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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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福 |
영어음역 | Yi Bok |
영어의미역 | Yi Bok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옥룡동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윤용혁,박범 |
성격 | 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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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공주시 옥룡동 |
성별 | 남 |
고려시대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효자.
이복은 고려시대 향리의 신분으로 어려서부터 눈 먼 홀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시고 살았다. 병석에 있는 어머니를 위하여 겨울에 금강 물의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모친을 치유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리고 공주시 옥룡동 부근에 ‘국을 엎질렀다’는 뜻의 ‘갱경(羹傾)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갱경골은 이복이 어머니에게 먹일 국을 얻어 귀가하던 중 서두르다 넘어져 국을 엎지른 곳이란 유래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갱경골에는 천주교 중동성당, 충청남도역사박물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복은 성장하여 관원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성실히 일하여 동료와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웠으나, 수령에게만은 몹시 미움을 받았다. 사람들에게 신뢰받고 바른 말을 잘하는 이복이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수령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꾸짖었다. 끝내 이복은 파직을 당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마저 몸져눕고 말았다. 수령의 이 같은 못된 행적은 왕에게까지 알려져 암행어사가 파견되기도 하였지만, 수령은 그 어사마저 매수하여 이복을 더욱 곤경에 빠트렸다. 그러나 몇 달 뒤 강직하기로 이름난 어사가 파견되어 수령은 파직을 당하였고, 이복의 억울함과 효성이 조정에 알려져 다시 관직이 복직되고 효자비가 내려지게 된 것이다.
공주시 옥룡동의 큰 거리에 ‘효자이복지리(孝子李福之里)[효자 이복의 마을]’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도로가 확장되면서 1978년 옥룡동사무소 옆으로 이전되었다. 비석에는 임헌도 박사가 정리·기록한 이복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낭장 계급의 이장생(李長生)과 강성(姜成)은 이복과 함께 공주 지역 고려의 효자이다”라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효행 내용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