 매년 보충하였다. 제물(祭物)은 돼지머리, 과일, 나물, 명태 등을 준비하는데 비린 것은 금하였으며, 진설은 큰당산에만 한다. 제물 준비에 사용하는 물은 동네 앞에 흐르는 물을 사용한다. 도촌방 회의가 끝나면 저녁에 당산 주변과 유사집에 금줄을 치고, 금토를 놓아 부정의 출입을 막는다. 굿은 이때 처음 치고, 다음은 제를 모시기 전후에 친다. 제는 정월 열나흗날 밤부터 보름날 아침까지 시행되며, 제사는 제관, 유사, 집사 등이 절차에 따라 지낸다. 음복은 간단하게 하고 큰당산에서만 헌식을 한다.
[축문]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축문을 읊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다.
[부대 행사]
당산제가 끝나고 정월대보름 날 낮부터 본격적으로 마당밟이를 하는데, 약 1주일간 계속 한다. 음력 2월 1일에는 도촌방 회의를 열어 결산 보고를 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한다.
[현황]
선암동 원선암마을 당산제는 6.25전쟁 무렵 좌·우익의 대립에 일어나면서 마을에도 분열이 생겨 도촌방이 해체되었고 그 후 인명 피해가 많아져 중단되었다가, 1990년에 마을을 지나는 도로에서 잦은 교통사고로 마을사람의 피해가 끊이지 않자 큰당산에서만 다시 제를 올렸다. 2000년대 이후 전승이 단절되어 진행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