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5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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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農政新編 |
영어공식명칭 | Nongjeongsinpyeon, An Introduction to Western Farming Technique |
이칭/별칭 | 농정신서(農政新書),농정신편(辳政新編),농정신편(農政新篇)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단행본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원재연 |
저술 시기/일시 | 1882년 1~2월 신사 납월 하완(辛巳 臘月 下浣) - 『농정신편』 안종수 초고 저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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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상도동 511] |
성격 | 단행본|농업서적 |
저자 | 안종수(安宗洙) |
편자 | 김일제(金一濟) |
간행자 | 광인사[초간본, 1885년 여름, 4권 4책]|박문사[재간본, 1905년, 4권 1책]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9세기 농업 서적.
[개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농정신편(農政新編) 건(乾)』은 1885년 초간본 4권 4책 중의 제1권과 서지사항이 거의 동일하므로, 초간본의 내용을 베껴쓴 필사본으로 추정한다.
저자 안종수(安宗洙)[1859~1896]는 1881년 조사시찰단[일명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음력 4월 10일부터 7월 2일까지 일본의 동경을 방문하여 일본의 농학자 쓰다센[津田仙][1837~1908]을 만나 쓰다가 저술한 『농업삼사(農業三事)』라는 서양 근대 농법의 요지를 기술한 책자 등 수종의 서구 농서를 구득하여 귀국했다. 안종수는 귀국 직후 약 5개월간 일본어와 한문으로 된 농서들을 한문으로 요약 기술하여, 양력 1882년 1~2월경 4권 4책의 『농정신편(農政新篇)』을 기술하였음이 저자가 쓴 초간본 발문을 통하여 확인된다. 이후 이조연(李祖淵)[1843~1884]과 이시우 등이 안종수의 『농정신편』을 즉시 간행하여 보급하고자 하였으나, 서양의 학문은 사학(邪學)으로 배격하던 식자들의 반대와 갑신정변으로 공적 인쇄소인 박문국(博文局)이 파괴되는 등의 이유로 계속 발행이 지연되었다. 1885년 여름 무렵 안종수가 통리아문에서 주사로 근무하던 때에야 비로소 400부를 합자회사이던 광인사(廣印社)를 통하여 간행했다.
1885년 초간본은 제1권에서 토양의 종류와 성질을 풀이한 토성변(土性辨), 작물의 배양법(培養法), 제2권에서 거름의 종류와 사용에 대한 분자법(糞苴法), 분배방(糞培方) 등을 서술했다. 제3~4권에서는 작물을 이용 부위별로 분류한 뿌리작물, 줄기작물, 껍질작물, 잎작물, 꽃작물, 열매작물 등 육부경종(六部耕種)에 대하여 설명했다. 또한 동도서기(東道西器)의 관점에서 서양의 근대적 농법 수용을 강조한 신기선(申箕善)[1851~1909]의 서문에 이어서 약 22쪽에 걸쳐서 현미경으로 본 벼꽃의 암술과 수술의 구조를 비롯해서 각종 농기구의 외형 및 용도 등을 그린 삽화를 게재하여 서구적 농법의 특징과 장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조연, 이명우(李明宇)[1836~1904] 등의 발문에서는 안종수가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 『농정신편』을 저술하였음을 밝히면서, 거름을 잘 배양하고 정밀한 농기구를 잘 활용하는 등 서구의 근대 농법을 도입함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1905년 재간본은 김일제(金一濟)가 사비를 털어 박문사(博文社)에서 1,000부를 간행하여 보급하였고, 일제 강점기인 1931년 조선총독부가 조선 농민의 식량증산을 재촉하면서 한문으로 된 『농정신편』을 한글로 번역하여 농민들에게 보급한 적이 있다.
『농정신편』은 개항기에 받아들인 한국 최초의 서구적 농법서로서, 일본 근대의 농학자 쓰다센이 땅속의 통기(通氣), 가지치기(截枝), 인공수분법(人工受粉法) 등을 서구농법의 요체로 기록한 『농업삼사』 2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편찬/간행 경위]
저자 안종수는 1881년 음력 4~7월 일명 신사유람단인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세관 시찰을 담당한 조병직의 수행원으로 갔으나, 일본의 농학자 쓰다센을 만나 서양의 근대 농법과 관련된 농업서적들을 구입해 왔다. 귀국 후 5개월 만인 1882년 1월부터 2월 사이에 『농정신편』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서양 학문에 대한 여론의 거부감이 강하여 즉시 간행되지 못하고 저술 후 3년 이상 지난 1885년 여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근무할 때, 광인사(廣印社)를 통해서 초판본을 간행하였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농정신편』은 필사본으로 초간본과 대부분의 서지사항이 동일하므로, 초간본을 보고 베껴쓴 것으로 보인다.
[서지적 상황]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보관된 『농정신편』, 즉 한문 필사본은 1885년 초간본을 토대로 필사한 것으로, 4권 4책 중 제1권에 해당되는 것이다. 저자는 안종수이고, 서문은 신기선이 양력 1882년 초에 썼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재간본은 1905년 발행한 것으로 한문 150쪽, 연활자본으로 편집자 김일제가 출연금을 내서 4권 1책으로 편집하여 박문사에서 펴낸 것이다. 책 크기는 23.2×15.8㎝이다. 사주쌍변(四周雙邊), 반엽(半葉) 15행 28자, 선장(線裝)으로 엮은 책이다. 1905년 재간본의 표제는 ‘농정신편(農政新編) 단(單)’이다.
이 외에도 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농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1931년 조선총독부가 한글로 번역하여 단권으로 간행한 『농정신편』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된 필사본은 1책 39장으로 책 크기는 30.8×20.3㎝이고 삽화는 없으며, 원본의 1/3정도의 내용에 불과하다. 이 판본은 1882년부터 1883년경에 원본을 보고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는 ‘농정신서(農政新書)’라는 표제를 가진 1885년 초간본의 제2권[31장], 제3권[32장]도 소장되어 있다. 제2권과 3권은 한문 연활자본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21.0×14.0㎝, 사주쌍변, 반곽 16.7×12.6㎝, 반엽 11행21자, 주쌍행(註雙行), 상하향백어미(上下向白魚尾), 선장 등으로 쪽수를 빼고는 거의 동일한 체제와 외형을 갖추고 있다.
[형태]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농정신편』은 1885년 필사본으로 제1권만 있으며, 23.5㎝×18.0㎝, 33장으로 되어 있고 표제는 ‘농정신편(農政新編) 건(乾)’이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된 1882년부터 1883년의 필사본 1책[39장]과 쪽수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다. 그런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초간본[청구기호 古5591-1~4] 제1권은 33장이며, 23.5㎝×18.0㎝의 크기로 반엽 11행 21자, 주쌍행, 선장이며 총 4권으로 되어 있고, 표제는 겉표지와 속표지의 제목이 약간 달라서, 겉표지 제목은 ‘농정신서(農政新書) 원(元)’, 속표지 제목은 ‘농정신편(辳政新編)’으로 되어 있다. 제1~4권의 표지에는 각각 원(元), 형(亨), 이(利), 정(貞) 등의 권차가 책 제목과 함께 매겨져 있다. 따라서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필사본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초간본과 표제만 약간 다르고 책의 크기, 쪽수, 글자 배열, 선장 등이 온전히 일치하고 있으므로 이 필사본은 1885년 초간본을 토대로 필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구성/내용]
『농정신편』 1885년 초간본은 4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4권의 표지에는 숫자 대신에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의 순서로 권차가 매겨져 있다.
표지에 이어서 신기선이 양력 1882년 1월~2월 경에 쓴 서문이 있고, 약 22쪽에 걸쳐 현미경으로 본 작물의 세부구조나 각종 농기구 등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 제1권~4권까지 주요 목차가 게재되어 있고, 본문이 전개된다. 맨 뒤에는 1882년 안종수, 1883년 이조연, 1885년 이명우 등이 쓴 발문이 차례로 나온다.
서문에서 신기선은 동도서기의 입장에서 삼강오륜(三綱五倫)이나 효제충신(孝悌忠信) 등 유교의 도(道)는 결코 바꿀 수 없으나,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측면에서 서양의 발달된 기(器)에 해당되는 농업 등 과학기술은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식자들이 서양 기술을 수용할 때 서양 종교인 기독교도 받아들이게 된다고 염려하는 사실을 의식하여, 도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가 도를 확고히 세운 후 기를 받아들인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본문에는 제1권에서 토양의 종류와 성질을 풀이한 토성변, 작물의 배양법, 제2권에서 거름의 종류와 사용에 대한 분자법, 분배방 등이 서술되어 있다. 제3~4권에서는 작물을 이용 부위별로 분류한 육부경종이 뿌리작물, 줄기작물, 껍질작물, 잎작물, 꽃작물, 열매작물 등의 순서로 설명되어 있다. 안종수는 신사 납월 하완(辛巳臘月下浣), 즉 양력 1882년 1월부터 2월에 쓴 발문에서, 천하고금의 동서각국에서 농사를 중시한 것을 상기하면서 권농국(勸農局)을 설치하고 공사(公私)의 농업학교를 세움은 당연하다고 했다. 일본에 가서 중국과 서양의 농법을 기록한 무수한 책들을 모아서 그 개요를 선별적으로 기록하고 편집하여 『농정신편』을 저술하였음을 밝혔다.
한편, 이조연은 계미동월(癸未冬月), 1883년 겨울에 쓴 발문에서, 안종수가 일본에 가서 서양 각국의 새로운 농법서를 가져와서 『농정신편』을 편찬하였으니 토양의 성질을 분석하고 벼와 곡식에 줄 거름을 배양하는 방법 등이 이미 동양 고래(古來)부터 있어온 권농의 방책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이므로 식자들이 함부로 경시하지 말라고 하였다. 을유(乙酉), 1885년 여름에 쓴 이명우(李明宇)의 발문에서는 안종수가 일본에 다녀와서 『농정신서(農政新書)』를 찬술하였음과 이조연과 이시우가 이 책을 간행하여 보급하고자 노력하였음을 밝혔다. 이어서 거름을 잘 주어 작물을 배양하고 농기구를 정밀하게 제작하여 사용하면 힘은 줄이고 소득을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책의 요지라고 했다.
[의의와 평가]
『농정신편』은 안종수가 1882년 초에 4권 4책의 한문으로 저술하여 1885년 초간본, 1905년 재간본, 1931년 한글 간행본이 발행되었다. 개항 이후 한국 최초로 편찬된 근대적 농법서로서 교육계몽에 뜻을 가진 많은 지식인들에게 대대로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농업서적이다.
또한 일본 농학자 쓰다센의 『농업삼사』를 통하여, 네덜란드의 다니엘 후이브렌크(Danial Hooibrenk) 등이 저술한 서구의 발달된 농법서의 내용을 널리 채록하고 정리하여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보급함으로써, 향후 상공업, 자연과학, 인문지리 등 각종 서구의 근대학문을 수용하여 이를 책자로 발행하는 공적 통로를 열어준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일부 연구자는 안종수가 서구농법을 실제로 농사에 적용하고 그 경험을 기술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