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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494
한자 公州聚會
영어음역 Gongjucwihoe
영어의미역 Donghak Assembly of Gongju in 1892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홍동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집회|종교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892년 10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892년 10월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공주
관련인물/단체 최제우(崔濟愚)[1824~1864]|최시형(崔時亨)[1827~1898]|서인주(徐仁周)[?~1900]|서병학(徐丙鶴)|조병식(趙秉式)[1832~1907]|동학|충청감영

[정의]

1892년(고종 29) 10월 충청도 공주에서 서인주서병학이 동학 교조 최제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 개최한 집회.

[역사적 배경]

1864년 3월 교조 최제우가 좌도난정(左道亂政: 사악한 종교로 세상을 어지럽힘)의 죄목으로 처형된 이후, 동학(東學)은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의 교세는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1890년대 초반 삼남지역(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전역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1892년 1월 동학금단령(東學禁斷令)을 내렸고, 이에 따라 동학금단령을 빙자한 탐관오리들의 동학교도 탄압은 더욱 가중되었다.

한편,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변혁 지향적인 세력들이 이 시기에 대거 동학에 들어가 동학 조직을 매개로 민중들과 결합해가고 있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교조의 신원(伸寃)과 포교의 자유에 대한 요구가 고조되고 있었다.

동학금단령이 내려져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고 있던 시점에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충청도 청주 일대에 접소(接所: 동학의 집회 장소)를 정하고 공주, 전주 등지를 돌며 포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때에 서병학(徐炳鶴)과, 서인주(徐仁周)최시형에게 교단의 급무는 교조의 신원에 있다고 주장하고, 각지 교도들의 복합 상소를 건의하였다. 이에 대해 최시형은 교조 신원의 당위성을 인정하여 교조 신원 운동을 허락하였으나, 복합 상소는 반대하였다.

[경과]

1892년 10월 교조 신원 운동을 주장했던 서병학서인주는 마침내 각지의 동학교도들을 동원하여 공주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 집회를 공주취회(公州聚會)라 한다. 이 집회에서 동학교도들은 「각도동학유생의송단자(各道東學儒生議送單子)」를 작성하여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주로 동학은 이단(異端)이 아니라 유불선(儒佛禪) 3교의 장점만을 취한 것이기에 유교와 다를 바 없고, 따라서 이단의 무리로 몰린 교도들을 석방해 줄 것과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조정에 전달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또한 일본 상인들의 폐해와 관리들의 탐학으로 인해 백성들이 크게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동학교도들이 제출한 의송단자[관찰사에게 제출하는 소장(訴狀)]에 대해 충청감사 조병식은 10월 22일 동학은 정학(正學)이 아니라 이단이며 단지 사학(邪學)일 뿐이라고 규정하고, 또한 동학 금단의 해제 여부는 조정에서만 처리할 수 있다고 하여 사실상 동학교도들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각 지역에 감결(甘結: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보내던 공문)을 내려 동학 금단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금지토록 지시하였다. 이는 동학 금단을 빙자한 관리들의 동학교도 토색을 금지해줄 것을 요구한 교도들의 의송단자를 일정 부분 수용한 것이었다.

[결과]

이러한 조치는 이단으로 규정되어 극심한 탄압을 받던 동학 교단의 입장에서는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다. 그 결과 교조 신원 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최시형을 비롯한 교단 지도부는 각 지역에 통문을 발송하여 삼례집회(參禮集會)를 명령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전환하였다.

[의의와 평가]

공주취회는 동학금단령을 빙자한 관리들의 동학교도 탄압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였으며, 초기에는 교조 신원을 요구한 종교적 측면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의송단자에서 일본 상인의 폐해와 탐학한 관리들의 부패를 지적하고 있듯이 사회적 운동으로 전환될 수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변혁 지향적 세력들에 의해서 공주취회가 주도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이후 삼례집회, 복합 상소 운동, 보은집회로 이어졌으며,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추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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