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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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畵巖敬次老先生韻 |
영어공식명칭 | Reply To The Hwa-arm Poem Written By Teacher Lee-hwa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870년 - 「화암경차노선생운」 저자 채성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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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 「화암경차노선생운」 저자 채성원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959년 - 『공산집』에 「화암경차노선생운」 수록하여 간행 |
배경 지역 | 화암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
성격 | 한시|칠언절구 |
작가 | 채성원 |
[정의]
근대 대구 출신의 학자인 채성원이 연경서원과 화암을 노래한 이황의 한시에 차운하여 지은 한시.
[개설]
「화암경차노선생운(畵巖敬次老先生韻)」은 연경서원과 화암을 노래한 이황의 한시에 차운하여 지은 한시이다. 저자 채성원(蔡星源)[1870~1932]의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자는 사규(士奎), 호는 공산(公山)이다. 아버지는 채세동(蔡世東)이고, 어머니는 부림홍씨(缶林洪氏) 홍우찬(洪禹燦)의 딸이다. 생부는 채석현(蔡錫玄), 생모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수형(李秀瑩)의 딸이다. 대구부 해북촌면(海北村面) 미대리(美岱里)[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서 태어났다. 김도화(金道和)[1825~1912]에게 학문을 익혔다. 산수를 사랑하여 가야산(伽倻山), 계룡산(鷄龍山), 금강산(金剛山), 압록강(鴨綠江) 등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주희(朱熹)[1130~1200]의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과 이황(李滉)[1501~1570]의 「도산기(陶山記)」를 자주 외웠다. 『사례작휘(四禮酌彙)』를 찬집하였고, 저서로 『공산집(公山集)』이 있다.
연경서원(硏經書院)은 대구광역시에 최초로 지어진 서원이며, 이황·정구(鄭逑)[1543~1620]·정경세(鄭經世)[1563~1633] 세 사람과 함께 별도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전경창(全慶昌)[1532~1585]과 이숙량(李淑樑)[1519~1592]을 제향하였던 서원이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연경서원의 터는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과 북구 연경동의 사이에 있다.
화암산(畵巖山)은 해발고도 110m의 산이며, 지도상에 정식 명칭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화암(畵巖)이라는 하식애(河蝕崖)가 있는 산이라 하여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구성]
「화암경차노선생운」은 칠언절구(七言絕句)이다.
[내용]
암명비시자연성(巖名非是自然成)[화암이라는 이름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위석선생차일경(爲昔先生此一經)[옛날 선생께서 여길 한 번 다녀가셨기 때문이네]
모도회황수취몽(暮道徊徨愁醉夢)[저문 길 배회하며 취하고 몽매한 이 근심하니]
제반금일기미성(躋攀今日冀微醒)[오늘 여기에 올라 조금이라도 깨닫기를 바라보네]
[특징]
「화암경차노선생운」은 이황의 「화암서원(畵巖書院)」에 사용된 ‘청(青)’ 계열의 운목을 사용하여 지은 칠언절구이다. 환성(喚醒)의 대상을 화자 자신으로 표현하였지만 독자에 따라 그 대상이 확장될 수 있게 표현하였다.
[의의와 평가]
「화암경차노선생운」은 이황의 「화암서원」에 차운한 작품이다. 시의 분위기는 이황의 시와 흡사하다. 이황이 읊은 화암서원은 ‘연경서원’의 별칭이다. 채성원이 「화암경차노선생운」을 창작할 때 연경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옛 흔적만 남아 있을 때이다. 연경서원은 훼철되어 흔적만 남았지만 화암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채성원은 화암에 올라 선현의 깨우쳐 줌이 화암처럼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를 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