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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3월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몽석리에서 덕유산 의병과 일본 수비대가 접전한 전투. 1908년 3월 31일 거창군 가북면 몽석리에서 차운보가 이끄는 덕유산 의병 70여 명이 일본 수비대와 접전하였다. 러일 전쟁과 을사늑약의 체결로 이어지는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자 이에 반대하는 의병이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났다. 거창 등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서는 덕유산과 지리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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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에 있는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1983년에 세운 기념탑.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에 있는 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탑은 1981년 3월 1일 가조·가북 3·1독립운동의거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건립한 기미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탑이다. 1919년 3월 22일 가조 지역에서 일어난 기미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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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일대에서 1919년 3월 19일부터 22일까지 일어난 민족 독립운동. 가조면 만세운동은 일본의 강제적인 식민지 정책으로부터 자주독립할 목적으로 일으킨 3·1운동의 전국적인 확산과 흐름을 같이한 독립운동이다. 1919년 3월 20일 가조면 장터를 시작으로 가조, 가북 지역 일대에서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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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과 가북면에서 조직된 청년 단체. 일제 강점기 거창군 가조면, 가북면을 활동 범위로 하여 조직된 가조청년회는 야학과 공동 노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문맹 타파와 경제적 실력 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설립 취지서가 전하지 않아 가조청년회의 설립 목표는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활동으로 짐작해 보면, 혁신적 청년 운동을 지향한 단체라기보다,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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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후반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결성된 거창 지역 사회 단체. 가하단은 거창 지역 청년 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사회단체로 강연회 등을 개최하는 등 사회 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거창민들의 의식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1931년 경 가하단을 해소하고 거창 농민 동맹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1931년 11월 3일 거창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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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부터 1910년까지의 시기 경상남도 거창군 지역의 역사. 조선은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 원산,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고 내륙의 주요 도시에는 개시장이 설치되었는데, 이들 개항장과 개시장을 중심으로 근대의 신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정부는 개항 이후 부국강병을 목표로 적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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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거창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 또는 민족 차별적인 식민 교육에 반대하여 등교를 거부한 운동. 일제 시대 거창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학은 학교에 대한 불만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그 배경에는 민족 차별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담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 항일 민족 운동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동맹 휴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0년대 한국 학생들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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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재향 군인과 친일 유지를 중심으로 결성한 군국주의 단체. 일본의 국방 의회를 모델로 하여 1933년부터 전국 각지에 만들어진 군국주의 단체이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친일 단체의 하나로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재향 군인들 및 친일 유지들[조선인 관료 및 자문 기관 의원, 실업가]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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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이전에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설립되어 거창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기독교 청년 단체. 1920년 이전에 개설된 기독교 청년회는 모 사건으로 2년간 활동이 정지되었다가 1922년 6월 16일 활동을 재개한 거창읍 교회 기독교 신자들이 결성한 청년 운동 단체이다. 1920년대 거창 지역 청년 운동 단체 중 하나로서 거창 청년회와 함께 사회 운동을 펼쳤다. 1927년 당시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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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조직된 한글 신문 기자들의 모임. 거창 기자단은 거창군 내 『조선 일보』·『동아 일보』·『중외 일보』 등 한글 신문[이른바 민족지]의 지국·분국 기자들로 구성된 단체로, 표면적 설립 목적은 언론인을 포함한 언론의 권위 신장과 동업자 간 친목 도모였다. 그러나 그 주도자들이 신간회 거창 지회의 주역들이었다는 점에서 민족 운동, 사회 운동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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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경상남도 거창 지역에서 결성된 노동 운동 단체. 1920년대 초부터 거창 지역에 노동 단체들이 성장하였고, 한편 전국적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이 이는 가운데 거창 지역 노동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한 거창 노동조합이 유지들의 발기로 1927년 4월 4일에 설립되었다. 거창읍 하동 이춘백 집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조합 규약을 통과시키고 임원[역원]을 선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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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거창군에 거창 공립 농업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벌였던 주민 운동. 1920년대 말까지 거창군에는 중등학교가 없어 보통학교 졸업생들의 진학률이 대단히 저조했고, 타 지역으로 유학을 해야 하는 등 큰 불편을 겪었다. 이에 지역민들은 1928년 거창 실업 보습 학교 창립 기성회를 조직하여 1929년 2년제 거창 공립 농업 보습 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곧 2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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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3월 정읍 경찰서에 거창 농민 독서회 회원이 검거된 사건. 1935년 전라북도 정읍 경찰서에 거창 출신 독서회 회원 7명이 체포되어 전주 지방 법원에서 각 3년에서 1년의 구형을 받은 사건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거창의 농민 운동이 본격화하고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일제의 탄압이 점차 심해지고 많은 활동가들이 검거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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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에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결성된 전국 농민 조합 총연맹의 거창 지역 농민 운동 조직. 거창 농민 조합은 전국 농민 조합 총연맹 산하의 대중 조직으로 결성되어 거창 지역 농민들의 토지 문제와 신국가 건설 등에 대한 요구 사항을 대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직후 토지 개혁과 소작료 3·7제 실시, 양곡 수집령 반대 등의 당면한 문제를 거창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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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대동리에서 1980년대 경상남도 거창 지역의 농민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농민 운동 단체. 거창 농민회는 1980년대 거창 지역의 농민 운동, 지역 운동,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농민 단체이다. 그 단초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5년 거창 고등학교 교사로 왔던 민주화 운동가 정찬용은 지역 운동에 투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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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결성된 조선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의 거창 지역 지부. 1919년 3·1 운동 이후 민족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에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1922년 11월 조선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를 결성하고 1923년 3월 민립 대학 기성회 발기 총회를 통해 중앙 집행 위원회와 지방에는 지방부를 두기로 하여 전국에 지방부가 설립되었다. 거창에서도 소식을 듣고 1923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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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거창 지역 부인들이 지역 여성의 자발적인 애국 의연 활동으로서 국채 보상 운동을 조직한 단체. 1907년에 전개된 국채 보상 운동 과정에서 거창 지역 부인들이 국채를 갚기 위해 자발적으로 애국의 의기를 발휘한 의연 활동이다. 거창 지역 부인들의 사회 참여 의지와 구국 의지의 태동을 보여 주었다. 의로운 여성의 국채 보상 참여가 나라를 구하는 길이며 이를 위해 여성의 자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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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에 있었던 소년 운동 단체. 거창 소년회는 1927년 거창 청년회의 지원 아래 설립되어, 소년 조선 지사 운영, 소녀부 병설 등 의욕적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로부터 집회 금지 등의 탄압을 받으면서 1930년 거창 소년 동맹으로 전환되어 지역 사회에서 더욱 확고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소년층은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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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기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지주와 소작인의 융화를 목적으로 설립된 농민 단체. 거창 소작인 상조회는 1921년부터 1923년 사이에 창립된 초기 거창 지역 농민 단체이다. 1923년 11월 15일 경상남도 거창군 상림리 침류정에서 부회장 주남재(朱南宰)의 사회로 총회를 개최해 회장 등 임원진을 선출하고 소작인들의 부담 경감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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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에서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있었던 거창 시장 이전을 둘러싼 주민 갈등. 거창 시장은 5일장으로 주로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위천천 제방의 빈터에 개설되었는데 수해로 인해 위치 이전이 요구되었다. 1924년 면 협의회원과 구장들이 모여 이전 대상지로 천외[김천동, 현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김천리]과 천내[하동, 현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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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에 설치된 일제의 신사. 1924년 8월에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면 상동에 설립된 거창 신사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제신으로 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 황국 신민화를 위해 일제의 강요에 의한 신사 참배가 이루어졌으나, 거창읍 교회 주남선 목사는 끝까지 이에 저항하였다. 해방 후 거창 신사를 철거하고 그 터에 충혼비를 설립하였다. 신사(神社)[혹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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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90년대 경상남도 거창군에 있었던 여성 인권을 위해 활동한 여성 운동 단체. 거창 여성회는 1988년 창립되어 10여 년간 거창 여성들의 인권 향상에 기여한 여성 단체이다. 거창 여성회의 단초는 1980년대 초 기독교 계열 탁아소 후원 조직에서 비롯되었다. 1982년 지역의 뜻있는 여성들이 새싹 어린이집 후원회[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양항 교회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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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에 있는, 1980년대 거창 지역 민주화 운동의 모태였던 시민 단체. 거창 YMCA는 1984년에 창립된 대한 YMCA 연맹 산하의 기독교 청년 운동 단체이다. 이 단체의 특징은 단순한 시민 운동 단체가 아니라 1980년대 지역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고, 여기서 활동했던 인사들이 지역의 여러 부문 운동 단체를 조직했다는 데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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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거창군의 곽종석이 유림 대표로 파리 평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한 사건. 1894년 봉건적 사회질서와 외세의 침략에 맞서 봉기한 가조면의 농민들은 거창읍을 향해 진군하다 관군과 일본군에 진압당하였다. 유생들은 신분 질서를 뒤흔드는 농민군들을 스스로 민보군을 조직하여 처단하였다. 개항 초기 ‘근대’의 변화에 모든 것이 혼란스럽던 시절, 민중과 유생이 꿈꾸던 나라는 달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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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경상남도 거창에서 조선 인민 공화국 경상남도 인민 위원회 산하 지역 위원회로 결성된 단체. 거창 인민 위원회는 1945년 10월 이후에 결성되어 거창 지역의 행정권을 장악하고 주민 자치 기관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거창 인민 위원회는 1945년 9월 6일 서울에서 선포된 조선 인민 공화국의 거창 지역 지부로 결성되었다. 거창 인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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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말부터 일제 강점기 초기에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활동했던 일제 협력 기관. 거창 지방 위원회는 1910년 8월 경술국치 전후 활동했던 일제의 협력 기관이다. 주로 세금 징수에 협조하는 역할을 맡았고, 참여한 이들은 이후 친일 관료와 지방 유지로 성장해 갔다. 거창 지방 위원회는 1907년부터 1911년까지 활동했던 지역 유지로 구성된 일제의 협력 기관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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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 지역 개신교권이 참여한 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과 그 이후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 지배에 대한 비폭력적 항거였고, 동시에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민족 독립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2개월, 길게는 1년 여에 걸쳐 거창을 포함한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되었고, 해외에서는 만주 연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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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 지역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1924년 결성된 조선 청년 총동맹은 1927년 6월 집회 위원회에서 방향 전환하여 무산 청년 운동을 전 민족 청년 운동으로 전선을 확대하기로 결의하였다. 신운동 방침으로 종전의 청년 단체를 해체하고 전 청년을 포괄하는 군·부 청년 동맹을 조직하기로 하여 군·부 동맹 및 도 연맹의 강령과 규약을 통일하였다. 군·부 청년 동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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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중앙리에 설립된 거창 청년회의 회관. 거창 청년 회관은 1926년에 건축되어 일제 강점기 거창 지역 사회 운동에 구심점 역할을 했다. 거창 청년회의 설립 목표인 “정신적·물질적 신생활 자각”을 실현하기 위한 장으로 설립되었다. 1920년 설립된 거창 청년회는 기존의 아림 청년회를 계승한 것이다. 1925년 8월 집행 위원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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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에 설립되었던 조선 형평사의 지역 조직. 거창 형평사는 1923년 조선 형평사 본사와 함께 설립되어, 1926년 6월 창립 축하식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조선 형평사는 1923년 4월 진주에서 백정의 신분 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결성된 사회 운동 단체이다. 그 설립 취지문에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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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조선 농회 산하 경상남도 거창 지역 어용 농촌 단체. 거창군 농회는 식민지 농정을 선전하고 수탈하기 위해 세워진 대표적 어용 단체이다. 산미 증식 계획과 농촌 진흥 운동의 실질적 수행 기관이었다. 조선 농회는 1920년까지 1도 1지회 원칙을 가지고 있었으나 1차 산미 증식 계획을 실행하면서 총독의 산업 단체 정리 지시에 따라 각 군도에 농회가 설립되면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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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일제가 전쟁 동원을 위해 결성한 관제 청년 단체. 1930년 초반 조선의 농촌이 피폐해지고 청년 단체에 대한 사회주의의 영향이 커져 갔다. 조선 총독부는 이를 억제하고 농촌 진흥 운동에 적극 견인하기 위할 목적으로 ‘청년의 교화 지도의 관한 건’을 각 도지사에게 보냈다. 이 당시에 청년단은 청년들의 수양 단체적 성격이 강하였으나 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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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자행된 거창 지역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공원. 흔히 ‘거창 사건’으로 불리는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은 한국 전쟁 기간에 패퇴한 인민군과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다. 당시 공비 토벌을 위해 특별히 창설된 국군 제11사단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11사단 9연대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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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조선 청년 총동맹의 거창읍 지부로 1946년 2월에 결성된 청년 단체. 거창읍 청년 동맹은 1945년 12월에 결성된 전 조선 청년 총동맹의 거창읍 지부로 결성되어 미군정의 탄압을 받으며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거창읍 청년 동맹은 거창 지역 청년과 청년 조직들을 총망라하여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과 봉건적 요소 및 반동 세력의 철저한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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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항일 기독교 민족 운동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 경남전도대 거창지회는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고운서가 설립한 단체이다. 겉으로는 개신교의 전도 활동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항일 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동시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운동을 하기 위해 조직했다. 1919년 9월에 경상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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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민 유격대의 경상남도 조직으로 거창 지역에서 활동한 북한 인민군의 배후 부대.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 성공 후 인민군 후퇴 과정에서 낙오병과 토착 좌익 세력이, 9월 29일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를 결성했다.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는 지리산, 덕유산을 중심으로 1950~1951년에 주로 활동했으며 1954년 10월에 완전히 토벌되었다. 1950년 9월 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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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의 유지 일부가 참여한 경상남도 지사의 자문 기관. ‘도 평의회(道評議會)’는 1920년 일제의 지방 제도의 개정으로 설치된 도지사의 자문 기관이다. 구성원인 도 평의회원에는 주로 일본인과 함께 거창을 비롯한 각 지역의 조선인 유지가 임명되었다. 도 평의회 외 자문 기관으로 부(府)·면(面) 협의회(協議會)도 있었는데, 이것들은 말 그대로 부윤과 면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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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을 목표로 경상남도 거창군 지역에서 전개된 문화적 실력 양성 운동.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고 일제의 침략이 점점 노골화되자, 의병 운동과는 달리 개화 자강 계열에서는 실력 양성에 의한 국권 회복을 이루고자 하였는데, 이를 애국 계몽 운동이라 한다. 경상남도 거창에서는 국채 보상 운동, 학회 운동, 상소 운동, 대중 운동의 사례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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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3월 거창군 매학 일대에서 의병장 김동신이 일본 군경과 교전한 전투. 1908년 3월 의병장 김동신은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궁항리 매학 일대에서 일본 군경 합동 토벌대와 교전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을사늑약 체결 후 이에 반대하는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는데,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서는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 본격적인 의병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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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경상남도 거창 지역에 있었던 유학자들의 모임. 1894년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 당동 마을로 이주한 유학자 장복추는 장복추의 강학을 듣고자 주위에 모인 삼남의 문인들로 관선계를 조직하였다. ‘영남의 삼징사(三徵士)’로 불리는 당대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 사미헌 장복추는 경상북도 칠곡군 각산 출신으로, 1894년 갑오 농민 전쟁을 피해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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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군민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한 학교 설립 운동. 경상남도 거창군에 1909년 개교한 원명 학교는 새로운 신학문 교육을 위해 만든 학교이다. 원명 학교의 뿌리는 1907년 향교에 세워진 소학교로 거창 지역에서 최초로 근대 교육을 표방한 학교였다.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인 조선 총독부는 1910년에 조선 교육령을 발표하여 전국 각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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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거창 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예비 검속으로 지역 보도 연맹원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 1949년 좌익 경력자를 대한민국 국민으로 계도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 조직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아직 인민군이 내려오기 전인 1950년 7월 거창 지역 연맹원들은 예비 검속으로 거창 경찰서 사찰계 경찰들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마령재와 권빈재에서 2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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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5일 한국군이 거창 지역 민간인 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에서 파견한 합동 조사단을 공비가 한 것처럼 꾸며 습격한 사건.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거창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국회에서 합동 조사단을 파견하자, 이 사건을 덮기 위해 한국군이 북한의 공비로 가장해서 합동 조사단을 피습했다. 1951년 3월 29일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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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시기 1950년 8월 1일 경상남도 거창군의 김용 마을 주민들이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희생된 사건. 1950년 7월 말경 경상남도 거창 주변 지역은 북한 인민군의 점령지였으며, 미군이 대규모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8월 1일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 김용 마을 최명금 일가족이 전란을 피해 뒷산으로 숨었다가 두 차례에 걸친 미군 전투기의 기총 사격으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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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여순 사건 반란군 김지회 부대가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황점 마을을 점령한 뒤 거창 경찰서 위천 지서와 북상 지서를 습격하고 북상 지서장을 납치한 사건. 1949년 3월 말 김지회와 홍순석이 이끄는 여순 사건의 반란군이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황점 마을을 점령하고, 거창 경찰서 위천 지서와 북상 지서를 습격하고 북상 지서장을 납치했다. 그 뒤 김지회 부대는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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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낙동강 농민 조합 거창 지부 조직이 발각되어 일제에 의해 검거된 사건. 1932년 4월 경상남도 거창의 청년들이 모여 사회주의 선전을 목적으로 한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낙동강 농조를 설립하여 동지를 규합하던 중 거창 경찰서에 발각되어 검거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함옥정(咸玉晶) 외 5명이 1년 6개월에서 1년형을 선고 받았다.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일제의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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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춘전리 주민들이 남조선 노동당 무장 조직인 야산대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안의 지서로 연행된 뒤 학살된 사건. 1949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춘전리 마을 주민들이 좌익계 야산대(野山隊)[남조선 노동당이 만든 무장 조직]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2차에 걸쳐 거창 경찰서 안의 지서로 연행되었다. 주민들은 경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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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경상남도 거창 지역의 가조 등지에서 일어난 반봉건 반외세 농민 봉기. 1894년 농민 전쟁은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을 중심으로 농민, 도시민, 소상인, 몰락 양반, 이서 등 봉건 사회 해체 과정에서 몰락한 계층이 광범하게 참여한 반봉건 반외세 근대화 운동이다. 경상남도 거창 지역에서는 안의와 가조 등지에서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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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경상남도 거창군 일대에 발생한 대홍수. 1933년의 대홍수는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일어난 유사 이래 최대의 홍수였으며, 사망자 8명, 가옥 파괴 300여 호, 피해액 30여만 원에 달하였다. 이때의 수해로 군민들은 시민대회를 열어 당국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였다. 그 결과 1936년부터 영호강 사방 공사가 시작되었다. 경상남도 서북부의 내륙 산간에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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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시기에 거창 지역과 전국에서 노동자들이 벌인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 운동. 일제 강점기 노동 운동은 192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항기 이후 노동자들은 공장 노동자이기보다는 일용직 노동자나 광산 노동자, 부두 노동자들이 다수였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산업 노동자들이 증가하였고, 이는 노동 운동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에 들어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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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거창 지역과 전국에서 농민들이 생활 조건·사회적 환경 개선을 위해 조직적으로 전개한 사회 경제 운동. 일제 강점기 농민 운동은 식민지 농업 정책에 저항하고, 민족 해방 운동을 이끌어 갔다. 전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일제 강점기 시기의 산업 구조 속에서 한국 농민은 일본 제국주의 대 식민지 민중이라는 식민지 사회의 모순 구조와 대결 구도 아래 민족 독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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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에 결성된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의 거창 지역 지부. 거창 지역의 인민 위원회, 농민 조합, 청년 동맹 등의 좌익 세력이 1946년 이후 미군정의 탄압으로 약화되자,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는 1948년 정부 수립 후 국민회 소속 인물을 국회 의원과 지방 의회 의원에 당선시키는 등 거창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국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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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체결 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거창 등지에서 일제와 맞써 싸운 의병 부대. 을사늑약 체결 후 덕유산을 배경으로 경상남도과 전라북도, 충청북도 접경 지대에서 활약한 의병 부대로, 김동신과 문태수 의병 부대가 대표적이다. 러일 전쟁과 을사늑약의 체결로 이어지는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자 이에 반대하는 의병이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났다. 거창 등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서는 덕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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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부터 1945년까지 국권 회복을 위해 거창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으로 의병 운동, 3·1 만세 운동, 파리 장서 운동, 민중 운동 등 민족운동. 을미사변 이후 전국에는 항일 의병 항쟁이 전개되었다. 1896년 1월 8일 진주성 점령에 참여했던 거창 출신의 노응규 부대의 참전으로 시작된 경상도와 전라도, 덕유산 일대에서는 일본 군대에 저항하는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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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에 있었던 군수의 지방 통치를 도왔던 자문 기구. 일제 강점기 때 지방 행정의 자문 기구로 경상남도 거창군 안에 면 협의회가 설치되었다. 면 협의회원 가운데 2/3는 거창 군수가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1/3은 선거를 통해 선출이 되었다. 거창군 내의 각 면에서는 열 명 안팎의 면 협의회원을 선출할 수 있었다. 이 선거는 거창 군민이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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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경상남도 거창군에 호주 선교부가 교육과 전도를 위해 설립한 여학교. 호주 선교부가 본격적으로 거창에 지부를 설립하고 활동을 한 것은 1915년부터의 일이다. 호주 선교부는 거창에 1913년에 명덕 유치원과 1915년에 명덕 학교를 설립했다. 사립 학교의 교육에 대한 조선 총독부의 간섭이 심해지자 외국인 선교사들은 학교를 폐쇄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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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에서 1923년에 전개된 경제적 자립 운동. 1923년 전국적으로 경제적 자립 운동인 물산 장려 운동이 전개되자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도 1923년 3월 3일(음 1월 16일) 주초 단맹회(酒草斷盟會)를 결성하여 술과 담배에 쓰이는 돈을 저축하여 공익에 쓰기로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일본은 공황에 빠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제는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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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때 경상남도 거창군에 설치된 포·조총 부대. 별포군(別砲軍)은 조선 후기부터 논의되다가 주로 대원군 집권기에 설치된 포·조총 부대로, 경상남도 거창군에는 1871년 2월과 6월 안의현과 거창부에 각각 포수를 설치했다. 이는 개항 직전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한 조선 정부의 국방력 강화책의 일환이었다. 별포군은 임진왜란 후 군대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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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 지역에 있었던, 거창 청년회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학교. 남녀 아동의 교육을 목표로 하였으며, 특히 노동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거창 청년회에서는 지역의 뜻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1925년 거창 청년 회관에 노동 야학을 열었다. 이 야학을 통해 80여 명의 가난한 학생들이 보통 교육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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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때 인민군 잔병 토벌 과정 중에 발생한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민간인 학살 사건.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은 덕유산 자락에 위치해 전쟁 전부터 빨치산의 출몰이 잦은 지역이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9월 인천 상륙 작전 성공 후,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잔병들을 토벌하기 위해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거창 일대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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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에서 1960년 3·15 부정 선거부터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전까지 전개된 사회 변혁 운동. 1960년 4월혁명 시기 거창군민들의 사회 변혁 움직임은 먼저 1951년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울분을 표출하고 사건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집단 행동으로 나타났다. 거창 지역의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은 기성 정치 체제를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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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에서 1951년 봄 거창 경찰서가 과거 공비 출신들을 조직해 빨치산 토벌 활동을 벌인 일종의 우익 유격대. 1951년 봄 당시 거창 경찰서 사찰 주임이었던 경위 유봉순이 창설하였다. 사찰 유격대 대원들은 빨치산 출신으로 조직되었는데, 이 중에는 빨치산에 납치되어 강제로 빨치산 생활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따라서 사찰 유격대는 누구보다도 공비들의 생태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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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기에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과 합천군 일대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조선 시대 말에 거창군 신원면 일대와 합천군 삼가면, 쌍백면, 가회면, 대병면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이다. 본래 신라의 삼지현(三支縣), 마지현(麻枝縣), 가주화현(加主火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지방 제도를 정비하면서 삼지현과 마지현을 삼기현(三岐縣)으로 하여 강양군[지금의 합천]의 영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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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에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 고등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삼선 개헌 반대 시위. 1969년 6월 거창 고등학교 학생들은 삼선 개헌 반대 시위를 벌여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 기도에 저항하였다.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은 전영창 교장의 전인 교육에 기인한 바 컸다. 1969년 6월 17일 화요일 전영창 교장의 훈화는 삼선 개헌 반대 시위의 촉발제가 되었다. 설교의 요지는 “불의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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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 일대에서 1919년 3월 20일부터 4월 말까지 일어난 민족 독립운동. 거창 3·1운동은 1919년 3월 20일부터 4월 말까지 일본의 강제적인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여 가조면 장터, 거창읍 장터, 위천 장터 등 거창 일대에서 전개된 민족 독립운동이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3·1운동은 일본 제국의 수탈과 탄압 속에서 독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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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수승대의 소유권을 둘러싼 거창 신씨와 은진 임씨 문중 간 분쟁. 수승대(搜勝臺)는 조선 중종 때 요수(樂水) 신권(愼權)이 은거하며 강학하던 곳이다. 이황이 그 이름을 고쳐 준 이래 이황·신권·임훈의 시가 나란히 새겨져 탐승객에게 화제가 되었다. 이에 거창 신씨와 은진 임씨 간 수승대를 둘러싼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 한 차례 안의 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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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거창에 조직된 신간회 지회. 신간회는 1927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 연합 전선으로 결성되어 각지에 지회를 결성하였다. 거창에서도 1927년 10월 22일 신간회 지회가 창립되었다. 신간회 본부 특파원 홍명희와 안재홍이 도착하는 날을 기해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거창 청년 회관에서 개최한 창립총회에서 입회원 48명 외 다수가 모인 가운데 임원진을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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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거창 교회 주남고 목사 및 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신사 참배에 저항한 사건.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조선의 종교 활동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 통제했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했기에 한편으로는 미션 스쿨의 종교 교육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법인 설립을 용인해 주는 등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해 노골적인 반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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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일본인 교사의 민족 차별적인 행동에 반발해 거창 신원 국민학교 학생들이 동맹 휴교를 벌인 사건. 신원 국민학교의 일본인 교사가 한국인 교장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5학년과 6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동맹 휴교를 벌였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 항일 민족 운동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동맹 휴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0년대 학생들은 일제 식민지라는 특수한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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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경상남도 거창 지역 십리 능선에서 지리산 전투 사령부와 지리산 빨치산 이현상 부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 1949년 3월 지리산 빨치산 이현상 부대는 3·1절 기념 순회 투쟁으로 인근 지역들을 공격하였고, 3월 하순에 거창 십리 능선에서 정일권이 지휘하는 지리산 전투 사령부를 만나 치열하게 싸우다 지리산 뱀사골로 후퇴했다. 1948년 10월 여순 사건이 발발하자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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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거창군과 함양군 일대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조선 시대에 거창군의 마리면과 위천면, 북상면과 함양군의 안의면, 서하면, 서상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이다. 안의군은 신라 때 마리현(馬利縣)과 남내현(南內縣) 지역이며 경덕왕 때 ‘이안’과 ‘여만’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여만현(餘萬縣)은 감음현(感陰縣)으로 바뀌었는데, 1390년 이안현(利安縣)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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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덕유산 의병이 거창군 감악산 연수사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 1908년 6월 10일 덕유산 의병 20여 명이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에 있는 감악산 연수사에서 거창 수비대와 교전을 벌였다. 러일 전쟁과 을사늑약의 체결로 이어지는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자 이에 반대하는 의병이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났다. 거창 등의 경남 서부 지역에서는 덕유산과 지리산 등 산악 지대를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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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체결 이후 거창군 고제면을 근거지로 활약한 항일의병.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오 진사(吳進士) 부자에 의해 조직된 지역 의병이다. 을사늑약 체결 후 이에 반대하는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거창군 고제면은 거창 내에서도 의병 운동이 활발하였던 지역 중 하나로, 궁항리에서는 오 진사 부자를 중심으로 의병 부대가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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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0일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실시된 제1대 국회 의원 총선거.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총선거에 거창 지역에서는 지역 유지 2명, 기독교계 1명, 독립운동가 출신 1명이 입후보했고 지역 유지 표현태가 제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48년 3월 1일, 유엔의 남한 단독 선거 발표가 있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는 이승만의 독립 촉성 국민회와 한국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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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8일 남한 단독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좌익 세력이 거창군 위천 지서를 습격한 사건.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앞두고 위천면장과 마을 청년들이 투표함을 지키기 위해 위천 지서를 경비하였지만, 단독 선거 반대 세력이 북상과 위천 지서를 습격해 면 소재지가 불탔다. 다음날 경찰과 우익 단체 청년들이 위천 지서 경비 관련자들을 집단 구타했다. 한편, 1948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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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체결 후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를 근거지로 활약한 항일 의병. 을사늑약 체결 후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에서 조직되어 덕유산 의병과 함께 일본군 및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거창의 대표적인 지역 의병이다. 을사늑약 체결 후 이에 반대하는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인 1906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에서 오일선(吳馹善)을 중심으로 김성진(金成鎭),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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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에서 설립된 청년 단체. 1921년 창립된 위천 금원 청년회는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 세 면의 연합 청년회로, 1923년 정태균 등이 중심이 되어 임원을 개선하고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 3면의 연합 청년회인 위천 금원 청년회는 설립 당시의 취지서가 전해지지 않아 그 설립 목적을 상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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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에서 1919년 4월 8일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난 만세 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의 만세 운동이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가조면에서 만세 운동이 먼저 일어나고 뒤이어 위천면에서도 만세 운동을 계획하여 1919년 4월 1일 위천 장날을 기해 대규모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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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경상남도 거창군 지역에서 전개된 민주화 운동. 1987년 6월항쟁 당시 거창군민은 군 단위로서는 두드러지게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거창에서 6월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데는 1980년대 정찬용, 표만수, 유성일 등 선구적인 인물들에 의해서 거창 YMCA, 거창군 농민회 등 사회 민주 단체들이 결성되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데 기인한다. 또한 천주교의 거창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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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기간 중 잔류한 인민군과 빨치산 토벌을 위해 특별히 창설되어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등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부대. 육군 제11사단은 인천 상륙 작전 이후 패배한 인민군 및 빨치산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이다. 1950년 최덕신을 사단장으로 한 11사단은 예하에 세 개 연대를 배속받아 전라북도 남원에 사단 본부, 경상남도 진주에 9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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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겨울 경상남도 거창군 각 면의 지서 단위로 조직된 지역 방위를 위한 의용 경찰대. 1951년 겨울 경상남도 거창군 각 면의 청장년들이 아무런 보수 없이 자기 고장을 지키기 위해 의용 경찰대로 조직되었다. 거창 인근 산간 지대로 공비의 출몰과 습격이 빈번하였지만 군과 경찰 병력만으로는 토벌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각 지서마다 의용 경찰대를 조직해 돌과 나무로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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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4월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궁항리 매학 마을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항일 의병. 1908년 4월 7일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궁항리 매학동에서 이(李) 진사(進士)가 이끄는 의병이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러일 전쟁과 을사늑약의 체결로 이어지는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자 이에 반대하는 의병이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났다. 거창 등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서는 덕유산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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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경상남도 거창군의 선비들이 결성한 계 모임. 계와 향약은 향촌의 자치 규약으로 덕업(德業)을 권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거창 지역의 경우 단금계(斷金契)와 용산범국회(龍山泛菊會) 등이 유명하였는데, 1925년에 결성된 이이계(二以契)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계의 이름은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그 어짊을 더한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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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1945년 일제의 식민 통치와 거창 지역민의 대응, 지역 사회 변천사. 거창의 역사에서 일제강점기는 중세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중요한 시기로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때였다. 당시 대다수의 지역민들은 정치적 자유는 물론이고 생존권까지 위협당해 절대 빈곤의 상태에 빠졌다. 해방 전까지 거창 전체 인구 중 30% 이상의 주민이 해외로 이주해야 했던 사실은 이를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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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 지역에 거주한 일본인.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직면하였다. 이에 조선인들은 갑오개혁, 광무개혁 등 여러 개혁을 전개하는 동시에 동학 농민 운동, 의병 전쟁 등으로 제국주의 침략을 막아내려 했으나, 결국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으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신개척지 조선으로 건너왔고 개항장뿐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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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 지역 유지들의 친목 모임. 제창회는 공식적인 행정 기구는 아니지만 거창군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그 지역의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의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25년 8월에 거창면 협의실에서 월례회를 개최하여 거창군의 지역 현안을 논의했다. 제창회는 거창군의 지역 유지들이 거창 지역의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의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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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2월부터 1952년 3월까지 지리산과 경상남도 거창 지역을 포함한 덕유산 일대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한 군경 합동 작전. 1950년 11월 한국 전쟁에 중국군이 참전하자 국군 제11사단과 제8사단이 지리산 일대 빨치산을 토벌하다 전방으로 이동했다. 그 뒤 1950년 말부터 1951년 말까지 후방에서 빨치산의 활동은 극렬해졌다. 이현상을 총사령관으로하는 일명 남부 군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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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일어난 국군에 의해 민간인이 집단 희생된 사건.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육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지리산 일대 빨치산 토벌을 구실로 민간인 719명을 학살했다. 국군이 자국의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이 충격적 사건은 곧 국회에서 문제가 되었고, 현지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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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에 설치된 대표적 조선인 탄압 기구.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후 헌병 경찰 제도를 시행하고 각지에 헌병대를 설치하였다. 특히 의병 활동이 있었던 곳에 헌병 분대를 두었다. 거창은 한말 의병 운동이 활발한 곳이었으므로 헌병 분대를 두었다. 거창 헌병 분대는 거창 지역 대표적인 일제의 탄압 기구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거창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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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거창 지역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사회 변혁 운동. 거창의 청년 운동은 1919년 3·1 운동 이후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0년대 초반 청년 운동은 주로 지식인층이 주도하는 문화 계몽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20년 거창 지역도 마찬가지로 지역 지식인들과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300여 명이 모여 청년회를 결성하였다. 가장 먼저 확인되는 청년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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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8월 23일 남조선 노동당 무장 조직 야산대가 거창 읍내를 공격하여 경찰서, 군청, 재판소 등을 방화한 사건. 1949년 8월 23일 새벽 4시 야산대 50여 명이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내를 공격하여 경찰서, 군청, 재판소, 경찰서 사찰 주임의 관사 등을 방화했다. 교전 중에 경찰과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군경의 공격으로 야산대원 12명이 사살되었다. 야산대는 퇴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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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7월 6일 경상남도 거창군 수도산 일대에서 활동하는 남조선 노동당 무장 조직 야산대가 국회 의원 표현태의 본가를 습격한 사건. 표현태 본가 피습 사건은 1949년 7월 6일 밤 경상남도 거창군 수도산 일대에서 활동하는 야산대(野山隊)[미군정 시기에 남조선 노동당이 만든 무장 조직]가 거창군 월천면 표현태 국회 의원의 본가를 습격하여 그 가족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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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 내에서, 혹은 거창 출신 인물에 의해 타 지역에서 발생한 학생들의 항일 민족 운동. 일제 강점기 학생 운동은 항일 민족 운동의 한 갈래로, 합법적 결사 운동, 문화 계몽 운동, 동맹 휴학, 비밀 결사, 가두시위 등 다양한 양상을 띠며 발전하였다. 학생 운동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린 것은 1920년대의 동맹 휴학 운동인데, 대체로 학원 내의 사소한 문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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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경상남도 거창군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1945년 8월 15일 한반도 분단과 냉전 체제가 성립되고 1948년 8월 15일 남북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다. 1950년 1월 애치슨 선언이 발표되고 1950년 4월 소련이 북한의 전쟁 승인과 비상시 중국의 참전을 요구하였으며,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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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이후 거창 지역의 역사.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거창 지역민들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앞장섰다. 건국 준비 위원회 거창지부가 거창 인민 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전국 농민 조합 총연맹 산하 거창 농민 조합과 전 조선 청년 총동맹 지부인 거창읍 청년 동맹,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등 좌우익을 망라한 대중 조직이 건설되어 거창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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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충혼탑 현충 시설, 호국 무공 수훈자 전공비, 6·25 전쟁, 베트남의 참전 기념비 등을 수용하여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에 조성한 호국공원. 호국공원은 기존의 거창 성황단 자리에 일제가 거창 신사를 지어 강제로 참배하게 하자, 거창읍 교회 목사 주남선을 중심으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이 일어났던 현장이다. 1959년 6·25 전쟁 참전자 충혼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