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백자 유종길묘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424
한자 靑畵白瓷 柳宗吉墓誌
이칭/별칭 청화백자 유종길 묘지석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기명류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원재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 청화백자 유종길묘지 제작
현 소장처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상도동 511]지도보기
성격 묘지
양식(문양) 원형 청화백자 위에 붓으로 먹을 묻혀 글씨를 쓰고 난 뒤 유약으로 처리한 방식
재질 청화백자
크기(높이) 지름 17.0~17.1㎝
관리자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있는 유종길 무덤 출토 청화백자 묘지.

[개설]

청화백자(靑畵白瓷) 유종길묘지(柳宗吉墓誌)는 2020년 9월 현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보관 중인 묘지이다.

출토지는 미상이며 지름이 17.0~17.1㎝인 청화백자 원판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한쪽 면에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12행 189자의 한자가 기록되어 있고, 마지막 내용으로 보아 다른 쪽 면에도 계속 글자가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청화백자 유종길 묘지는 최소한 200자 이상의 한자로 기록되었고, 유종길의 집안과 주요 관직과 활동 등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청화백자 유종길 묘지의 내용은 본관이 전주(全州)인 유종길의 8대조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 유영경(柳永慶)[1550~1608]이라고 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6대조가 선조의 딸 정휘옹주(貞徽翁主)의 남편인 부마(駙馬) 전창위(全昌尉) 유정량(柳廷亮)[1591~1663]이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유영경과 유정량의 생존 연대로부터 1대를 대략 20년으로 잡아서 추산해보고 또 양자로 보이는 유호(柳皥)에 관한 응제시(應製試) 합격 기록이 1799년에 보이는 것 등을 종합할 때, 유종길은 대략 18세기 초중반에 태어나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묘지에 기록된 유종길의 관직인 통덕랑(通德郞)[정5품]의 품계는 실직이 아닌 명예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형태]

청화백자 유종길묘지는 지름이 17.0~17.1㎝인 원판 형태의 청화백자 위에 양면을 통틀어 대략 200자 내외의 한자를 묵서(墨書)한 후에 유약을 바르고 화덕에서 구워 완성한 묘지이다.

[특징]

청화백자 유종길묘지는 원판형의 청화백자 표면 양쪽에 세로로 줄을 맞추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앞면의 경우 12행 189자의 한자가 기록되어 있고, 조선 후기 사대부 가문의 장례 때 사용된 묘지의 형태와 크기, 재질 및 비문의 내용 등을 종합적으로 잘 드러내 보여준다.

비문에 의하면, 묘지의 주인공 유종길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字)는 자순(子順)이다. 또 유영경(柳永慶)-유열(柳悅)-유정량(柳廷亮)-유흡(柳洽)-유이진(柳以震)-유규(柳逵)-유득지(柳得之)-유위(柳煒)로 이어지는 유종길의 직계 조상과 몇몇 방계 조상도 소개되어 있다.

8대조인 전양부원군 유영경은 소북의 영수로 선조 말년 영의정에 올랐던 사람이고, 7대조 유열은 통진현감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6대조 유정량은 선조의 부마인 전창위로 광해군 때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인조반정 이후 복권되어 사은사로 수차례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사후에 효정공(孝靖公)에 추증되었다. 5대조 유흡은 돈녕부 도정을 지냈고, 4대조[고조부] 유이진은 벼슬을 못한 채 친자가 없어 사촌형 유이겸(柳以謙)의 아들 유규를 양자로 삼았다. 증조부 유규는 통덕랑이었고, 조부 유득지는 벼슬을 못하고 친자가 없어서 동생 유흠지(柳欽之)의 아들 유위를 양자로 삼았는데, 유위는 양구현감으로 유종길의 부친이었다. 유종길의 모친은 심연(沈埏)의 딸로 숙인(淑人)이었다. 유종길은 묘지에 정5품 상계에 해당하는 통덕랑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조선 후기의 관찬사서에 일체의 활동 행적이 없다. 또한 양자의 응제시 합격사실만 단 한번 거명된 것으로 보아, 실제로 관직에는 오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의 장례풍속으로 죽은 이의 이름, 생몰연대, 평소의 성품이나 행적, 무덤의 위치와 방향 등을 돌판이나 도자기 등에 기록한 묘지(墓誌)를 무덤 속에 안장하거나 묘지석을 세우는 것이 유행했다. 이와 관련하여, 청화백자 유종길 묘지는 18세기부터 평민들의 장례의식에서 널리 사용하던 접시 등 기물형(器物型) 백자와는 달리, 처음부터 일정한 두께를 가진 원판형(圓板型)으로 만든 청화백자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형태상으로도 장방형의 묘지가 흔한데 비해 그 숫자가 드문 원형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묘지의 주인공 유종길은 8대조 유영경 때부터 5대조 유흡까지 대대로 고위 관료를 배출한 명망높은 사대부 집안의 자손이었다. 또한 부친 유위가 종6품 양구현감이었고 자신은 명예직으로 추정되는 정5품 통덕랑의 품계를 얻은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화백자 유종길묘지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연유와 무덤 발굴장소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799년(정조 23) 3월 27일 서울 관기정에서 실시된 응제시의 과방에 유학(幼學)인 유호(柳皥)가 합격자의 말미에 부친[양부] 유종길의 이름과 함께 올라가 있는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청화백자에 새겨진 유종길의 묘지는 양자인 유호가 양부 유종길의 사후인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제작하여 무덤 속에 안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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