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1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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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The Shelter of Seoul-Incheon, Oryu-dong Bar Stree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 |
집필자 | 김정진 |
[개설]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에 있는 오류골 주막거리는 인천 제물포와 한양을 잇는 중간 지점쯤 되는 지역이다. 오류골이란 옛날 이 지역에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오류동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오류골이 자리한 곳은 주막거리 일대이다. 주막거리는 마을 이름이자 거리 이름으로서 경인로와 광덕로가 교차되는 사거리이다. 정확히는 오류동 120번지 동부제강 서울제강소 서쪽 주상 복합 건물이 서 있는 곳에 옛날에는 주막이 있었고, 관리나 사신들의 숙식을 제공하던 객사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 주막거리를 잇는 길은 역사의 변천에 따라 경인간의 길-경인로-경인국도로 바뀌어 왔으며, 경인간 철도 개설로 개화와 서구 문화의 바람이 이곳 주막거리를 통해 전달되기도 하였다.
[경인간의 길목 오류골 주막거리]
경인간(京仁間)의 길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가설된 1899년보다 먼저 이곳 온수동 앞을 통과하는 자동차 길이 개설된 곳으로, 이 지역이 서울 서쪽 끝이면서 개항지의 인천이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서울과 인천 사이의 길은 화물이 인천항에서 한강 하구를 통해 마포나루까지 가는 길 외에 우마차와 사람이 통행하는 제일의 도로였다. 따라서 다른 곳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도로 보다는 비교적 노폭이 넓고 길의 상태도 나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외국 사신들이 통행하는 길이라는 점에서도 도로의 확장 개설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 영사는 1883년(고종 20) 4월 5일 일본 외무성에 당시 인천항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한국 정부는 인천과 서울과의 사이에 차마(車馬)를 자유로이 다니게 할 목적으로 길가 소재의 지방 관아에 있는 지방 관리들에게 길을 고치게 하고 있다.”
이는 사신의 왕래를 위해 정부 당국이 도로 보수를 시킨 것이 아니라, 개항을 하게 되니까 자연 각국과의 교역이 빈번해지고, 이에 따른 교통량도 많아지게 되므로 도로의 확장 수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류원 객사와 주막거리]
크고 작은 길목에는 여행자나 관리들이 쉬어 가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숙박 시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서해에서 한양을 왕래하는 중간 지점인 오류골에도 이러한 시설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서 번화한 거리를 형성하였다. 한양과 서해의 관문인 인천의 중간 지점에 주막이 생기고, 시가지가 형성된 것은 자연 발생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시가지나 나루, 고개 등에는 관리들이나 여행객들이 머물다 가는 숙박 시설인 원(院)이나 객사(客舍)가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경인로 변인 이곳에는 주막들이 성업(盛業)하였다. 또한 일반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관원들이 숙식할 수 있는 원(院)도 필요했다. 특히 개항 이후에는 오류동 주막거리에 제물포와 서울을 왕래하는 외국인들의 모습과 일본군과 청군 및 외국군의 행렬이 눈에 띄게 많았다.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청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는데, 덕분에 청국 사신이나 고위 관리들이 쉬어 가던 원(院)으로 추정되는 기와집이 1994년까지 남아 있었다.
오류동 사람들이 ‘주막거리 객사’라고 칭하는 기와집은 경인로 변 오류동 120번지에 있었다. 동부제강 사원연수원 아래에 있던 이 기와집은 행랑채 등의 부속 건물은 사라지고 팔각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되어 있는 안채만 남아 있었다. 대지 면적[1,057.85㎡]이나 인근의 옛 이름, 경인로라는 도로 변에 위치한 점 등으로 보아 객사(客舍)일 가능성이 높았다. 전반적으로 퇴락되어 가는 건물에 대한 아쉬움은 고증을 하여 사적(史蹟)으로서의 회복을 서둘러야 한다는 점이다. 고도(古都)인 서울로 환원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역사성을 지닌 건물들을 찾아 복구, 완성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이 때문에 구로구청에서는 1994년 초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지역 내에 있는 옛 선인(先人)들의 유적이나 중요한 유물들을 찾아 명소로서 가치가 있는 곳을 선정하여 4개소에 명소 비를 세웠다. 오류동 주막거리를 비롯해 주막거리 맞은편 동네인 궁동에 조선왕조 선조의 딸인 정선옹주가 권대임과 결혼하여 궁궐 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는 궁궐 터와 개봉동 매봉산 아래에 있는 잣절 약수터 등이 바로 그곳들이다.
주막거리 객사 명소 비에는 “서울과 제물포의 중간 지점으로 청일전쟁 이전에는 청국 사신이나 고위 관리가 쉬어 가던 객사였으며, 이 근처에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던 자리임.”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 해 9월 사유지였던 객사 자리에 땅주인이 빌딩을 세우고 동부제강 사원연수원 자리에 골프(golf) 연습장이 설치되어 명소비만 그 자리를 지켜 주고 있다. 다행이 구로구에서 인접한 항동에 주민 휴식 공간으로 조성한 수목원 내에 오류원 주막거리 객사를 그대로 복원할 계획이어서 그나마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개항기 이후의 주막거리]
오류골 주막거리 객사는 1930년대까지 일본인 고미네[高峰]가 살았는데, 고미네는 개항기 일본인 첩자로서 일제강점기에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관계자로 알려져 있다. 한때 이 집은 개성에 있던 전국의 무당(巫堂) 본부가 옮겨왔으나 여론이 좋지 않자 서울로 이전해 갔다고도 한다. 광복 이후에는 조준기(趙俊基)라는 사람이 살다가 1970년대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고 한다. 객사 마당에 고목(古木)인 목련나무가 한 그루 있어서 ‘목련나무집’이라고도 불렸다는데, 봄이면 기왓장 사이로 이상한 약초가 자라 마을 사람들이 기와지붕에 올라가 약초를 캐갔다는 것은 매스컴을 통해 잘 알려진 일이다.
한편, 임오년인 1882년(고종 19) 구식 군대 군인들이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밀린 급료에 불만을 품고 군제 개혁에 반대하며 난리를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다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는 등 사태 수습에 노력하였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여 청나라에 압송되고 만다. 흥선대원군이 청군(淸軍)에게 피속(被速)되어 천진(天津)의 보정부(保定府)에 연금되었다가 1885년(고종 22) 풀려나 인천을 통해 귀국하여 이곳 객사에 머물게 되었을 때, 출영(出迎)한 관리가 관복을 가져와 갈아입으라 하자 흥선대원군은 관복보다 술과 여인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마을에 사는 미모가 빼어난 유씨·최씨·이씨·조씨의 딸들이 뽑혀서 흥선대원군의 시침(侍寢)을 들었다고 전한다.
[주막거리 배후 지역과 명문가 집성촌]
옛날에는 오류골 주막거리 객사 말고도, 부천시의 여월·작동·벌응절리·옥길리와 시흥시의 신현리·너부대[현 광명시], 양천구 신월동을 비롯하여 현 구로구 고척동·개봉동·천왕동·항동·온수동·궁동 마을의 중심 지역인 안오류골에 오류원(梧柳院) 객사가 자리하고 있어 번성한 상권과 번화한 교통의 요지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특히 이 지역은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 공헌한 공신(功臣)들에게 왕이 특별이 내려준 사패지(賜牌地)로서, 천왕동에는 노숭(盧嵩)의 묘가 있으며, 궁동에는 안동권씨 권협(權悏)과 전의이씨 이정간(李貞幹), 안오류골에는 진주유씨 유순정(柳順汀)의 묘역 및 이들 3성(三姓)의 집성촌이 대를 이어 오고 있다.
천왕동 고개에서 천왕동길을 따라 천왕동 입구 방향으로 850m 정도 진행하다가 우측으로 난 길로 100m 올라가면 천왕동 유물산포지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자마자 바로 광주노씨종친회 사무실과 묘역에 이르게 된다. 노숭의 묘는 이 묘역의 상단에 자리하고 있다.
오류원 객사가 자리한 안오류골에는 중종반정 3대 공신 중의 한 명인 유순정과 안동권씨 부부 묘역, 그 아들 유홍(柳泓)의 묘역, 그리고 그 후손 5대[유사필·유준·유중광·유식·유순]의 총 7대 8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 묘역은 반정공신으로서 영의정의 자리에 있던 유순정이 1512년(중종 7) 53세의 나이로 죽자 중종이 박원종(朴元宗)의 졸시(卒時)의 예에 따라 3일 동안 조회를 멈추고 장흥고(長興庫)의 관곽(棺槨)을 내어줌과 동시에 현재의 구로구 오류동과 온수동 일대 및 경기도 부천시 여월동·작동에 이르는 약 991,735.56㎡의 땅을 사여(賜與)하면서 조성되었다.
[경인선 철도 개통과 변모되는 주막거리]
1894년 청일전쟁 이후에는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빌미로 열강 제국들이 경쟁적으로 조선의 이권을 침탈해 갔다. 열강들이 획득한 이권은 해운과 하운·전신·어업·해관·철도·광산 등 매우 많은 부분이 해당되었다. 이때부터 철도 연선은 한국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식민지가 된 셈이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한다면 경인철도 부설 당시 소사역이나 오류역의 설치에도 이 지역의 노동 여건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부설된 한국 철도는 조선의 발전과 조선인의 번영을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조선 지배와 경제적 수탈 수단 및 만주와 중국 본토로 진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철도를 놓아야겠다는 논의가 일기 시작한 것은 병자수호조약을 일본과 체결한 다음 수신사 일행이 일본을 다녀와서 『일동유기(日東遊記)』라는 보고서를 제출한 1876년부터이다. 그러나 이때는 논의가 구체적이지 않았다. 그 후 묄렌도르프를 비롯한 외국인들이 초청한 기술 고문들에 의해서 이야기가 전개되었고, 한편으로는 러시아·일본 등의 열강이 이 땅의 철도부설권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면서 본격화되었다.
1896년 3월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파천해 있으면서 이 땅의 정치가 혼란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서울·인천 간 철도부설권을 따낸 사람은 미국인 모스(James. R. Morse)였다. 당시 철도부설권 계약서에는, 계약을 체결한 날부터 12개월 이내에 공사를 착수해야 하고, 3년 이내에 공사를 끝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이때 모스가 이 권리를 따내는 데 뒤에서 애를 쓴 사람이 당시 미국 공사 알렌이었다. 모스는 다음 해 3월 22일 인천 우각리(牛角里)에서 조선 인부 350명을 모아놓고 기공식을 하였다. 모스가 철도부설권을 따낼 때 미국 공사 알렌이 이 권리를 따내면서 황실에 10만 달러, 관계 고관에게 5만 달러를 헌납하겠다고 제안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철도부설권이 미국 사람한테 넘어가자 가장 당황한 것은 일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청일전쟁을 치르며 조선에서 군사 물자 수송을 위해서는 이 철도를 절대적으로 손아귀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 측량이며 공작을 해 왔는데, 미국인 모스에게 새치기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일본인들의 방해 공작과 매수공작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그런데 서울·인천 간 철도부설권을 인정하기 이전에 우리나라에서는 두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하나는 1894년에 단행했던 갑오개혁 당시 우리나라 정부안에 벌써 철도국이라는 관아가 생겼던 것이다. 즉, 공무아문에 철도국을 두고 도로를 측량하여 철도 가설에 대비하는 사무를 관장케 한다고 했는데. 철도국에 소속된 인원은 겨우 3명이었다. 철도국에서 3명의 직원으로 과연 효율적인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또 하나는 1889년, 당시 주미 서리공사로 있던 이하영(李夏榮)이 일시 귀국하면서 희한한 물건을 가지고 들어왔다. 폭이 여섯 치고 높이가 여덟 치가 되는 쇠로 만든 긴 수레였다. 이하영이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어전에서 두 개의 궤도처럼 된 쇠줄을 연결하여 궤도를 만들고 그 위에 쇠수레를 몇 개 연결하고 태엽을 틀어 놓자 이 쇠차들이 궤도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당시로는 이렇게 움직이는 장난감이란 몹시 희귀한 물건이라서, 깜짝 놀란 고종은 이 희귀한 장난감 앞에서 떠날 줄 모르며 손수 태엽을 틀어 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대신들을 모아 놓고 이 장난감 놀이를 하였다. 고종이나 대신들은 그전에 주미공사 박정양의 보고서에서 기차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은 있었으나, 비록 모형이지만 궤도 위를 달리는 기차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비록 인천에서 기공식까지 했지만 모스는 일본 측의 매수공작에 자금난까지 겹치자, 결국 1899년 1월 모든 권리를 일본인에게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사는 1899년 4월 8일에 재개되었고, 4개의 공구로 나누어 그 해 9월 18일 드디어 인천과 노량진 사이의 33.2㎞의 광궤(廣軌)식 철도가 개통을 보게 되었다.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인천역, 동인천역[당시는 축현역], 우각역[현 인천 박문여자고등학교 앞 사거리], 부평역, 소사역, 오류역, 노량진역 등 7개 역이 세워졌으며, 이중 하나인 소사역이 부천역으로 발전하고, 오류골 주막거리 앞에 있던 오류역은 1909년 현 오류동역이 있는 버들이마을로 이전하였다.
1900년에는 한강철교가 준공되면서 철도는 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너 서울까지 연장 되었다. 당시의 기차 삯은 1등이 1원 50전, 2등이 80전, 3등이 40전이었는데, 일반 사람들은 기차를 많이 이용하지 않았다. 기차 값을 마일 당 환산하면 1마일에 2전 5리인데, 그 무렵 한국 사람들은 하루 평균 30마일쯤은 거뜬히 걸어 다녔다. 30마일 기차를 타려면 75전이 든다. 여인숙의 밥 한 끼 값이 5전이었으니까 세 끼를 먹어도 15전, 짚신 한 켤레 값이 10전, 합해서 25전만 있으면 30마일은 거뜬히 갈 수 있는데 75전을 내고 기차를 탄다는 것은 밑지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대로 배편이 있어서 철도는 하루에 두 번 왕복했을 뿐이다. 결국 경인철도 합자회사는 기차에 관한 일반 사람들의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서울과 인천 도처에 광고문을 내다 붙이고 선전을 하기 시작했다.
이규태는 1999년 3월 4일 『조선일보』에 발표한 「역사 에세이: 100년의 뒤안길에서-경인철도」 편에서 번창했던 오류골 주막거리 풍경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 20세기를 역사 속에 접으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100년 뒤안길을 걸으며 이 세상 저 세태를 뒷문으로 들여다보아 ‘천일야화’ 아닌 주일야화로 이야기를 엮어 갈 것이다.
여자가 넉살이 좋으면 ‘오류동 주모냐’고 빗대곤 했다. 경인간을 걸어 다닐 무렵 오류동은 이별하고 마중하는 목으로 주막이 꽤나 발달했고 주모 파워가 따라 거세어져 넉살도 상승했음 직하다.
경인철도가 개통하면서 주막 손님이 격감하여 주모들이 악에 받쳐 있는 어느 날 별반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기차 정거장에 풍악과 창소리가 들려왔다. 개통 초창기에는 기차 손님이 없었다. 이에 철도 회사에서는 철로 변 장터에 ‘성주 명기 앵금’, ‘평양 명기 초선’ 하는 식으로 푯말을 꽂고 기생들을 성장시켜 풍악과 소리로 유객했는데, 그 패거리가 오류에 한판을 벌인 것이다.
울분에 사무친 오류 주모들이 치마끈 졸라매고 작당하여 정거장으로 몰려가 기생들 머리채를 낚아채고 난투극을 벌인 것이다. 요즈음 온갖 시위는 학생이나 노동자들이 하지만 옛날에는 부녀자가 대행했다. 농번기에 잦았던 아래-윗마을 간 보싸움이나 무덤 자리를 둔가 문간 산송싸움, 그리고 수도나 철길을 둔 풍수 파괴를 막는 시위는 부녀자 몫이었다. 부녀자에게는 어떤 사나이도 손을 댈 수 없는 남녀유별 풍습을 한껏 활용한 것이다. 또 장안의 혜전 짚신 장수들이 철길 때문에 장사 다 해먹었다 하여 짚신을 정거장 문전에 쌓아 놓고 불태우며 ‘아이고 아이고’ 통곡 데모를 하기도 했다.
우리 조상들의 철도 기피는 외세 잠식에 대한 보수적이고 우국적인 반동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지극히 타산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당시 한국인의 기차 기피 사유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개통 당시 기차 삯이 1마일 당 2전 5리였다. 그 무렵 사람들은 하루에 30마일 걷는 것이 상식이었기에, 그 30마일을 기차 삯으로 환산하면 75전이 된다. 당시 주막에서 점심 한 끼가 5전이었으니 세 끼 사먹어도 15전이요, 짚신 한 켤레 값이 10전이니 합치면 걸어가는데 드는 경비는 25전이 고작이다. 기차로 갈 때 들인 돈에서 25전을 제하면 무려 50전이나 남는다. 그만큼 남는 장사를 두고 기차를 타긴 왜 타느냐는 타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경인철도 개통으로 한국 20세기가 시작되더니 올해에 초고속 TGV 철도 시운전으로 20세기를 마무리하게 됐다. 좁은 우리 땅에 고속으로만 치닫는 이 문화 현상이 끼칠 영향일랑 숙제로 미루어 두기로 하자.”
서울에서 인천 간의 길은 약 100리로, 빨리 걸으면 하룻길이다. 개화기 인천에서 서울로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오던 외국인 여행기를 보면, 아침 일찍 인천에서 출발하면 점심때 오류골 주막거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경인로는 폭이 1~2m밖에 되지 않아 수레로는 왕래할 수가 없고, 교통수단을 이용하려면 말이나 가마를 타야 했다.
4명의 교군 하루 품삯은 30냥으로 여느 품삯보다 비쌌으나, 좁은 길에서 가마를 매고 걷는다는 것은 고된 노동인데다 숙련된 사람이 아니고는 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도 이들에게 출발하기 전에 해장 값으로 1냥 정도 팁을 주지 않으면 점심때까지 주막거리에 대주지 않았으며, 주막거리에서 반주 값으로 1냥을 주지 않으면 서울의 도성 문이 닫히는 인정(人定) 때까지 대주지 않았다고 전한다.
당시는 통행금지를 어겼을 경우 가까운 경수소(警守所)에서 하룻밤을 잡혀 있다가 다음날 본영으로 끌려가서 즉결 처분으로 곤장(棍杖)을 맞았다. 초경(初更)을 범한 사람은 10대, 2경은 20대, 3경은 30대, 4경은 25대, 5경은 초경과 같이 10를 맞되 맨살 볼기로 맞았다. 그러나 부녀자는 옷 뒤로 곤장을 때리는 규율이 있었다. 이 까닭에 오류동은 서울과 인천 간을 오가는 여행자들이 점심을 먹는 휴게소로 항상 붐볐다. 이리하여 노자를 많이 썼을 경우엔 “오류주모(梧柳酒母)에게 간 씹혔구나.”라는 말도 유행했다고 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오류동 주막거리 객사]
1910년 오류간이역이 폐쇄되고 현재의 오류동역으로 옮겨지면서 오류동역을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의 교통수단과 생활환경이 바뀌었다. 1899년에 일본의 침략적 전진 기지로 설치한 경인선 철도가 개통된 지 100년 후에 건설된 지하철 7호선 역과 지하철 1호선 역의 환승역이 주막거리 앞 온수동에 설치되어, 진정한 시민의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도시화라는 거센 변화 앞에서 오류골 주막거리의 번창한 풍경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다만 옛 오류골 주막거리 객사 앞에 작은 비석 하나가 그 자리를 지켜 주고 있을 뿐이다. 옛 오류골 주막거리와 주변의 옛 정취를 보노라니 저절로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오류골 주막거리는/ 제물포 가는 길목
한 잔 술에 쉬어 가는/ 나그네 길
정선옹주 내력 서린/ 궁동 길 더듬어 가니
그 영화/ 어디로 가고
궁궐 터 호수가엔/ 태공만이 졸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