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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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寺刹 |
영어의미역 |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병선 |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에 있는 부처를 숭상하고 불법을 익히는 장소.
[고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이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로왕과 혼인하였던 땅에 왕후사(王后寺)를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기록이 전하는 바와 같이 고령 지역에 사찰이 처음으로 창건된 시기는 5세기 중엽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고령 지역의 사찰 창건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삼국사기』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월광사(月光寺), 거덕사(擧徳寺), 소리암(蘇利庵), 해인사(海印寺), 청량사(清涼寺)가 이 시기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은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 분류하면 경상남도 합천군이지만, 당시에는 대가야 지역으로 고령군에 속하였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이르러 고령군은 행정 구역의 축소와 함께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지역이 되었다. 1018년에 지방 제도를 개편하면서 신라시대 고령군의 일부였던 야로현이 합천군의 관할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해인사가 고령군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13세기 초 해인사 계통의 반룡사(盤龍寺)가 창건되면서 고령 지역 불교계의 구심점으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계승해 나갔다.
반룡사의 화엄결사(華嚴結社)는 무신집권기 침체에 빠진 화엄종 승려들의 결사였을 뿐만 아니라 자포자기하는 학불자(學佛者)들을 위한 결사이기도 하였다. 반룡사는 14세기에 화엄 중심 도량으로 발전하였다. 반룡사에 주법으로 활동한 체원(体元)은 균여(均如) 이래의 민중 지향 화엄 사상의 맥락을 이어 민간 신앙과 결합한 관음 신앙, 염불 신안을 강조하여 몽골 지배하의 고령 지역은 물론, 경주와 경북 북부 지방의 민심을 추스르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 반룡사는 이 지역의 민심을 대변하는 중심 사찰로서 기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창건 시기가 통일신라시대라는 이설(異説)이 있는 물산사(勿山寺)도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이었다. 물산사지는 최근 지산리 도시계획도로 개설을 위한 발굴 조사 결과 고려시대 사원 유적임이 확인되었다. 여기서 ‘산사(山寺)’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편과 ‘물산사(勿山寺)’ 명문 기와편이 함께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당간지주석이 있는 이 일대의 사역이 물산사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산사는 자복사로서 매년 연등회와 경행을 주도하고 다른 사원들과 함께 사원 세시 풍속, 개인적 발원, 기일, 장례 등의 생활 예제까지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말미암아 사찰 창건이 불가능했고 기존 사찰의 중수·중건만 가능하였다. 따라서 고령 지역에서는 기존 사찰인 반룡사 정도가 유지되었을 뿐 새로운 사찰의 건립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조 사원 기반의 대대적 박탈과 함께 자복사 및 비보 사원이 거의 없어지는 과정에서 물산사가 망폐되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원도 폐허화 되었으나, 반룡사만은 사세를 계속 유지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통 사찰로서 맥을 이어오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 교종(敎宗)에 속했던 반룡사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나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중건하였다. 그 뒤 다시 불이 나서 법당과 요사가 모두 탔으나 1764년(영조 40) 현감 윤심협(尹心協)이 대웅전과 요사·만세루 등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1930년에 다시 중수하고, 1998년에 심검당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제 식민지 지배시기에는 조선 사찰령으로 30본사[1924년에 31본사] 제도가 시행되어 반룡사가 해인사의 말사로 편입되어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받는 등 신앙 활동과 같은 종교적 순기능까지도 많은 제약을 받았다. 사찰령으로 30본사 외 나머지 사찰들은 소속 지역의 본사에 배속시켜 말사가 되게 하였다.
말사는 주지 임면에서부터 사찰의 제반 사항에 대하여 본사의 지시를 따라야 했으며 일제강점기 30본사 주지의 지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본사 주지는 총독부로부터 불교계의 대표적인 승려로 인정되어 일본의 고급 관료인 주임관(奏任官)의 대우를 받았으며 새해에 총독 관저에서 열리는 신년하례회에 초청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사 주지는 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취임할 수 있었고, 말사 주지는 지방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했으므로 친일 승려가 아니면 주지 취임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 시기에 창건된 고령 지역의 사찰은 대가야읍 연조리의 관음사[1910년]와 우곡면 봉산리의 대봉사[1935년] 등이다. 따라서 당시 고령 지역에 존재했던 반룡사와 새로 창건된 관음사 및 대봉사는 모두 해인사의 말사로 지역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기능하였다.
[현대]
해방 이후 사찰 창건이 자유롭게 되어 고령 지역에도 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정치·사회적 혼란과 분단, 6·25전쟁 등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사찰 운영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종파간의 영역 다툼이나 같은 종파 내의 파벌싸움으로 새로운 종파를 만들어 분파하거나, 혹은 영세한 사찰을 개인이 매입하여 운영하는 등 사찰 운영 주체가 자주 바뀌는 형편이었다.
현재 고령군 지역에는 20개 종단에 모두 47개의 사찰이 있으며 지역별로 대가야읍에 12개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쌍림면[10개], 성산면[7개], 다산면[5개], 개진면[4개]과 우곡면[4개], 덕곡면[3개], 운수면[2개]의 순이다. 고령군 8개 읍·면에 모두 사찰이 분포하고 있으나 행정과 경제 및 인구가 집중된 대가야읍내에 가장 많은 사찰이 분포하고 있다. 농촌 지역의 특성상 농번기에는 종교 활동을 하기가 어렵고 또한 농촌 인구의 감소와 고령화로 인해 농촌 지역의 사찰 운영이 어려운 형편이다.
한편 종단별로는 대한불교 조계종이 14개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태고종[8개], 정토종이[3개], 원효종[2개]의 순이며 나머지 종단에도 각각 1개씩의 사찰이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일부 종단이 불분명한 사찰도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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