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6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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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呈監司文 |
영어공식명칭 | An article to the governor |
이칭/별칭 | 「감사에게 올리는 글」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43년 - 「정감사문」 저자 정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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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18년 - 「정감사문」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20년 - 「정감사문」 저자 정구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80년 - 『한강집』에 「정감사문」 수록하여 간행 |
배경 지역 | 보로동 선영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
성격 | 공문|정문 |
작가 | 정구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일대에서 강학 활동을 하던 문신이자 학자인 정구가 김굉필 묘역 주변에 투장이 발생하여 1618년 경상감사에게 산송을 제기한 글.
[개설]
「정감사문(呈監司文)」의 저자 정구(鄭逑)[1543~1620]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이다.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 이환(李煥)의 딸이다. 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외증손이다. 이황(李滉)[1501~1570]과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이다. 모든 방면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많은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 정구는 말년에 칠곡 사수(泗水)[현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과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일대]로 이거(移居)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대구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도동서원(道東書院) 등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투장(偸葬)’은 다른 사람의 묘지 주변에 불법적으로 매장하는 것을 말하고, ‘산송(山訟)’은 분묘 또는 분묘 주변을 대상으로 하는 소송을 말한다. 보통 고을 수령에게 산송을 제기하는데, 해결되지 않으면 상급 관청으로 계속 소송을 제기하였다.
2001년에 발행된 『국역 한강집』에 수록된 「정감사문」의 이칭은 「감사에게 올리는 글」이다.
[구성]
「정감사문」은 분쟁이 발생한 김굉필 선영(先塋)의 위치와 산송의 대상과 경위를 설명하며 해결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
「정감사문」은 보로동(甫老洞)[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일대]에 위치한 김굉필의 선영에 김굉필 증손 중 지차(之次) 아들의 주검을 그 자손이 문중(門中)과 사문(斯文)에 묻지도 않고 선영 주변을 훼손하며 매장한 것에 대한 산송의 글이다. 정구는 김굉필의 선영은 김굉필이 손수 가꾸며 예법에 맞게 관리한 곳이고, 김굉필의 묘소도 있는 곳이라서 유가(儒家)에서 130여 년을 넘게 지켜 온 곳이라 말한다. 그런데 김굉필 증손 중 지차 아들의 자손이 주변을 망가뜨리면서 새로이 묘를 조성한 것에 대하여 참담한 심정을 토로하며, 선영 보존의 중요성과 투장의 불법성을 호소하고 있다. 이어서 최근의 유사한 사례를 제시하며 경상감사(慶尙監司)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특징]
「정감사문」은 정연하고 논리적으로 산송을 제기한 글이다. 서두에 선영이 가지는 가치를 드러내고, 본문에서 사건의 경위와 불법성을 밝히며, 사건 해결의 당위성을 효(孝)와 대의(大義)의 관점에서 피력하였다. 말미에서는 최근의 판례를 들어 가며 설득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정감사문」은 16세기 이후로 빈번히 발생하였던 산송의 일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산송을 제기하는 내용 형식과 구성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