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4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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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港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태웅 |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역사.
[개설]
1876년(고종 13)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뒤 일본은 자신들의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한 값싼 식량과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국내 최대 미곡 생산지를 배후로 한 서해안 지역의 개방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런 가운데 군산이 유력한 개항장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정작 군산의 개항은 대한 제국 정부의 독자적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부산, 원산, 인천 개항의 경우와 달리 고종 정부가 수동적인 처지에서 벗어나 상업 입국(商業立國)의 기치 아래 개항 논의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899년(광무 3) 5월 1일 군산은 의정부의 결정에 따라 개항되었다. 이어서 개항장을 관리하기 위해 감리서, 경무서, 재판소, 세관, 우체사, 체신사 등이 설치되었다.
한편, 군산의 객주들도 일본인의 경제 침투에 맞서 상회사를 설립하거나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각종 민립 학교를 설립하였다. 나아가 이들 객주는 전국적으로 벌어진 국채 보상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들은 마을 단위로 군민들이 참여하는 형태와 달리 군산 객주 상회사 이름으로 국채 보상 운동을 이끌고 나갔다. 당시 이 단체가 모았던 보상 의연금의 총액은 167원 78전이었다. 아울러 당시 군산 객주 상회사와 경쟁 관계였던 군산항 신상 회사도 국배 보상 의연금을 『대한 매일 신보』에 기탁하였다. 이후 이들 중 일부는 대한 협회의 계몽 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이후 두 단체는 통합과 분리를 거듭하다가 일부 객주이 전주 실업가들과 연대하여 호상관 상회(湖上館商會)를 창립하였다. 당시 일제의 통제와 일본인 상인의 침투에 맞서 객주들이 상호 협력하여 대응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기존의 객주 상업과 달리 중개상에서 벗어나 무역상 단체와 금융 기관으로 성장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이 회사는 이러한 변신과 함께 교육 계몽에도 힘을 기울였다. 상회 내에 상업 강습소를 설립하는 한편 노동자를 교육하기 위해 야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대한 제국 강점과 함께 객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군산 객주들의 이러한 노력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군산이 자주적인 개항 도시로 성장하지 못하고 일본 경제에 예속되어 미곡 등을 비롯한 원료를 공급하는 식민지형 도시로 전락하였음을 보여준다.
[사회]
군산 지역은 1899년(광무 3) 개항 이전부터 경장시를 비롯한 장시와 포구의 성장에 힘입어 인구가 증가하였다. 그 중심은 옥구현 북면이었다. 북면의 인구가 18세기 후반에 비해 100% 이상 증가하였다. 이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상업 인구의 급증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다른 면의 경우도 금강 하구의 상업적 발달로 인해 40% 정도 증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 상인은 상품 매매 과정에서 농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특히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이 벌어진 고부, 고창 일대와 근접한 지역이어서 농민군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우선 객주를 비롯한 많은 상인이 농민군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농민군은 배짐을 끌어와 전곡을 늑탈하고 목재 상인과 소[牛] 상인을 공격하여 물건을 탈취하기도 하였다. 한편, 정부도 서울 군대를 파견하여 농민군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이 때 서울 군대가 상륙한 곳이 군산이었다. 따라서 군산은 동학 농민 운동이 중앙 정부와 농민군의 확전으로 전환되는 데 주요한 장소가 된 셈이다.
1899년(광무 3) 개항으로 인해 군산이 개항장 도시로 변모하면서 지역 인구가 다시 한 번 증가하였다. 1930년대 초반 군산부 관할 구역을 기준으로 거주 인구를 추산하면 1899년(광무 3)에 단지 588명인 데 반해 1910년(융희 4)에는 7,373명으로 증가하였다. 10배 이상으로 증가한 셈이다. 이는 무엇보다 일본인의 이주가 주요한 요인이었다. 일본인의 경우, 같은 기간에 77명에서 3,448명으로 증가할 정도였다.
[산업]
1899년(광무 3) 개항 이전의 군산 지역에서는 상업과 농업, 수산업이 주요한 산업이었다. 우선 상업의 경우, 경장시가 상품 유통의 거점이었다. 그 밖에 경포리 북단의 죽성리에도 다수의 객주들이 영업하였다. 거사리포의 경우도 객주가 상품 거래를 주선하여 중앙관서에 포구세를 상납할 정도였다.
그러나 군산이 개항되면서 이들 유통 거점이 쇠퇴하는 가운데 조계지가 유력한 유통 거점으로 부상하였다. 여기에는 일본인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일본으로 수입한 상품을 조선인 객주에게 판매하는가 하면 조선인 객주로부터 각종 원료를 구입하여 일본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조선인 객주들도 조선 각지에서 각종 상품을 매집하여 일본인 상인들에게 판매하는가 하면 일본인을 통해 구입한 서양 상품을 전국으로 유통시켰다. 그러나 외국 상인의 이동 거리가 확대되면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조선인 객주들의 이러한 상권도 쇠퇴하게 되었다.
벼농사 위주의 농업 역시 이러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899년 개항 직후에는 대한 제국 정부가 제정한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규정에 따라 일본인의 토지 매입이 불법화되었지만 1905년(광무 9) 을사 늑약 이후 일제가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합법화하면서 군산 주변을 중심으로 일본인 소유의 토지가 급증하였다. 즉 구마모토[熊本利平]를 비롯한 오쿠라, 시마타니, 미야자키 등이 1903년(광무 7) 무렵에 이미 토지를 불법적으로 매입한 뒤 이러한 불법 토지 소유가 1905년(광무 9) 이후 합법화되자 대지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이른바 식민지 지주제의 성립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칠산 어장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서해안 수산업은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상업의 발달과 냉장 기술의 개선에 힘입어 발달하였으며 군산과 인접한 고군산도 어장에는 조기 잡이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1899년(광무 3) 개항 이후 일본인 어민의 침투와 이주로 말미암아 연안 어업도 일본인 어민에게 점차 장악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제가 1905년(광무 9) 을사 늑약 이후 1908년(융희 2) 어업에 관한 협정을 한국 정부에 강요하여 일본인도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어업권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어업법을 제정하여 기존의 어업권을 전면 무효화하고 새로이 면허 어업, 허가 어업, 신고 어업을 구분하여 허가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어민은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어획물 판매망도 일본인 수산업자들에게 장악되었다.
[교육]
대한 제국 정부는 1899년(광무 3) 개항에 따른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는 일환으로 옥구항에 옥구항 공립소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00년(광무 3)에 가면 한성 사범 학교 출신 심기섭이 파견된 뒤 신 교육이 점차 보급되었다. 한편, 옥구항 공립 소학교가 개항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자 전직 교사 이강호가 중심이 되어 사립 학교 진명 의숙이 설립되었다. 학교 재정의 대부분을 한국인 객주들이 부담하였으나 학교 지원에 적극적이었던 감리가 교체되며 폐교되었다. 1907년(융희 1) 옥구 부윤 이무영을 중심으로 중등학교인 금호 학교[초기 명칭은 ‘사립 학교’, 군산항 민단 강습소]가 설립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계열 인사인 김성수, 송진우, 백관수 등이 금호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훗날 조선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김철수도 금호 학교 출신이었다.
한편, 일제는 일본식 동화 교육을 시행하기 위해 1907년 옥구항 공립 소학교를 폐쇄한 뒤 개항장 부근에 군산 보통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에 옥구 부윤 이무영은 소학교인 진명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