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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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應晫 |
영어음역 | No Eungtak |
영어의미역 | No Eungtak |
이칭/별칭 | 계회,국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귀산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해준,박범 |
성격 | 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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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귀산리 |
성별 | 남 |
생년 | 1560년(명종 15)![]() |
몰년 | 1592년(선조 25)![]() |
본관 | 만경 |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의병.
본관은 만경(萬頃). 자는 계회(季晦), 호는 국재(菊齋)이다. 공주의 만경노씨 입향조(入鄕祖) 노혁의 5대손으로, 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를 지낸 노세득(盧世得)[1526~1589]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삼의사(三義士) 중 한 명인 노응탁(盧應晫)[1555~1592]은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 인근 선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이 일으킨 의병을 따라 청주 전투에 참전하였고, 이어 금산 전투에서 선봉이 되어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33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서 칠백 의사와 함께 전사한 노응환(盧應晥), 노응탁(盧應晫), 노응호(盧應皓) 삼형제를 일컬어 삼의사로 불렀다.
이러한 내용은 18세기 중엽 편찬된 『중봉집』의 「막좌문생동일사절록(幕佐門生同日死節錄)」에 수록된 것에 기반하여 전해 내려온 내용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노응탁(盧應晫)은 선조 대 오현(五賢)의 문묘종사 논의에 적극 참여하고, 광해군 즉위 이후 조헌의 사당이 표충사라는 사액을 받는 일을 주도하는 등 임진왜란 이후에도 생존하였던 인물이다. 조헌의 의병진에 공주의 사족 대표로 적극 참여한 것은 사실이나 노응탁(盧應晫)은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지 않았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활발하게 향촌 내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후대의 기억과 역사적 사실의 괴리는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만경노씨 가문이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과의 단절을 입증하고, 새로운 충신 가문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귀산리 삼의사 사우(詞宇)[사당] 뒤편 동쪽에 있다. 그 옆에는 아버지 노세득의 묘소가 있고, 삼의사 사우 서쪽에는 만경노씨의 시조 만경군 노극청(盧克淸)을 비롯한 5위의 단이 설치되어 있다.
만경노씨 문중에서 공주의 사족 및 충청도 내 유생들의 공론을 근거로 삼의사 충절에 대한 추숭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31년(순조 31)에 증직(贈職)과 함께 정려(旌閭)를 받았다. 삼의사는 1892년(고종 29)에 충청북도 보은군의 후율사(後栗祠)에 배향되었으며, 충청남도 금산군의 칠백의총 내(內) 종용사(從容祠)에도 배향되었다. 원래 공주시 우성면 귀산리에는 정려만 있었는데, 이들을 추모하고 배향할 사우가 없는 것을 아쉽게 여긴 공주의 유림과 후손 80여 명이 1978년에 연명으로 발의하여 ‘노씨삼의사사우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받아 1979년 12월 19일에 삼의사의 생가 터[공주귀산리만경노씨삼의사생가지]를 충청남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받았다. 이를 계기로 1981년 ‘삼의사’라는 현판으로 사우가 건립되었다. 공주귀산리만경노씨삼의사생가지는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삭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